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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 고수’ 이건의 도발

본능 따라 춤추는 뭉칫돈 판이 커질수록 실적 어려워

유능한 펀드매니저 부재?

  • 이건 ‘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저자 keonlee@empas.com

본능 따라 춤추는 뭉칫돈 판이 커질수록 실적 어려워

본능 따라 춤추는 뭉칫돈 판이 커질수록 실적 어려워
야성적 본능에 휘둘리는 개인과 달리 전문가는 우수한 실적을 낼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보면 전문가도 대부분 시장수익률조차 따라가지 못했다. 전문가도 별수 없다는 말이다. 필자가 그 증거를 숫자로 제시하면 “그런가 보다” 할 뿐 이런 말이 마음에는 와 닿지는 않을 것이다. 마치 백마 탄 왕자를 애타게 기다리던 소녀가 “백마 탄 왕자는 이미 오래전에 모두 사라졌다”는 말을 들은 기분일 것이다. 도대체 왜 우수한 펀드매니저도 시장수익률조차 따라가기 어려운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단기 업적주의에 매몰된 전문가

장기간 좋은 실적을 내려면 펀드매니저가 장기적인 안목으로 소신 있게 투자해야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실은 장기간 기다려주지 않는다. 실적이 좋아지면 자금이 펀드로 밀물처럼 몰려들고, 실적이 나빠지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니, 펀드매니저는 먼저 단기 실적부터 챙겨야 한다. 특히 고객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경쟁 펀드보다 실적이 뒤처져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다 보니 펀드매니저는 남보다 뛰어난 실적을 내려고 적극적으로 운용하기보다 남보다 뒤처지지 않도록 무난하게 운용하는 쪽을 선택한다. 잘해보려고 튀었다가 목이 달아난 펀드매니저가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2000년 기술주 거품이 붕괴했을 때, 거의 모든 펀드매니저가 치명상을 입는 와중에도 오히려 탁월한 실적을 올려 주목받은 인물이 ‘오마하의 현인’으로 추앙받는 워런 버핏이다. 버핏은 자신이 기술주를 몰라서 투자를 안 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실제 과정은 전혀 순탄치 않았다. 기술주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동안 굴뚝주는 바닥을 기었으므로, 사람들은 이제 버핏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수군거리면서 손가락질했다. 다행히 버핏은 의사결정권자였으므로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버핏처럼 생각하고 실천하려 한 펀드매니저 대부분은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중도에 신념을 접거나 장렬하게 산화했다. 고객 이탈을 방관할 수 없는 펀드회사들이 이들을 회유하거나 협박했고,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쫓아냈기 때문이다. 아무리 펀드매니저가 뛰어나도 고객이 받쳐주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이야기다.



미국은 주식시장에서 봉 노릇을 해주던 개인투자자가 속속 간접투자로 방향을 틀면서, 기관이 시장을 주무르는 시대로 넘어갔다. 현금인출기였던 초보자가 더는 당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무더기로 사라지자 무림 고수끼리 남아서 진검으로 승부를 가리게 된 것이다. 이들의 실적을 모두 더하면 어떻게 나올까. 전에는 개인투자자가 바닥에 깔려준 덕분에 시장수익률을 이기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기관투자자의 실적 합계가 곧 시장수익률이다. 봉은 떠나고 이른바 선수끼리만 남아서 고스톱을 치는데, 자릿세(거래비용)는 꼬박 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조금이라도 무리해서 ‘고(go)’를 부르면, 노련한 선수의 협공에 바가지를 쓰기 십상이다. 게다가 선수층이 두터워진 탓에, 부진한 선수가 물러나면 쟁쟁한 신예가 즉시 빈자리를 채운다. 연거푸 돈을 따는 선수는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선수는 패가 나쁘면 미련 없이 곧바로 죽어버리기에, “못 먹어도 고”라는 말은 옛말이 됐다. 자릿세조차 극복하기 어려운 판이 된 셈이다.

