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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종편 채널 4개 … 드라마 다양성 더 키울 것”

‘욕망의 불꽃’ 정하연 작가

  • 이설 기자 snow@donga.com

“종편 채널 4개 … 드라마 다양성 더 키울 것”

“종편 채널 4개 … 드라마 다양성 더 키울 것”
‘극본 정하연’.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 엔딩 자막이 흐를 때마다 중년 여성작가를 떠올렸다. ‘하연’이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주인공 윤나영(신은경 분)은 분명 여성의 손을 탄 캐릭터로 보였다. 하지만 그는 올해 예순일곱의 남성 작가다. 198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단막극으로 등단해 43년간 펜을 놓지 않았다. 2월 22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자택에서 정 작가를 만나 ‘종합편성채널(이하 종편)시대’를 앞둔 단상과 드라마 환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저도 시청률 압박을 받는데, 젊은 작가들은 오죽하겠어요. ‘막장 드라마’를 무조건 손가락질하고 싶진 않아요.”

‘막장’은 본디 광산의 끝부분을 가리킨다. 이 단어가 수식어로 쓰이면 ‘갈 데까지 간’이라는 뜻을 갖는다. 언제부턴가 보통명사화한 ‘막장 드라마’. 정 작가는 ‘막장 드라마’가 판치는 드라마 환경만큼, ‘막장’으로 내몰린 후배 작가들을 안타까워했다. 말을 잇는 백전노장의 목소리에 격정이 실렸다.

“저는 뒤늦게 시청률로 고생했어요. ‘신돈’ ‘달콤한 인생’을 하면서 시청률이 한 자릿수로 내려가니 진짜 죽고 싶더군요. ‘시청률 저조 작가’라는 꼬리표가 붙으면 일이 안 들어와요. 자연히 작가들은 작품성이나 개성보다 시청자들의 입맛을 고려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가 ‘막장’으로 흐르죠.”

정 작가가 먼저 시청률 이야기를 꺼냈다. 시청률은 작가에게 민감한 부분이다. 작품성과 시청률은 반비례한다는 것이 통설. 하지만 둘 모두를 잡아야 하는 작가들은 중간 지점을 머리 터지게 고민한다. 작품은 작가의 자존심이고 시청률이 부진하면 집필 기회가 줄어드는 탓이다. 정 작가도 현실과 이상의 조화처럼 어려운 이 난제를 43년간 껴안아왔다.



“시청률이 잘 나오면 기쁘긴 하지만 한편으론 비참한 기분이 들어요. 시청률을 의식해 작품을 써야 하는 환경이 씁쓸한 거죠. 드라마도 문학이고 드라마 작가도 작가인데 ‘재미있다’는 평가보다 ‘감동적이다’는 평가에 욕심나는 것이 인지상정이잖아요. 작품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드라마에 대한 일반 인식과 방송 환경이 변해야 합니다.”

그는 조심스레 조만간 이런 바람이 실현될 것으로 예상했다. 지난해 종편 사업자 4개가 선정되면서 방송계는 ‘종편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제작사나 드라마 작가 등 콘텐츠 생산자가 최고의 수혜자로 지목된다. 정 작가는 이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는 한편 “종편은 호재인 동시에 악재”라며 신중한 모습이었다.

“다양성 측면에서는 호재입니다. 그간 우리 드라마는 천편일률적이었어요. 작품만 보고선 작가를 짐작조차 하기 힘들 정도였죠. 지상파 3사에 종편 채널 4개가 추가되면 자연히 드라마의 외연이 넓어지리라 기대합니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드라마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질 위험이 있어요. 정직하고 엄숙한 얼굴로는 동시간대 7개 채널 중에서 시청자 눈길을 붙잡기 힘들 테니까요. 미국과 일본도 채널이 다양화한 초기에는 그런 과정을 거쳤죠. 호재를 살리고 악재를 막으려면 적절한 조치가 선행돼야 합니다.”

막장? 재벌가의 가치판단은 일반인과 달라

“종편 채널 4개 … 드라마 다양성 더 키울 것”
정 작가는 드라마계 큰 어른이다. 김수현 작가보다 한 살 아래로, 현역 남성작가 중 최고령이다. 극작가의 꿈은 고등학교 때 매료된 연극에서 출발했다. 연극 연출과 연기를 꿈꾸다가 연세대 국어국문과 재학 시절 덜컥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그의 표현에 따르면) ‘돈 따라 가다 보니’ 드라마 작가로 우뚝 서게 됐다(그 여정에 대해서는 ‘노코멘트’라며 웃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드라마 작가에 대한 세간 인식이 못내 서운하다.

