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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정원 조선 왕릉28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저녁놀이 질 무렵의 영릉.

명릉(明陵)은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肅宗, 1661~1720)과 제1계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 민씨, 제2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 김씨를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은 동원쌍분(雙墳)으로 조영하고 인원왕후의 능은 오른편 언덕에 단릉으로 모셔 쌍릉과 단릉, 동원이강의 특이한 형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명릉은 사적 제198호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지구에 있다. 이곳은 두 번째로 조선 왕릉이 많은 곳이다. 원래 세조가 의경세자를 위해 자리를 잡은 곳인데 용두동(용의 머리)이란 마을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풍수가들이 극찬을 한 터다. 이 용 형국의 터에 백두산에서 내려온 정기가 한북정맥을 타고 주엽산(세조의 주산)-도봉산-북한산 상정봉-북한산 비봉-백현산-응봉을 거쳐 사신(四神) 산이 확실하게 나타나는 명당이다.

숙종은 현종 2년(1661) 8월 15일 경덕궁 회상전에서 태어났다. 현종(顯宗)과 명성왕후의 원자이며 외아들로, 휘는 순( )이고 자는 명보(明普)다. 할머니인 효종 비 인선왕후가 태몽으로 용꿈을 꿔 어릴 때 이름은 용상(龍祥)이었다.

숙종은 7세에 세자로 책봉돼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인 송시열, 송준길 등에게 왕세자 교육을 받았다. 1674년 현종이 승하하자 13세에 즉위해 재위 기간만 46년 10개월로, 아들 영조 다음으로 길다.

숙종시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 간 정쟁이 가장 심했다. 그러나 숙종은 용사출척권(用捨黜陟權·왕이 정계를 대개편하는 권한)을 통한 환국정치로 세 번에 걸쳐 정권을 교체하면서 현종 대의 예송논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했다. 즉 숙종은 희빈 장씨를 총애하는 과정에서 인현왕후 민씨의 폐출과 부활, 다시 장씨의 자결 명령 등으로 왕실에 혼란을 불러왔으나 대신 서인과 남인의 권력다툼을 이용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데 성공했다.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명릉의 참도에는 신로와 어로 옆에 제례 보조자의 변로가 보존돼 있다. 이처럼 드넓은 잔디는 조선 왕릉의 가장 큰 특징이다.

대동법의 전국 확대 실시와 상평통보의 주조로 조선 후기 경제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고, 5군영으로 군제 개편을 하면서 1712년 청나라와 국경 협상을 벌여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확정짓는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또 왜인의 울릉도 및 독도 지역 진입을 금지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시키기도 했다. 이후 숙종은 점차 격렬해지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을 조정하고자 처음으로 탕평책을 제안했다.

숙종은 급하고 다소 과격한 성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우유부단했던 아버지 현종과는 많이 달라서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의 성격을 닮은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되찾기 위한 어머니의 보이지 않는 교육도 있었을 것이다. 숙종은 친히 ‘주수도설(舟水圖說)’이란 글을 지어 “군주는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현명한 연후에 군주가 편안하다”라며 군신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 덕분인지 숙종은 비교적 당쟁에 휘말리지 않고 오랜 기간 통치했다. 그는 곤의(袞衣·어의, 예복) 말고는 비단 옷을 입지 않고 침전의 자리가 낡아도 갈지 않을 만큼 검소한 생활을 했다.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1 명릉은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왼쪽)과 인현왕후의 단릉(오른쪽) 형식을 갖춘 동원이강형으로 배치돼 있다. 2 숙종의 지시로 검소하게 조영된 명릉.

세 번의 정계 개편 통해 왕권 강화

1720년 숙종은 가래와 천식이 심하고 복부가 부어올라 혼수상태를 거듭하다 6월 8일 향년 59세에 경덕궁의 회상전에서 승하했다. 병명은 위암으로 추정된다. 내시 두 사람이 회상전 지붕으로 올라가 강사곤룡포(絳紗袞龍袍)를 들고 세 번 주상의 존호를 불렀다. 숙종의 승하를 알리는 예다. 그의 능침은 수년 전 인현왕후의 국장 때 우측에 자신이 우허제(생전에 자신의 능침을 부인의 왼편에 마련하는 수릉제도)에 따라 정해놓은 명릉에 쌍분릉으로 조영됐다. 이때 제궁에는 좁쌀 또는 차좁쌀을 태워서 깔고 평천관(平天冠·임금의 관)을 임금의 머리 위에, 적석(붉은 까치 모양 조각)을 발아래에 넣고, 생전에 모아놓은 빠진 치아와 머리카락, 손발톱, 옥규(玉圭·구슬)를 넣은 뒤 할아버지 효종대왕의 곤룡포를 위에 덮고 아버지 현종이 입던 곤룡포를 아래에 넣었다. 왕위의 적통 계승자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인현왕후 민씨는 여양(여흥)부원군 민유중과 은율 송씨의 딸로,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仁敬王后)가 승하하자 1681년 숙종 7년에 왕비로 책봉됐다. 평소 예의 바르고 언행이 청초했으나 소생이 없었다. 서인 집안 출신인 인현왕후와 남인 세력을 등에 업은 희빈 장씨의 충돌은 예상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고 원자(경종)를 낳자 당쟁은 내전 갈등으로 이어져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서인들이 권력에서 밀려나며 남인들이 재집권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것이 숙종 15년(1689)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하자 폐비 민씨의 복위를 반대하던 남인 세력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다시 득세했다(갑술환국). 7년 뒤인 1701년 8월 14일 인현왕후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승하하자 왕실은 다시 무고(誣告) 사건에 휘말렸다.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음해하기 위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하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장씨는 사약을 받았다.

