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30

2012.03.26

명품 이 남자 秋승균

프로농구 15시즌 뛰며 5차례 우승 반지 껴…은퇴 아쉬움 뒤로하고 지도자로 새 인생 꿈꿔

  • 김종석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kjs0123@donga.com

    입력2012-03-26 11:0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명품 이 남자 秋승균

    주요 기록<br>● 정규시즌 통산 득점 2위(1만19점)<br> ● 정규시즌 최다 출전 2위(738경기)<br>● 자유투 성공률 1위 통산 6회<br> ● 플레이오프 통산 득점 1위(1435점)<br>● 플레이오프 통산 출전 1위(109경기)<br> ● 정규시즌 우승 3회<br>● 플레이오프 최다 우승 5회<br> ●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 1회 수상<br>● 이달의 선수상 3회 수상<br> ● 올스타전 13회 출전

    프로 스포츠에서 박수 받으며 떠나기란 쉽지 않다. 세월의 무게를 피부로 느끼는 나이가 한참 지났어도 이번 한 해만이라도 더 뛰고 싶은 미련이 생기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라면 노욕이라도 생길 법하다. 하지만 3월 15일 은퇴한 프로농구 KCC 추승균(39)은 별종처럼 보인다. 비록 마흔을 바라보지만 충분히 몇 년은 더 코트를 지킬 만한 몸 상태인데 홀연히 유니폼을 벗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으로 관두고 싶었어요. 그래야 팬의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을까요. 올 시즌 후회 없이 뛰기도 했고요.”

    은퇴식에서 추승균은 환하게 웃었다.

    “왜 울어요? 눈물을 보이는 사람은 다 못 이뤄본 사람이에요. 저는 다 이뤘잖아요. 그래서 편하게 떠날 수 있으니 웃어야죠.”

    철저한 자기관리의 대명사



    추승균은 1997년 한양대 졸업 후 KCC의 전신인 현대에 입단해 줄곧 한 팀에서 뛴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다. 프로농구에서 자유계약선수(FA) 신분은 대박의 지름길이다. 수십억 원에 이르는 거액의 몸값을 챙길 수 있는 이적의 유혹 속에서도 그는 꿋꿋이 한 우물을 팠다.

    그는 15시즌을 뛰는 동안 다섯 차례 챔피언결정전 정상에 올라 프로농구 최다 기록을 세우며 다섯 손가락에 모두 우승 반지를 낀 행복한 사나이다. 정규시즌 우승도 3번 했다. 2008~2009시즌 주장으로 팀을 이끌며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에 뽑혔다. 올스타에는 13번이나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2월엔 서장훈에 이어 역대 두 번째로 정규시즌 통산 1만 득점을 넘기는 대기록을 세웠다. 플레이오프 최다 출전(109경기)과 최다 득점(1435점) 기록도 그가 세웠다. 챔피언결정전 통산 출전 순위에도 그의 이름은 1위(47경기)에 올라 있다.

    추승균은 “코트에서 열심히 하고 팀에 항상 도움이 됐던 성실한 선수로 팬의 머릿속에 남고 싶다”면서 “프로란 항상 겸손하고 인내심을 가지며 자기 자리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존재”라고 말했다.

    추승균의 별명은 ‘소리 없이 강한 남자’다. 화려한 플레이와는 거리가 멀지만 없어서는 안 될 소금 같은 존재라는 의미다. 그는 철저한 자기관리의 대명사로도 꼽힌다.

    “발목을 다쳐 한 번 쉰 것을 빼곤 부상으로 쉬어본 적이 없어요. 운이 좋았죠.”

    부산 출신으로 성동초 4학년 때 농구를 시작한 그는 6학년 때 아버지가 잠자다 돌연사해 크나큰 아픔을 겪었다. 중학생 때는 선배의 괴롭힘에 사춘기까지 겹쳐 운동을 그만두고 한 달 가까이 쉬기도 했다. 하지만 간이 좋지 않아 늘 피곤해하면서도 자식 뒷바라지를 하느라 힘든 식당 일도 마다하지 않던 어머니 최춘자(65) 씨의 설득으로 다시 공을 잡았다. 그는 몸이 편찮은 어머니에게 “절대로 학교나 경기장에 오지 마라”며 마음을 편하게 해드렸다. 그러면서 낮밤으로 훈련에만 매달렸다. 통산 90%에 가까운 높은 자유투 성공률은 오랜 반복 훈련의 결과다. 어머니는 틈만 나면 절을 찾아 아들의 성공을 빌었다.

    추승균은 부산 중앙고 시절 동기인 박훈근, 박규현 등과 함께 뛰었다. 그 당시 이들 동기는 고려대에 진학한 반면, 추승균은 한양대에 입학했다.

