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8

2012.07.30

그해 호되게 비를 맞아봤으니까

  • 입력2012-07-30 10: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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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해 호되게 비를 맞아봤으니까
    안개 속의 거짓말

    나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다

    실패한 봄이 나를 지나간 후였다

    꽃이 혼자 지던 날

    무게중심은 어디서나 숨길 수 없다



    저기 막 사라진 사람들

    고개를 숙인 사람들

    앞 축이 닳은 신발을 신은 사람들

    치욕 같은 맨발을 내보인 사람들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

    이미 나를 지나간 내 거짓말

    나는 가볍고

    구름은 금세 몸을 바꿔 흩어져

    한 번도 우리는 우리를 관통한 적 없었다

    나는 지금 울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막 안개를 지나온 것이거나

    안개와 섞여본 적이 없음을 알았을 뿐

    지나가던 눈물을 훔쳐 살 뿐

    그리하여 매번 너무 늦게 울었거나

    안개에 얼굴을 묻는

    발 없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김선재 ‘안개 속의 거짓말’

    (‘얼룩의 탄생’ 문학과지성사, 2012 중에서)


    그해 호되게 비를 맞아봤으니까

    어느 날, 눈을 뜨고 보니 병원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걸 알아차렸느냐고? 링거 병을 보고 놀라 냅다 소리 질렀느냐고? 의사나 간호사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느냐고? 셋 다 아니다. 나를 잠 깨운 건 바로 병원 특유의 냄새였다. 소독약 냄새와 비린내가 묘한 비율로 섞인 바로 그 냄새. 아무리 익숙해져도 맡을 때마다 어김없이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바로 그 냄새. 결코 내 것이 될 수도, 될 리도 없는 지독하기 짝이 없는 냄새. 온몸을 방부할 것만 같은 압도적인 냄새.

    그렇다. 어젯밤 나는 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팔꿈치에 박힌 철심을 제거하려고. 지난번엔 구급차에 실려 왔지만, 이번엔 내 발로 걸어 들어왔다. 친해진 간호사 누나에게 첫말을 건네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누나가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누나가 병실 밖으로 나가고 나니, 조금 쓸쓸해졌다. “저기 막 사라진 사람” 앞에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숙인 사람”이 돼버렸다. 여기는 확실히 희망보다는 절망이, 웃음보다는 울음이, 안심보다는 걱정이 많은 곳이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꼼짝없이 여기에 있어야 한다. “치욕 같은 맨발을 내보인” 채 잠든 사람들 틈에서 맥 빠진 채로 자리에 누웠다.

    한동안 눈을 질끈 감고 있었는데도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거두지 못했”던 지난봄이 자꾸 떠올랐다. 사고 후 1년 반이 지났고, 나는 다시 병원에 와 있다. 얼핏 낯익지만, 동시에 더없이 낯설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휘 둘러본다. 창밖이 뿌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라도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었다. “안개와 섞여” 보고 싶었다. 안개 속에 있으면 그 누구도 내가 병약하다는 걸 알지 못하겠지. 남몰래 일어나 슬리퍼를 끌고 병원 건물 뒤편에 있는 공터로 나갔다. 공터에 첫발을 얹는 순간, 나도 모르게 휘청거렸다. “무게중심은 어디서나 숨길 수 없”었다.

    때마침 안개비가 자욱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노라니,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참을 수 없이 끔찍했다. 연신 재채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숨이 꺽꺽 막혔다. 양 볼이 뜨겁고 축축했는데, 그게 안개비 때문인지 눈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무엇 때문에 우는 것인지 불투명했다. “울고 있는 동안은/ 눈물에 대해 말하지 못”하므로, 온 마음이 내처 눈물만을 관통하고 있으므로.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고 있었다. 나는 이때만을 기다려온 사람처럼 펑펑 울었다. 양 볼이 시큰시큰했다. 속이 다 시원했다.

    그해 봄은 더는 ‘실패한 봄’이 아니었다. 결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한 게 아니었다. 나는 더 밝아지고 더 강해졌으니까. 주위 사람들에게 더 깊게 고마워할 줄 알게 됐으니까. 한번 호되게 비를 맞아봤으니까. 한번 끝까지 울어봤으니까. 빗속에서 안개와 함께 자욱해져봤으니까. 어느 날, 문득 거울을 봤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웃고 있었다. 너무 빠르지도 않고 너무 느리지도 않은 웃음이었다. 그 모습은 “이미 나를 지나간 내 거짓말” 같았다. 손발이, 입이 근지러웠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무슨 글이라도 써야 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는 느낌이었다. 어떤 장면이 나타날지 두근거려서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아무것”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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