숙종은 먼저 승하한 정비 인경왕후의 묘를 이곳에서 수백m 떨어진 곳에 조성하고, 계비 인현왕후 때에는 증조부 인조의 장릉(長陵)의 예에 따라 현재 자리에 능침을 조영하게 했다. 숙종은 친히 서오릉에 자신의 족분릉(族墳陵·비와 빈, 자식이 함께 묻힌 가족릉)을 구상했다.

아버지 현종의 능침을 조영할 때 할아버지 효종의 초장지 석물을 쓰게 하는 등 검소한 능역 조영을 주장한 숙종의 명릉은 조선 능제의 분수령을 이루고 있다. 명릉은 숙종의 명(命)에 따라 인력과 경비를 절감한 간소한 후릉(厚陵)제도를 따랐다. 부장품의 수량을 줄이고 석물 치수도 실물 크기에 가깝게 작게 했다. 평소 숙종은 “사치의 해독은 재앙보다 심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고 스스로 검약했다 한다.

숙종의 능과 인현왕후 능침 사이 양측에 문석인과 석마 한 쌍이 있다. 이제까지 다른 능의 문석인과 달리 키가 169cm로 당시 사람의 실물 크기와 흡사하다. 실제로 조선 왕릉 중 석물 크기가 가장 작으며 사실적으로 묘사한 능이다. 이는 당대 정치철학인 실사구시의 영향으로 사료된다. 머리에는 높이 30cm의 관을 썼는데, 키에 비해 과장돼 있다. 소매에는 깊고 강한 곡선을, 등 뒤에는 가는 실선을, 팔꿈치에는 짧은 두 개의 선을 주름으로 처리했다. 사각형의 관대에는 꽃잎 문양이 넣어져 있다.

무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추켜진 입, 어깨까지 내려온 귀, 남바위처럼 등으로 늘어진 투구, 이마에 그어진 투구의 파상선 등이 특징으로 18세기 석인 양식을 볼 수 있다.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1 정자각의 신성함을 지키는 명릉의 잡상. 능침의 수호신인 석호(2)와 소박하고 간결한 사각 장명등(3).

명종부터 팔각 장명등을 사각으로 제도화

숙종은 재위 시 신원이 복위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과 그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 송씨(宋氏)의 사릉(思陵)을 새롭게 조성하는 과정에서 능을 호사스럽지 않고 단출하게 만들도록 명한 바 있다. 이에 따라 함께 조성하는 석물도 등신대 크기나 그와 비슷하게, 이전보다 다소 작게 만들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의 왕릉은 이를 반영해 대체로 조촐하면서도 검박한 면모를 보여준다.

명릉의 정자각은 숙종 능과 인현왕후 능의 언덕 아래에 자리했다. 인원왕후는 숙종이 묻힌 명릉(明陵) 가까이에 묻히고자 그곳에서 고작 400여 걸음 떨어진 곳에 능지를 정했다. 그러나 영조가 현 위치에 인원왕후의 능지를 정하고, 명릉과 하나의 능역으로 삼고자 정자각을 세웠다. 명릉에는 정자각 앞 신로와 어로 양옆으로 신하들이 다니는 변로가 보존돼 있다. 변로는 다른 능에도 판석이나 디딤돌 형태로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이곳과 같은 곳은 없다. 변로는 각각의 돌이 달리 돼 있어 임금 옆에서 땅을 보고 걷는 신하들에게 어로의 위치를 알리는 구실을 했다. 일종의 도로 바닥에 위치를 알리는 표식을 한 것이다.

실물 크기 ‘석물’은 숙종 시대 알고 있다

명릉의 인현왕후 비. 영종의 친필을 볼 수 있다.

명릉부터 기존의 팔각 장명등을 사각으로 제도화했다. 능침에는 모두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으로 하고 12칸으로 합설했다. 명릉의 비각은 정자각의 동남측에 세워져 있다. 비각 안에는 숙종대왕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를 명릉에 모셨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왼쪽의 비면(碑面)에는 ‘조선국 숙종대왕 명릉 인현왕후 부좌(朝鮮國 肅宗大王 明陵 仁顯王后 神 左)’, 오른쪽 비면(碑面)에는 ‘조선국 인원왕후 부 우강(右岡)’이라 쓰여 있다.

이들 비(碑)는 세종 이전에 신도비였던 것을 세조의 명으로 없앴다가, 현종 때 능들의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송시열의 건의에 따라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로 천장하면서 간략한 비의 형태로 바꾸었다. 영릉(寧陵)의 예에 따라 다시 명릉에서부터 비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 후 영조 연간에 많은 능의 비와 비각이 설치됐는데 이곳의 인원왕후 비는 1757년에 세워졌으며 비의 글씨는 영조의 친필이다.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그리고 대빈 장씨의 묘가 있으며, 며느리인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능침이 있어 숙종의 가족릉과 같다.

숙종은 인경왕후와 인현왕후, 인원왕후 사이에 아들을 얻지 못했고 희빈 장씨와의 사이에 제20대 경종을 두었다. 경종의 능호는 의릉(懿陵)이며 성북구 석관동 1-5에 있다.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은 서오릉 내 가운데에 있다.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 난 영조의 능호는 원릉(元陵)이며 구리시 동구릉 내 휘릉과 경릉 사이에 있다. 인원왕후 김씨와 희빈 장씨의 능묘는 지면 관계상 다음 호 인경왕후 익릉에서 다룬다.



주간동아 2010.10.25 759호 (p80~82)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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