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5

2011.07.11

달콤한 커피 향에 실려온 아늑함

샤오야 췐 감독의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

  • 정지욱 영화평론가, 한일문화연구소 학예연구관 nadesiko@unitel.co.kr

    입력2011-07-11 14:1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달콤한 커피 향에 실려온 아늑함
    2년 전까지 살았던 서울 삼청동 집 맞은편에 커피전문점이 처음 생겼을 때, 늦은 밤 커피콩 볶는 냄새와 조용히 들려오는 음악 소리에 취해 창을 열고 원고지를 메우곤 했다. 또 아내와 함께 고양이를 안고 나갔던 산책길에 차가운 에스프레소 한 잔을 놓고 마주 앉아 여름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얘기했다.

    그 후 몇 년 사이 우후죽순 생겨난 술집과 음식점에서 새벽까지 풍기는 음식 냄새, 그리고 관광객과 취객의 소음을 이기지 못한 우리는 북한산 자락으로 이사 오게 됐다. 하지만 아내는 언젠가 다시 북촌으로 돌아가자는 얘기를 자주 한다. 이는 10년 넘게 살았던 그곳에서의 소소한 추억을 잊지 못하는 까닭이리라.

    타이베이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커피는 우유가 들어간 라테다. 능숙하게 기계를 조작하며 커피를 내리는 두얼(구이 룬메이 분)은 라테에 꽃 그리는 것을 싫어한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유지방을 볼 수도 없고, 우유와 맞물리기 때문이다. 그는 능숙하게 빵을 만들지만 크기는 조금씩 다르다. 마치 빵을 먹는 사람이 제각각 다르듯.

    1년 전 자기만의 우아한 카페를 꿈꾸며 제빵을 배우던 두얼은 상하이로 이주한 이모의 건물에 자기만의 카페를 내기로 결심한다. 동생 창얼(린 천시 분)과 상의하지만 시크한 동생의 대답은 허공을 가를 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마침내 자신의 이름을 딴 ‘두얼카페’가 꾸며지자 춤이 저절로 나올 정도로 기뻐한다. 하지만 가게 오픈 준비로 꽃시장을 가다 교통사고가 났고, 수리비 대신 한 트럭의 칼라 꽃을 받아온다.

    그리고 찾아온 지인들에게 칼라 꽃 한 송이씩을 나눠주며 시작한 카페 개업식. 사람들은 저마다 선물을 가져오지만 도무지 사용할 곳을 알 수 없는 잡동사니뿐이다. 친구 휴고의 말처럼 이런 물건은 집에도 놔둘 데가 없는 쓸모없는 것뿐이다. 많은 친구가 찾아온 요란스러운 개업식이 끝나고 영업을 시작했지만, 카페에는 손님이 거의 없다. 손님을 무료하게 기다리며 몸무게를 재기도 하고, 아코디언을 연주하거나 목마를 끌면서 카페 안을 돌아다녀 보기도 한다. 반갑게 맞이한 손님도 커피는 마시지 않은 채 먼저 와 우두커니 기다리던 사람과 함께 이내 나가버린다. 애써 만들어놓은 케이크도 쓰레기통에 버려질 뿐. 카페는 두얼이 생각했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창밖에 내리는 빗물처럼 허무하기만 하다. 그는 이 모든 게 이상한 개업선물 탓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태국 요리책을 탐낸 카페 손님에게 창얼이 물물교환을 제안하면서 분위기는 반전된다. 물물교환 아이디어가 대박을 터뜨려 카페는 관광객이 찾아올 정도로 유명해진다. 그러던 어느 날 두얼의 브라우니 맛을 칭찬하는 남자손님이 비누 35개를 가져온다. 비누 1개에 이야기를 하나씩 들려주고, 두얼은 그 이야기 하나에 그림 한 장씩을 그리며 마음을 주고받는다.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에는 젊은이가 꿈꾸는 자유로운 공간이 있고, 향기로운 냄새를 머금은 카페가 있다. 그곳에서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모를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젊은이들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여행을 꿈꾼다. 그래서 이 영화는 20대 여성에게 딱 맞을 만큼 상큼하다. 타이베이의 싱그러운 햇살과 눈부신 초록이 함께 하고,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가벼운 음악에 실려 스크린 밖으로 불어온다. 남성이나 중년 관객에게는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들도 여름휴가를 앞두고 한 번쯤 자유를 만끽해보고 싶지 않을까.

    영화는 중간 중간 두 자매의 고민을 조금 엉뚱한 인터뷰 형식으로 물어본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 수리비를 현금으로 받을 것인가, 칼라 꽃으로 받을 것인가?’ ‘공부와 세계여행 중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같은 질문에 대해 영화에 등장하는 일반인의 대답을 들으며 관객 또한 스스로 자신만의 대답을 나직이 읊조리게 된다. 엄마는 두얼, 창얼 자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한다. 하지만 그 잔소리에 대답하는 것은 엉뚱하게도 마사지 숍이나 미용실에서 일하는 제3자뿐이다. 아니, 어쩌면 관객 중 어느 누군가는 자신이 관객임을 잊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는 어느 사이엔가 관객을 영화 속으로 데리고 들어와 버린다.

    영화 속 사람들은 사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보다 물물교환이라는 방식을 통해 소통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되고 현명한 거래 방법이자 소통 방식, 하지만 지금까지 잊힌 ‘물물교환’을 영화는 소통의 키워드로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물건을 바꾸기 위해 이 카페를 찾아오지만 물건뿐 아니라 서로의 이야기까지 교환하고, 음악을 바꾸며, 사랑을 나눈다. 세상의 절대적 기준인 ‘가격표’가 아니라 모두의 공감으로 자유로운 기준에 의해 이뤄지는 소통.

    ‘타이페이 카페 스토리’는 2008년 타이베이 시가 각 지역의 관광명소를 홍보하기 위해 마련한 프로젝트의 하나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대만의 거장 허우 샤오셴 감독이 제작을 맡았고, 그의 조감독 출신인 샤오야 췐 감독이 연출했다. 2000년 타이베이영화제에서 첫 번째 작품 ‘미러 이미지’로 작품상과 신인감독상을 거머쥔 샤오야 췐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달콤한 커피 향에 실려온 아늑함
    타이페이시를 홍보하기 위해 관광청이 투자해 만든 작품이지만 대만 젊은이의 일상을 큰 굴곡 없이 섬세하게 잘 표현했다. 특히 역사적, 사회적 특징을 감춰놓듯 담아놓은 품새가 일품이다. 카페 물건에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의 향기를 맡는 청년의 에피소드는 어쩌면 한국 관객에겐 부담스러울 수 있는 역사를 담고 있다. 역시 허우 샤오셴의 후예답게 아픈 역사의 한 지점을 재치 있게 담아낸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 포스터나 스틸사진을 통해 느낀 감정은 ‘대체로 가벼움’.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의외로 ‘아늑함’을 얻는다. 카페라는 공간에서 얻어지는, 여러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얻어지는, 그리고 마치 4D 영화를 보듯 스크린에서 풍겨 나오는 향긋한 커피 향과 타이베이 특유의 냄새를 맡으며 아늑한 대만으로의 여행을 꿈꾸게 한다.

    지루하게 내리던 장맛비가 멈추고 작렬하는 태양빛을 피해 어디로든 떠나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쓰디쓰지만 향기로움을 머금은 차가운 한 잔의 에스프레소를 들고 나만의, 아니 우리만의 소통 공간으로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어느새 우리 곁에 머물던 수많은 대만 영화를 찾아 떠나는 여름여행도 꽤 의미 있을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