주간동아 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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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진흙탕 싸움 됐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대학살의 신’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8-20 11: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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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진흙탕 싸움 됐네
    당신 자식이 어디서 맞고 왔다. 아이 얼굴이 퍼렇게 멍들고 코피가 줄줄 흐른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이번엔 당신 자식이 친구를 흠씬 두드려 팼다. 당신 집 문 앞에 얼굴이 곤죽이 된 아이가 붉으락푸르락 잔뜩 화난 부모와 함께 서 있다. 당신 기분은 어떨까. 그래도 내 자식이 어디 가서 맞고 온 것보다는 남의 아이를 때린 게 낫다고 위안할 수 있을까.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고 했다. 폴란드 출신의 거장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신작인 ‘대학살의 신’ 역시 아이 싸움이 발단이다. 제목은 거대한 재난 영화나 전쟁 영화, 혹은 판타지 영화를 기대하게 하지만,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한 집 안의 거실에서 일어난 일을 다룬 코미디 영화다. 아이싸움 때문에 모여 앉은 부모들의 이야기다. 우아하고 정중한 서구 중산층의 품격 높은 대화가 막장 저질 코미디로 치닫는 적나라한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묘사된다. 한국으로 치면 김수현 작가에 비견되는 촌철살인 대사가 끝없이 폭죽을 터뜨리고, 폐부를 찌르는 유머와 코미디가 시종 객석을 덮치는 격이다.

    11세 소년 둘이서 놀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막대기로 때리는 바람에 송곳니 2개가 부러졌다. 영화는 가해 소년 부모가 피해 소년 부모를 만나 합의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피해 소년 부모가 진술서에 가해 소년을 “막대기로 무장한 채”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가해 소년 아버지가 이의를 제기해 “막대기를 갖고서”라고 수정하는 등 사소한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이내 순조롭게 화해가 이뤄졌다.

    덕담과 겸손에 가린 발톱

    가해 소년 부모인 앨런(크리스토퍼 발츠 분)과 낸시(케이트 윈즐릿 분)는 피해 소년의 집 거실을 장식한 부모의 취향에 덕담을 하는 것으로 방문을 마무리짓고 떠나려 한다. 이들이 집을 나서고, 피해 소년 부모가 배웅을 하면서 호의로 직업을 묻고 상대방이 대답하고, 또 지나치듯 말 몇 마디를 건네는데 그것이 결국 화근이 된다. 피해 소년의 어머니 페넬로피(조디 포스터 분)가 “당신 아들이 우리 아이에게 사과할 수 있을까요?”라고 묻고, 남편 마이클(존 C. 라일리 분)이 커피와 과자를 권하면서 떠나려던 앨런과 낸시의 발길을 잡는다.



    다시 머리를 맞댄 두 소년의 부모들. 사과는 변명을 넘어 비난으로 향하고, 위로는 점차 빈정거림이 된다. “우리 아이들은 공동체 의식이 부족해요” “명예는 사회적 맥락이 필요하지요” “당신은 예술 애호가로 보여요” “이 작품에는 잔인함과 웅장함, 균형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해요” “문화와 예술은 폭력을 부정하고 평화를 옹호하지요” 등의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속내를 드러내는 순간 말과 단어는 구체적이고 말초적이며 노골적으로 변한다.

    외교적 언사는 완곡하고 추상적이며 개념적이다. 덕담과 지적인 어휘 뒤로 숨겼던 발톱이 욕설과 저주, 인신공격으로 본색을 드러내자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화를 잘 내는 개자식들” “망할 놈의 여편네” “우리 애가 당신 애를 개 패듯이 했어야 하는데” “당신 애는 고자질쟁이야” “내 엉덩이로 당신이 말하는 인권의 밑이나 닦아보시지” 같은 막말은 물론 육두문자도 서슴지 않는다.

    아이 싸움에서 촉발된 어른 싸움의 주제는 그야말로 ‘버라이어티’하다. 커피로 시작해 위스키로 이어지는 회합 중에도 전선이 시시각각 변한다. 가해자와 피해자 부모로 편을 갈라 싸우다 남자끼리 의기투합하기도 하고, 여자끼리 뭉쳐 남편들에게 맹공을 퍼붓기도 한다. 숨겨뒀던 각자의 콤플렉스가 드러나고 부부의 결혼생활에 도사린 갈등이 폭발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의 잘잘못 가리기는 관심 밖이고, 햄스터를 내버린 사건을 거론하며 생명존중이나 동물애호에 관한 논쟁이 펼쳐지는가 하면, 아프리카 내전에 대해 설왕설래하기도 한다. 고급 취향으로 보기 좋게 꾸민 거실에서의 반나절 ‘티타임’은 그렇게 허세, 위선, 편견, 욕망, 죄책감 등 서구 중산층의 의식이 맨몸을 드러내며 ‘제리 스프링거 쇼’(일반인이 출연해 충격적인 사생활을 털어놓는 미국의 유명 토크쇼)가 된다.

    아이들 싸움이 어른들 진흙탕 싸움 됐네
    거실 안에서 펼쳐지는 블록버스터

    스타 4명이 연기하는 각 인물의 개성과 스타일도 재미있다. 가해 소년의 아버지인 앨런은 냉소적인 변호사로, 부작용이 보고된 약품을 생산하는 제약회사의 법적 대리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좋은 분위기로 흘러가는 대화의 맥을 툭툭 끊는다.

    그와 대조적인 인물이 피해 소년의 어머니인 페넬로피다. 아프리카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이자 서구 문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자로, 아이 싸움을 교양 있고 품위 있게 정리하려 애쓰지만 결국 허세의 가면을 벗고 숨겨놓았던 가시를 드러낸다.

    그의 남편 마이클은 가정용품 판매업자인데 이래도 흥 저래도 흥, 좋은 게 좋다는 식의 타협주의자다. 하지만 사람 좋은 얼굴 뒤로 감췄던 독설과 불만을 터뜨릴 땐 폭탄을 능가하는 위력을 보인다.

    투자중개업자인 낸시는 육감적 외모에 똑 부러지는 성격을 지녔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거실 한복판에 구토를 하는가 하면 술주정에 집기를 부수는 등 거침없는 행동으로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자신은 과연 이 ‘네 가지’ 인물 유형 중 어디에 속하는지 따져보는 것도 영화를 즐겁게 보는 방법이다.

    ‘대학살의 신’은 이들 4명이 라운드를 거듭하며 벌이는 태그매치 프로레슬링 경기 같다. 인물과 대사, 상황과 연기만으로 만들어낸 ‘코미디 블록버스터’라 할 만한 작품이다. 야스미나 레자의 희곡을 원작으로 했으며 연극은 이미 토니상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에서 주요 상을 휩쓸었다. 영화는 연극 얼개를 그대로 가져왔지만, 매 순간 스크린에 긴장과 유머를 불어넣은 폴란스키의 연출력이 거장이 만든 작품임을 확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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