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3일 오전 최동익 민주통합당 의원실에 들어서 서원선(35) 비서관을 찾으니 출입문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남성이 일어섰다. 전화통화도 하고 문자도 주고받았던 터라 반갑게 인사를 건네니 그가 다가오며 악수를 하는데 잡은 손이 다른 사람 손이다. 마침 서 비서관 앞을 지나다 손을 붙잡힌 동료가 웃으며 “아니 왜 손은 잡고 그러느냐”며 뿌리쳤고, 다른 동료들이 “원래 잡고 싶었던 것 아니냐”며 놀리니 그의 뽀얀 얼굴이 금세 붉어졌다.
서 비서관은 시각장애인이다. 최 의원이 시각장애인이니 시각장애인 의원의 시각장애인 비서관인 셈이다. 어릴 적부터 글씨가 잘 안 보여 책을 눈에 가까이 대고 봐야 했던 그에게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신경위축증 진단이 내려졌다. 그 후로 상태가 악화해 지금은 왼쪽 눈은 전혀 안 보이고 오른쪽 눈은 사물이 있고 없고 정도만 가려내는 아주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경기 과천시 집에서 국회까지 대중교통으로 혼자 출퇴근하는 것은 물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서 혼자 지내며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가톨릭대, 한신대 등에서 장애인 직업재활과 관련한 강의를 하고,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으로도 일했다.
“미국에 가기 전인 2003년과 비교하면 장애인 대우가 시설 면에서는 정말 좋아졌어요.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구직할 때 높은 벽에 부딪치죠.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도 없이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니까요. 장애인들이 대부분 경제적 자립을 못해 고민을 많이 해요. 돈을 못 버니까 대개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감을 잃는 것은 물론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고 가족과 갈등을 빚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장애인에게는 직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구직 전선에서 ‘장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인사권자들의 의구심을 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경험한 그는 앞으로 최 의원을 도와 장애인의 직업재활과 자립, 사회참여를 위한 정책 마련에 집중할 계획이다. 장애인 복지 및 재활, 편의, 그리고 차별 금지 등을 위한 법 제정 및 개정에 필요한 자료 검색도 그의 몫이다. 특히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유학한 실력을 토대로 외국 사례를 수집하면서 국제 협조를 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미국에 가보니 우리나라에선 가정에서 도맡아 하는 장애인 관련 지원이 모두 국가와 기관 몫이더라고요. 학창시절 일반 학교에 다녔던 터라 눈으로 봐야 할 많은 것을 어머니가 다 읽어서 녹음해주고, 시험지를 볼 수 없어 아무거나 찍고 나온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선 대학에 요청하면 필요한 자료를 음성파일로 만들어주고, 시험 볼 때 제 답을 대신 써주는 사람을 지원해주기도 했어요. 캠퍼스가 너무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며칠 동안 저를 데리고 다니며 오리엔테이션을 해주기도 했고요. 의원님을 도와 열심히 일해서 우리 사회도 그렇게 조금씩 바꿀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서 비서관은 동료의 팔을 붙잡고 의원실을 나서 다음 일정이 있는 국회의사당 본관으로 향했다.
“시각장애인이 취업하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보조 인력을 제공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시각장애인 복지시설인 실로암복지관에서 특별히 오후에만 도우미를 보내주고 있어요. 동료 분들이 저 때문에 애를 많이 쓰죠. 장애인이 취업하더라도 고용 유지가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동료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인데, 저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장애인의 공공기관 진출이 더욱 늘어날 텐데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데 저도 기여하고 싶어요.”
서 비서관은 시각장애인이다. 최 의원이 시각장애인이니 시각장애인 의원의 시각장애인 비서관인 셈이다. 어릴 적부터 글씨가 잘 안 보여 책을 눈에 가까이 대고 봐야 했던 그에게 초등학교 1학년 때 시신경위축증 진단이 내려졌다. 그 후로 상태가 악화해 지금은 왼쪽 눈은 전혀 안 보이고 오른쪽 눈은 사물이 있고 없고 정도만 가려내는 아주 약간의 시력이 남아 있다. 그럼에도 경기 과천시 집에서 국회까지 대중교통으로 혼자 출퇴근하는 것은 물론, 2003년부터 2010년까지 미국에서 혼자 지내며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에서 돌아와서는 가톨릭대, 한신대 등에서 장애인 직업재활과 관련한 강의를 하고, 국회에 들어오기 전까지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정책연구원으로도 일했다.
“미국에 가기 전인 2003년과 비교하면 장애인 대우가 시설 면에서는 정말 좋아졌어요. 하지만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구직할 때 높은 벽에 부딪치죠. 실력을 검증받을 기회도 없이 서류전형에서 탈락하니까요. 장애인들이 대부분 경제적 자립을 못해 고민을 많이 해요. 돈을 못 버니까 대개 집에 틀어박혀 있는데, 그러다 보면 자신감을 잃는 것은 물론 우울증이 생기기도 하고 가족과 갈등을 빚기도 하죠. 그런 점에서 장애인에게는 직업이 그 무엇보다 중요해요.”
구직 전선에서 ‘장애인이 제대로 일할 수 있을까’ 하는 인사권자들의 의구심을 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몸소 경험한 그는 앞으로 최 의원을 도와 장애인의 직업재활과 자립, 사회참여를 위한 정책 마련에 집중할 계획이다. 장애인 복지 및 재활, 편의, 그리고 차별 금지 등을 위한 법 제정 및 개정에 필요한 자료 검색도 그의 몫이다. 특히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미국에서 유학한 실력을 토대로 외국 사례를 수집하면서 국제 협조를 구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미국에 가보니 우리나라에선 가정에서 도맡아 하는 장애인 관련 지원이 모두 국가와 기관 몫이더라고요. 학창시절 일반 학교에 다녔던 터라 눈으로 봐야 할 많은 것을 어머니가 다 읽어서 녹음해주고, 시험지를 볼 수 없어 아무거나 찍고 나온 적도 많았거든요. 그런데 미국에선 대학에 요청하면 필요한 자료를 음성파일로 만들어주고, 시험 볼 때 제 답을 대신 써주는 사람을 지원해주기도 했어요. 캠퍼스가 너무 넓어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며칠 동안 저를 데리고 다니며 오리엔테이션을 해주기도 했고요. 의원님을 도와 열심히 일해서 우리 사회도 그렇게 조금씩 바꿀 수 있다면 더 없이 좋겠어요.”
인터뷰를 마친 서 비서관은 동료의 팔을 붙잡고 의원실을 나서 다음 일정이 있는 국회의사당 본관으로 향했다.
“시각장애인이 취업하면 한국장애인고용공단에서 보조 인력을 제공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해서 시각장애인 복지시설인 실로암복지관에서 특별히 오후에만 도우미를 보내주고 있어요. 동료 분들이 저 때문에 애를 많이 쓰죠. 장애인이 취업하더라도 고용 유지가 잘 안 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동료와의 불편한 관계 때문인데, 저는 좋은 분들을 만나서 정말 감사해요. 앞으로 장애인의 공공기관 진출이 더욱 늘어날 텐데 장애인에 대한 지원을 확대하고 제도화하는 데 저도 기여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