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9

2012.05.29

돈 펑펑 쓰는데 모욕 그까이꺼?

임상수 감독의 ‘돈의 맛’

  • 이형석 헤럴드경제 영화전문기자 suk@heraldm.com

    입력2012-05-29 10: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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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 펑펑 쓰는데 모욕 그까이꺼?
    지하창고에는 1만 원짜리 현금다발이 그득하다. 초고가 회화와 조각이 즐비해 미술 갤러리를 떠올리게 하는 지상의 크고 호화로운 서재에선 매일 정사와 난교가 포르노처럼 펼쳐진다. 권력을 쥔 수컷 혹은 여왕벌이 마음에 드는 상대를 골라 하는 교접에는 계통도, 위아래도 없다.

    이곳, 서울 도심을 내려다보는 1322m2(400평)짜리 대저택은 대한민국 권력의 본산, 최상류층 재벌가다. 한국 사회의 해부도이자 재벌가로 상징되는 욕망의 단면도다. 지하에 똬리를 튼 돈다발은 파내도 계속 샘솟는 욕망과 모든 에너지의 근원이자 프로이트가 말한 최저층의 무의식, 그러니까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리비도’다. 리비도가 충동하는 욕망은 값비싼 예술품과 외설적인 포르노로 구현되고, 웅장하게 구축한 대저택은 권력의 상징이 된다. 섹스와 권력이야말로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인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돈의 맛이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인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은 묻는다. “그래서 돈이 주는 모욕은 견딜 만하십니까?”

    돈으로 맛보는 섹스와 권력

    영화는 5만 원권 5만 장, 100달러권 5만 장 등 실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제작한 ‘소품’ 82억 원이 든 지하창고를 열어 보이는 것으로 득의양양하게 시작한다. 대한민국 재벌가의 ‘현대판 궁전’에서 벌어지는 욕망의 막장드라마를 때론 파노라마처럼, 때론 ‘몰카’ 속 영상처럼 펼쳐나간다.



    “세금 한 푼 안 들이고 돈 60억 원을 돌려 200조 원을 통째로 갖는 거지. 한국에서는 다 이해해줘. 법이든 법조인이든 다 할아버지(재벌 창업주) 손아귀에 있거든.”

    기업을 물려받은 젊고 잘생긴 재벌 후계자(온주완 분)가 말한다. 편법 상속이다. 재벌 2세 딸과 결혼해 평생을 기업과 정치권, 사법권 사이에서 은밀하고 추잡한 뒷거래를 감당해온 회장 아버지(백윤식 분)는 외국계 기업 파트너와 함께 다양한 인종의 젊은 여성 몇 명을 침대로 불러들여 ‘난교 파티’를 벌인다. 똬리를 틀듯 회장의 벗은 몸을 감싼 전라 혹은 반라의 여인들이 스크린에 그대로 등장한다.

    윤 회장의 부인 백 여사(윤여정 분)와 딸(김효진 분)은 동시에 한 남자의 육체를 탐한다. 한국 사회의 음화(陰畵)이자 외설스럽기 짝이 없는 음화(淫畵) 속에서 재벌가 안팎을 오가며 이들을 지켜보는 윤 회장 비서 영작(김강우 분)이 모녀의 구애를 동시에 받는다. 입사 10년차 ‘월급쟁이’이자 재벌가의 온갖 뒤치다꺼리를 하는 집사격의 남자다.

    임 감독의 전작(하녀)이 하녀의 눈과 몸으로 최상류층의 욕망을 기술했다면, 이번 작품에선 현대판 머슴 영작이 비슷한 구실을 한다. 최상류층 곁에서 그 세계의 일원이 되기를 꿈꾸지만 절대 막장드라마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사내.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관객이 동일시할 수 있는 월급쟁이다.