    “어머니가 속이 상해 밥도 안 차려줄 정도였어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요즘에 생각하면 올바른 선택이었던 것 같아요.”

    고려대에는 전희철, 김병철, 양희승, 현주엽 등 스타가 즐비했다. 반면 팀에 뛰어난 선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던 한양대를 선택한 추승균은 대학 1학년 때부터 주전 자리를 꿰차고 출전 기회를 많이 잡아 실력을 키울 수 있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던 1997년 국내에서도 프로농구가 출범했다. 진로(현 SK)와 LG가 팀을 창단하면서 각각 연세대와 고려대 졸업생에 대한 우선지명권을 행사했다. 양쪽에 모두 속하지 않았던 추승균이 전통의 농구 명문 현대를 선택하게 된 것도 행운이었다. 현대는 이상민, 조성원, 김재훈이 군에서 돌아오고 추승균이 입단하는 시점에 맞춰 도약을 준비 중이었다. 1997~1998시즌 프로농구에서 현대는 이상민-조성원-추승균의 이른바 ‘이조추 트리오’에 조니 맥도웰이 위력을 떨치며 프로 첫 정상에 올랐다. 현대의 르네상스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세월이 흘러 조성원과 이상민이 차례로 팀을 떠나면서 그는 진정한 팀의 리더로서 후배들과 호흡을 맞췄다. 추승균은 잊을 수 없는 순간에 대해 “상민, 성원 형과 힘을 합쳐 첫 우승을 이뤄낸 1998년 정규시즌과 플레이오프 71경기에 모두 출전해 정상에 섰던 2009년”이라고 말했다.

    이름값 하듯 재계약 협상 때마다 구단의 애를 먹이는 일부 특급 선수와 달리 추승균은 연봉을 둘러싼 갈등 한 번 일으킨 적 없는 순둥이였다. 고참이 돼서는 후배를 챙겨야 한다며 자신의 연봉을 구단에 백지위임하거나 연봉 삭감도 감수했다. 지난해 계약기간을 1년으로 했던 이유도 구단 측에 선수단 운영의 숨통을 터주려는 처사였다. 그래도 고액 연봉자로 장수한 덕에 그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에 4층짜리 빌딩을 장만해 부산에 계시던 어머니를 모셔왔다.

    “농구 인생 100점 만점에 93점”

    그는 선수로서의 장수 비결에 대해 “꾸준히 운동하고 몸에 좋은 것을 잘 챙겨 먹을 뿐 아니라, 마인드 컨트롤도 잘했다. 낙천적인 성격이 아닌데 코트에선 늘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감을 가지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프로에서 16년째 뛰면서 그가 손발을 맞춘 감독은 신선우, 허재 두 명뿐이다. 특별한 변화 없이 안정된 환경을 누린 것도 주위의 부러움을 살 만하다. 현대 시절 그를 뽑은 신선우 전 감독은 “승균이는 윤활유 같은 존재다. 희생하고 배려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했다”고 칭찬했다.

    15년 넘게 늘 90kg 안팎의 체중을 유지한 그는 철저한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부상을 예방했다. 소주 8병을 마셔도 끄떡없는 주당이지만 시즌 때는 철저히 금주를 실천했다. 담배는 아예 피운 적이 없다. 2004년 7월 결혼한 그의 아내 이윤정(33) 씨는 “쉬는 날에는 좀 풀어질 만도 한데 개인훈련 한다고 혼자 체육관을 자주 찾는다. 집에선 기저귀도 갈고 설거지도 해주는 자상한 두 아이의 아빠”라고 자랑했다.

    그는 현역 시절 다른 팀 감독이 꼭 데리고 있었으면 하는 선수로도 자주 거명됐다. 출중한 기량뿐 아니라 성실하고 모범적인 태도를 보이며 후배들의 멘토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지도자를 꿈꾸며 연수를 계획 중인 그가 후배를 가르치는 분야에서도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유다. 그는 “요즘 팀에서 같이 뛰는 동생들을 보면 체격은 훨씬 좋아졌는데 근성은 예전보다 약하다. 프로답게 훈련하고 뛸 땐 확실히 독해져야 한다”는 충고를 자주 한다.

    추승균은 은퇴 기자회견에서 “내 농구 인생은 100점 만점에 93점”이라고 말했다. 숱하게 상을 받았지만 정규시즌 최우수선수와는 인연이 없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늘 자신을 부족하게 여기며 뭔가를 더 채우려 노력하는 추승균의 진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그가 걸어갈 새로운 농구 인생도 기대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