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42

2012.06.18

뻔한 내용이 아니라 감동이 필요해

뮤지컬 ‘울지마 톤즈’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2-06-18 11: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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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뻔한 내용이 아니라 감동이 필요해
    “이 생명 다하도록 뜨거운 마음속 불꽃을 피우리라.”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 고(故) 이태석(1962~2010) 신부가 암 투병 중에도 허허 웃으며 윤시내의 ‘열애’를 부르던 모습을 기억하는가. 그는 이 세상과 뜨겁게 열애했다. 2001년 사제 서품을 받고 수단 남쪽의 작은 도시 톤즈로 떠난 그는 8년간 ‘모든 것이 부족하고 모든 것이 필요한’ 그곳의 유일한 의사였다. 아픈 이의 몸을 돌봤을 뿐 아니라 가족과 꿈을 잃은 아이들에게 희망을 선물했다. 의사, 선교사, 음악가, 교사…. 톤즈가 필요로 하는 모든 소임을 해내는 동안 그의 몸속에서는 암이 자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가는 날까지 맑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행보를 담은 영화 ‘울지마 톤즈’는 30여만 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워낭소리’에 이어 역대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관객동원 순위 2위에 올랐다. ‘울지마 톤즈’는 영화관뿐 아니라 학교, 병원, 고아원, 공공기관 등에서도 상영되며 화제가 됐다. 이후 ‘이태석 신부상’을 만들고, 세계 각국 빈민촌에서 봉사하는 한국인을 재조명하는 등 ‘톤즈 신드롬’이 일었다.

    뮤지컬 ‘울지마 톤즈’ 역시 그의 고귀한 희생을 다시 생각하고 그의 가르침을 받들자는 맥락에서 나온 작품이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담았다고 한들, 작품 자체의 완결성이 떨어져 관객에게서 카타르시스를 이끌어내지 못하면 좋은 작품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뮤지컬 ‘울지마 톤즈’는 큰 아쉬움을 남긴다. 일단 모든 주인공이 너무 평면적이다. 이 신부를 곁에서 돕는 쾌활한 수녀, 어린 나이에 소년병으로 끌려가 세상을 불신하는 봉고, 병을 이긴 뒤 희망을 안고 사는 로다와 그를 짝사랑하는 순수청년 산티노. 어느 작품에서건 한 번쯤 봤을 법한 전형적인 캐릭터다. 평면적 인물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는 “역시… 저럴 줄 알았어”라는 체념만 낳는다.

    뮤지컬의 큰 축 가운데 하나는 춤과 노래다. 그런데 춤과 노래가 지나치게 엉성하다. 첫 장면에 나오는 톤즈 사람들의 군무는 아프리카 대륙의 광활한 생명력을 표현하려는 것 같으나 절도가 없고 짜임새가 부족하다. ‘주일학교 장기자랑’ 수준이다. 낯선 몸짓에 관심이 가기도 전에 너무 아마추어적이라 불편한 마음이 먼저 든다.



    음악도 기교만 있고 진심은 없다. 두 사람이 부르는 전혀 다른 멜로디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풍성해지는 것이나, 두 사람의 대화가 음악에 담기는 대목은 다른 뮤지컬 넘버를 훔쳐온 것처럼 불편하고 어색했다. 어쩌면 상당히 세련될 수 있었던 기교를 내재화하지 못한 탓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돼버렸다. 뮤지컬은 시간과 배경을 옮겨올 수 없기 때문에 춤과 노래, 연출로 빈틈을 메워야 한다. 원작이 아무리 탄탄하다고 해도 이 부분을 충족하지 못한다면 직무유기다.

    영화 ‘울지마 톤즈’가 많은 관객에게 감동을 준 것은 끊임없이 고뇌하면서 운명에 맞서나간 인간 이태석을 그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제 몸을 불태워 남을 도운 사람이 한둘인가. 관객은 왜 그가 톤즈에 갔는지, 그가 어떤 고통을 가졌는지 알고 싶고 공감하고 싶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그가 맞이하는 고통은 매우 단편적이고 예측 가능하다. 보는 내내 ‘이런 마음을 가지면 안 될 것 같은데 이거 정말 따분하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 작품을 보러 온 관객은 ‘착한 일 하던 주인공이 아파서 죽는다’라는 기본 줄거리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공연장을 찾을 때는 울 준비가 됐다는 얘기다. 감동할 준비가 된 ‘착한’ 관객들에게 왜 이 정도 선물밖에 주지 못하는가. 진지한 반성이 필요하다. 7월 15일까지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600주년기념관 새천년홀, 문의 02-758-2150.

    뻔한 내용이 아니라 감동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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