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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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굴한 속물 소리 듣고 맨땅에서 예술 열정 키웠다”

차이콥스키 콩쿠르 휩쓴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 초대 총장 “앞으로 훌륭한 예술가 계속 나올 것”

  • 박은경 객원기자 siren52@hanmail.net

    입력2011-07-11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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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굴한 속물 소리 듣고 맨땅에서 예술 열정 키웠다”
    6월 30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막을 내린 제14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19명이 입상했다. 그중 한국 음악가 5명이 부문별로 1위에서 3위를 휩쓸었다. 영광의 주인공은 성악 남녀 부문에서 1위를 한 서신영(27) 씨와 박종민(25) 씨, 피아노 부문 2, 3위를 차지한 손열음(25) 씨와 조성진(17) 군, 바이올린 부문 3위에 입상한 이지혜(25) 씨다. 조군을 제외한 4명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출신이다.

    1992년 개교한 한예종은 19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를 가졌지만 클래식 음악과 무용 분야에서 수많은 국제대회 입상자를 배출했을 뿐 아니라, 영화감독과 배우도 키워내는 등 클래식과 대중문화를 아우르며 국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예술가들을 배출했다. 한예종의 초석을 닦고 기틀을 마련한 사람이 초대 총장이자 석좌교수인 이강숙(75) 선생이다. 한예종이 거둔 오늘날의 성과를 듣고자 이 전 총장을 만났다.

    ▼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수상한 음악가 4명이 한예종 출신이고, 최근 러시아 마린스키발레단에 동양인 최초로 입단한 발레리노 김기민(19) 군은 한예종에 재학 중이다. 해외에서 속속 들려오는 제자들의 성취에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우리 학교 출신 중 국제 콩쿠르에 입상한 사람이 음악뿐 아니라 무용 분야에서도 한둘이 아니다. 아주 기쁘다. 음악원, 영상원, 무용원, 연극원, 미술원 등 우리 학교 여러 예술 분야의 ‘원’에서 배출한 예술가가 굉장히 많다. 오늘의 결과는 본부(문화체육관광부)와 학교 교수, 학부모와 학생 등 각계각층 사람이 정말 열심히 합심해서 만들고 키운 결실이다.”

    ▼ 국가 차원에서 예술영재를 뽑아 세계 최정상급 수준의 예술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한예종의 설립 취지다. 부합하는 성과가 나오는 것 같다.



    “한 국가와 사회 성과물은 진공에서 탄생하는 게 없다. 항상 그 나라 정치·사회·경제·문화적 맥락 속에서 탄생한다는 게 내 믿음이다. 그런데 어떤 것이 탄생하는 순간 그것이 미래에 엄청난 구실을 하는 역사적 사건인지 모를 때가 많다. 역사적 사건이라고 떠들썩했던 게 나중에 보면 별일이 아닌 것으로 판명 나는 경우도 있다. 우리 학교 탄생은 역사적 사건이다.”

    ▼ 역사적 사건이라고 여기는 이유가 뭔가.

    “우리나라는 교육과학기술부가 관련법에 의거해 국가에서 행해지는 모든 교육을 관장한다. 거기엔 교육의 원리 하나만 있다. 이런 일원론을 내세우는 사람은 음악교육도 사범대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음악교육엔 음악의 원리가 있고 교육의 원리가 있다. 나 같은 이원론자는 음악교육을 음악대학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 결과 우리 학교가 국내 최초로 당시 교육부 소관이 아닌 문화부 소관으로 설립됐다. 이는 우리나라 교육에서 일원론이 아닌 이원론을 처음 인정한 것이다.”

    ▼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사표를 내고 예술학교 설립추진단에 합류했다. 명문대 교수직을 버릴 만큼 기대가 컸나.