“드라마도 문학인데, 드라마 작가를 ‘돈 많이 버는 사람, 유치한 이야기 엮어내는 사람, 막장 이야기 쓰는 사람’으로만 인식하는 현실이 비참하죠. 결국 작가는 누군가를 감동시킨 데서 보람을 얻는데, ‘욕망의 불꽃은 그냥 재미있다’라고 하면 속이 쓰린 거예요. 하지만 소설 100만 부가 팔리면 세상이 뒤집히는데, 드라마는 아무리 시시한 작품이라도 수백만 명이 보잖아요. 언어와 영상을 통해 표현하는 새로운 형태의 예술로 인식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먼저 상업적 드라마와 예술성 지닌 드라마가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전제돼야겠죠.”

‘산유화’(1983), ‘춤추는 가얏고’(1991), ‘모래 위의 욕망’(1993), ‘장녹수’(1995), ‘왕과 비’(1998), ‘명성황후’(2001), ‘아내’(2003), ‘신돈’(2005), ‘달콤한 인생’(2008), ‘욕망의 불꽃’(2010)…. 지금껏 그가 남긴 대표 작품이다. 선 굵은 역사극이 주를 이루지만, 경계 없이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다. EBS 문화사 시리즈인 ‘명동백작’(2004), ‘지금도 마로니에는’(2005)은 물론 각종 희곡과 시나리오를 집필했다.

‘욕망의 불꽃’은 ‘달콤한 인생’을 끝으로 다소 주춤하던 그가 절치부심 써내려간 작품이다. 재벌가를 배경으로 권력의 속성과 인물 군상의 심리를 밀도 높게 그려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초반 이 드라마는 자극적인 소재로 ‘막장’ 도마에 올랐다. 가족 간 처절한 수 싸움을 벌이는 주인공들을 보면, “너무하다”는 시청자 평도 이해할 만하다.

세부 묘사가 주는 괴리감은 더하다. 대서양 그룹 김태진 회장은 자녀들과 유전자 검사를 해보고, 주인공 윤나영은 백인기(서우 분)가 친딸임을 알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말도 안 된다” 싶지만 정 작가는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

“아는 의사가 농담 삼아 도시 부부 30%는 남의 자녀를 키운다고 하더군요. 보통 사람은 혈액형이 맞으면 그러려니 하겠죠. 하지만 가진 자들은 달라요. 천문학적 재산이 걸렸으니 유전자 검사를 당연시하는 겁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범부들의 그것과는 달라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사건(김 회장이 아들의 폭행 피해에 보복 폭행한 일)이나 매값 사건(최철원 전 M·M 대표가 운전기사를 폭행하고 매값으로 2000만 원을 건넨 일)이 어디 상식으로 이해됩니까.”

그는 재벌가를 조선시대 왕실에 빗댔다. 사극에서는 인륜을 저버린 혈투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우리는 아버지가 아들을 버리고 형제의 밥그릇에 독을 넣는 일화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정 작가는 “그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욕망이나 권력에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랑과 우정도 하나의 게임으로 판단한다. 우리와 가치판단이 다른 것이다”라고 말했다.

정 작가에 따르면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예정이다. ‘그러면 윤나영이 소원 성취를 하는 건가’. 속으로 중얼거리던 중 그가 던진 한마디에 머릿속이 뒤엉킨다.

“욕망은 사람을 움직이는 에너지인 동시에 본연의 순수성을 잃게 만들죠. 그것을 내려놓는 게 윤나영에게 행복이 아닐까요?”

정 작가는 습작 시절 누리던 탈고의 기쁨을 그리워했다. 작품이 일이 된 지금은 그 기쁨을 잃어버렸다 했다. 정 작가의 집을 나서며 진심을 실어 기원했다. 그가 구상 중이라는 이방자 여사와 대한제국 마지막 황태자 이은의 사랑 얘기로 잃어버린 탈고의 보람을 되찾기를.



주간동아 2011.02.28 776호 (p76~77)

이설 기자 s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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