    돈 펑펑 쓰는데 모욕 그까이꺼?
    문제적이고 공격적인 표현 방식

    영화는 편법 상속과 외화 밀반출, 외국기업과의 협잡, 떡값을 고리로 한 정치·사법권과의 유착 등 재벌의 비리뿐 아니라 난교, 불륜, 연예인과의 밀회 등 사생활의 부도덕성을 거침없는 영상과 대사로 담았다. 임 감독은 “너무 늦게 도착한 영화”라고 할 만큼 각종 미디어 보도와 검찰 수사 등으로 공식화된 사실뿐 아니라, ‘X파일’로 부를 만한 재벌가 주변의 소문까지도 스크린에 옮겼다.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봤음직한 소재와 내용이지만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면 자못 충격적이다.

    임 감독은 재벌가의 군상과 이들의 수발을 들며 야심을 키우는 한 인물을 통해 ‘돈의 맛에 취했다가 결국 돈에 모욕당한 인생’의 페이소스, 아이러니를 그렸다. 재벌의 파렴치한 모습에 담긴 한국 사회의 모순,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회한이 이 영화가 지닌 키워드다. “‘하녀’의 그 후”라고 할 만큼 전작의 맥락을 잇는 작품으로 영상미가 빼어나다. 특히 재벌가 대저택을 통해 계급과 신분, 욕망을 구도화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직설과 은유를 넘나들며 종종 웃음을 자아내는 ‘말의 맛’ 역시 관람 포인트다. 윤 회장과 백 여사는 ‘떡값’과 로비명목의 돈을 건네며 “배 속에 아기들이 사는지 먹어도 먹어도 더 먹으려 해” “찌끄러기 돈으로 부자 되는 것도 아닌데 판사, 검사, 기자, 교수 나부랭이들까지 왜들 그렇게 난리인지”라고 말하며, 계열사 사장들을 가리켜 “서울대 경제학과 나와서 현금보따리 나르다가 한 자리씩 차지하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회장이 “우리 없는 한국이 상상되느냐”고 말하면 후계자는 “우리가 잘하려 해도 정치 파트너가 순 촌놈에 날강도라 안 된다”고 화답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윤 회장은 현금 지하창고에 들어서며 비서에게 “돈의 맛 좀 보라”면서 “돈에 중독돼 끊기가 무서웠다. 원 없이 펑펑 썼지. 근데 그게 그렇게 모욕적이더라”고 토로한다. 재벌 창업주의 사위가 돼 기업 후계자 자리에 오른 윤 회장의 모습은 영작이 이 재벌가에 남아 그릴 수 있는 가장 성공한 모습일지 모른다. 영작에게 과연 내일이 있을까. 이 막장 풍속도엔 구원의 희망이 있을까. 임 감독은 뻔뻔하고 파렴치한 그들 가운데 젊은 두 남녀를 마지막 위안이자 희망의 근거로 남겨뒀다. 그들은 모욕을 알고 죄책감을 느끼며 부끄러워할 줄도 아는 사람이다.

    이번 영화는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바람난 가족’ ‘그때 그 사람들’ ‘오래된 정원’ ‘하녀’에 이은 임상수 감독의 7번째 장편이다. 우리 사회가 가진 음영과 변화상을 날선 시각으로 그려온 임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성과 정치, 계급을 다루는 데서 매우 문제적이며 공격적인 한국 영화감독 가운데 한 명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임 감독 특유의 독설, 직설, 냉소, 풍자와 함께 인물에 따라 따뜻하고 감성적인 시선을 보인 점은 전작과 다르다. 특히 김효진이 연기한 ‘나미’는 ‘하녀’에서 하녀의 비극적 자살과 복수를 지켜본 소녀와 같은 이름으로, 전작의 개인사를 이번 작품에 그대로 불러온 셈이다. 그만큼 임 감독이 애정을 갖는 캐릭터일 터. 김강우가 연기한 영작 또한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바람난 가족’ ‘오래된 정원’ 등 임 감독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남자 이름이다. 감독 데뷔 전 시나리오를 쓸 때 임 감독 필명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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