    “예나 지금이나 서울대 교수를 그만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설치령이 제정된 뒤 이어령 문화부 장관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이수정 장관이 왔다. 이 장관이 학교 설립 책임을 나에게 맡기려고 여러 차례 설득하다 안 되니까 비굴한 속물이라고 했다. 새로운 교육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기저기 글을 쓰고 서울대 교수라고 온갖 폼은 다 잡으면서 실제 행동으로 옮겨보라니까 발을 뺀다는 거였다.”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를 졸업하고 미국 휴스턴대와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음악문헌학 석사, 음악교육학 박사를 받은 이 전 총장은 피아니스트이자 음악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서울대 음대 교수 시절부터 ‘포괄적 음악교육의 개념’ ‘음악학 방법론 연구’ 등 음악이론과 교육에 관한 논문 및 저서를 여러 권 발표하는 등 음악학, 음악교육, 음악평론에서 일가를 이뤄 한국음악사의 한 장을 개척했다.

    이수정 전 장관의 말이 목에 가시처럼 걸려 고민하던 이 전 총장은 결국 서울대에 사표를 내고 설립추진단에 몸을 담았다. 막상 자리를 옮기고 보니 교사(校舍)는 고사하고 학교 건물을 지을 터도, 예산도 한 푼 없는 그야말로 백지상태였다. 당시 설립추진단 사무실이 꾸려진 곳은 국립국악고등학교 교사 한편이었다.

    ▼ 학교가 실체도, 예산도 없는 백지상태였으니 막막했겠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이니까 예산이나 건물이 다 준비된 줄 알았다. 막상 오고 보니 아무것도 없어 마치 결혼했는데 신부가 가짜였다는 걸 안 그런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사표를 낸 서울대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기가 막혔다. 당시 건설법은 서울시내에 새로운 학교 건물이 들어설 수 없게 돼 있었다. 기필코 교사를 짓겠다고 밀어붙여 법 개정에 성공했다. 힘든 일이었다. 1992년 11월 초대 총장에 임명되고 4개월 뒤 음악원을 개원해야 했다. 그때까지 교사가 없어 국립국악고등학교 일부를 빌려 시작했다. 원래 계획으로는 문화부 산하 예술의전당 서예관에 들어가려 했는데, 거기 직원들이 들고일어나 당시 문화부 장관 화형식을 할 정도로 반대가 극심했다. 그 시절 내 목표는 살인적 인내였다.”

    ▼ 국가의 대대적 지원과 국민의 관심 속에 한예종이 출범했다. 초대 총장부터 2, 3대 총장까지 내리 10년간 총장직에 머물면서 성과가 나오기까지 부담이 컸겠다.

    “총장 취임 때 한 얘기가 있다. 우리 학생을 잘 키워 유학 안 보내고도 국제대회에서 입상하도록 하겠다는 게 그것이다. 취임 1년 만에 국회 상임위원회 국정감사에 불려갔는데 의원 한 분이 취임식 때 공언한 말의 증거를 내놓으라고 했다. ‘어떻게 결혼했다고 바로 애를 낳을 수 있느냐? 우리 학교도 마찬가지다. 졸업생이 나온 뒤에 평가해야지 지금 당장 애를 내놓으라면 어떻게 하느냐’는 대답으로 넘겼다.”

    “비굴한 속물 소리 듣고 맨땅에서 예술 열정 키웠다”

    이강숙 전 총장 부부.

    ▼ 짧은 역사에도 세계적인 예술가, 국제대회에서 인정받는 인재를 키워낸 힘은 무엇인가.

    “음악원 개원 당시 ‘세계적인 음악가를 교수로 영입했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인정을 안 해줬다. 바로 김남윤(바이올리니스트), 최현수(바리톤), 김대진(피아니스트) 교수다. 이 분들이 가르친 제자가 이번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했다. 강충모(피아니스트) 교수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초빙해 곧 떠날 예정이다. 이 밖에도 대단한 분들이 교수로 포진해 있다. 처음 예술학교를 만들 때 줄리어드 음악학교 같은 곳을 만들자고 했는데 목표대로 됐다고 자부한다. 각 분야에서 훌륭한 교수가 열정으로 가르치니까 국제대회 입상자가 연달아 나오고 국제적인 감독과 배우가 나오는 것이다. 지금 이 시각에도 제자를 가르치느라 한창 열정을 쏟고 있다.”