굳이 떠들지 않아도 탁월한 능력이 절로 드러나는 몇몇 고수가 있다. 오로지 투자만을 위해 태어난 천재로, 버핏과 피터 린치를 비롯한 극소수의 거장이 그런 사람이다. 이들은 계속해서 시장을 이길 터이므로, 이들에게 돈을 맡기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거장에게도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오는 돈이다. 매에 버티는 장사 없듯이, 밀려오는 돈에 버티는 펀드매니저도 없다. 펀드 규모가 커지면 아무리 거장이라 해도 실력 발휘가 어려워진다. 지금껏 자동차 경주를 석권해온 최고의 레이서가 이제는 트럭을 몰고 경주에 참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몰려다니는 고객과 판 깨는 고객

린치는 1977년 마젤란펀드를 맡아 1990년까지 약 2700%(연 29.2%)의 수익을 올렸다. 1977년에 1억 원을 맡겼다면 13년 뒤에는 28억 원이 됐다는 뜻이다. 처음 운용을 시작할 때 1800만 달러였던 펀드 규모가 1990년에는 140억 달러로 약 770배 늘어났다. 그런데 초기에는 무서운 속도로 상승하던 수익률이 이런 실적을 본 투자자가 더 무서운 속도로 돈을 쏟아붓자 둔화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한물간 펀드가 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이제 뛰어난 전문가도 본능에 따라 몰려다니는 개인 때문에 무너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인 고객은 펀드매니저가 긴 안목으로 소신투자를 할라치면 돈을 빼가고, 실적이 좋아지는 듯하면 돈을 퍼부어 수익률을 둔화시킨다. 그러다 보니 펀드매니저는 시장이 과열된 것 같아 조심하려는 시점에는 펀드에 뭉칫돈이 들어와 마지못해 주식을 더 사야 하고, 시장이 바닥이라서 주식을 더 담고 싶을 때는 돈을 빼가므로 헐값에 주식을 팔아야 한다. 물론 개인 고객이 일부러 어깃장을 놓는 것은 아니다. 단지 야성적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고객의 이런 행동은 자신에게도 손해지만 다른 투자자에게도 큰 피해를 준다.

예컨대 세심하게 분석한 끝에 좋은 펀드를 발굴해 돈을 맡긴다고 치자. 그런데 펀드 실적이 좋아지자 충동 투자자가 몰려들고, 그 탓에 펀드가 비대해지면서 실적이 둔화한다. 반면, 경기가 침체해 펀드 실적이 나빠지자 이제는 충동 투자자가 아우성치면서 무더기로 빠져나간다. 펀드매니저는 환매 자금을 마련해야 하므로 눈물을 머금고 주식을 헐값에 처분한다. ‘호가 차이’와 ‘시장충격비용’ 때문에 펀드에 막대한 손실이 발생한다. 그러자 눈치 보며 남아 있던 충동 투자자가 손실을 확인하고 비명을 지르면서 또 우르르 빠져나간다. 결국 ‘연못에서 몸부림치던 고래’ 펀드가 드디어 숨을 거두고 자투리펀드가 돼 창고 한구석으로 밀려난다.

그런데 펀드회사는 왜 ‘물 관리’를 하지 않았을까. 펀드 실적이 좋아질 때 몰려드는 충동 투자자를 돌려보냈다면, 유망 펀드가 장수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기대다. 돈 들고 찾아오는 손님을 돌려보낼 이발사가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좋은 펀드에 장기 투자하려던 고객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잠시 들렀다 갈 충동 투자자도 펀드회사에게는 중요한 수익원이다. 어떤 고객의 돈이든 무슨 상관인가, 돈에 꼬리표가 붙은 것도 아닌데.

린치가 운용한 마젤란펀드는 모든 펀드 투자자가 갈구하는 꿈이었다. 13년 동안 가치가 28배로 뛰었을 뿐 아니라, 손실을 본 해가 한 번도 없었다. 이런 펀드에 투자하고서도 손실을 본 고객이 있을까.

본능 따라 춤추는 뭉칫돈 판이 커질수록 실적 어려워
놀라지 마시라. 무려 절반이나 되는 고객이 손실을 봤다고 한다. 어떤 고객일지 이제는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펀드 규모가 약 770배 증가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 바란다. 장담컨대 투자수익 28배를 올린 고객은 극소수에 불과할 것이다. 적토마에 올라탄다고 아무나 관우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건은 은행에서 펀드매니저로 국내 주식과 외국 채권 및 파생상품을 거래했고, 증권회사에서 트레이딩 시스템 관련 업무도 했다. 지금은 주로 투자 관련 고전을 번역한다.



주간동아 805호 (p40~41)

이건 ‘대한민국 1%가 되는 투자의 기술’ 저자 keonlee@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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