    이 전 총장에 이어 서울대 음대 이건용 교수(작곡가)와 김남윤 교수가 사표를 내고 한예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내가 사표 낸 것도 모자라 교수 두 분을 한꺼번에 빼왔으니 서울대 음대가 난리 났다. 서울대 교수직을 버리고 아무것도 없는 학교 음악원 설립에 참여해준 두 분 교수가 지금도 매우 고맙다”고 말했다.

    ▼ 서울대 음대 피아노과 출신으로 피아니스트의 길을 걷다 음악교육가로 변신했다.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소설가로 제2 인생을 살고 있다. 연주자로서의 미련은 없나.

    “원래 작곡과에 입학했는데, 작곡을 좀 더 잘하고 싶어 2학년 때 피아노과로 전과했다. 연주자에 대한 미련은 없지만 좋은 곡을 만들지 못해 작곡가로서의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교육자로 풀리다 보니 작곡과는 점점 멀어졌다. 문학은 어릴 때부터 꿈이어서 음대에 다니던 시절 시인, 소설가가 많이 드나들던 명동의 다방에 자주 출입했다. 그 뒤 50여 년이 흘러 처음으로 발표한 장편소설이 ‘피아니스트의 탄생’인데, 소설 속 모델이 당시 우리 학교 학생이던 손열음 양이다.”

    ▼ 4년제 국립 예술 특수학교의 밑그림을 그리고 기초를 닦았다. 오늘날의 성과를 볼 때 어떤 기분이 드는가.

    “세상에 태어난 보람을 느낀다. 서울대 교수직을 지키기 위해 안 떠났으면 얼마나 속물이 되고 바보스러웠을까 싶다. 어렵게 떠나와 이만큼 성과를 이뤘으니 정말 좋다. 앞으로도 학교가 계속 발전하기를 바라고 국민이 더 많이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주간동아 필화사건은

    “국회의원 비판했다 국감서 힐난 들어”


    한예종 이강숙 전 총장은 취임 이듬해 ‘주간동아’에 기고한 칼럼 탓에 국회에서 혼쭐이 났다. 문제가 된 칼럼을 요약하면 “서울대 교수 시절에는 나 하나만 훌륭한 교수이자 평론가, 교육자로 만들면 되니까 대학총장도 눈에 안 들어오고 나 자신을 만들기에만 급급했으며 그게 인생인 줄 알았다. 국정감사에 참석해보니 국회의원은 나라 만들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그들은 나보다 훨씬 높은 국가 만들기 차원의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나 만들기나 학교 만들기 차원에서 세상을 보는 눈과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 나라 만들기보다 지역구 만들기가 선행되면 그건 좋지 않다. 나라 만드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국정감사에 출석하려고 국회에 들어갔더니 주간동아 칼럼을 복사해 국회의원들이 돌려보고 있었다. 거기 내 사진이 있어 놀라 벌벌 떨고 있는데 국회의원 한 분이 ‘우리 보고 뭘 반성하란 말이요’ 하더라.”

    그는 음악평론가 활동 때도 논쟁적인 글을 많이 발표했다. 소신을 굽히지 않고 트러블도 피하지 않는 성격이다. 국회의원의 추궁에 ‘욱’ 했을 법도 하다.

    “아니다 싶으면 목숨 걸고 싸운다. 국정감사장에서 순간 확 올라왔지만 학교를 위해 둘러댔다. 국정감사가 끝나자 한 분이 그랬다. 왜 하필 국정감사 기간에 그런 글을 언론에 썼냐고. 사실 그때 칼럼을 안 쓰려 했다. 음악평론가가 아닌 총장으로 있을 때니까. 근데 주간동아 담당 기자가 ‘선생님도 사회와 타협하고 위장하려 합니까. 바른말을 계속하면 왜 안 됩니까. 실망입니다’ 하기에 뜨끔했다. 전에 이수정 문화부 장관에게 ‘비굴한 속물’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처럼. 그래서 쓰게 됐는데 소동이 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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