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55

2010.09.20

가슴에 물결치는 투명한 멜로디

유키 구라모토 내한공연 ‘피아노 포엠’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0-09-20 11: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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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에 물결치는 투명한 멜로디
    때는 1999년 가을. 중학생이던 내게 옆 반 남자애 하나가 파란색 녹음테이프를 내밀었다. 겉봉에는 삐뚤삐뚤 영어로 곡 제목이 쓰여 있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에 와 틀어보니 투명한 음들이 가슴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불을 덮어쓰고 음표 하나하나 마음에 새기며 들으니 코끝이 시려왔다. 그날 난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쳐다보지도 않았던 먼지 쌓인 피아노를 열었다. 그리고 그 가을 내내 ‘Lake Louise’ 한 곡만 연습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다 폭이 넓어지고, 오른손 검지와 약지를 이용해 한 옥타브를 넘나들 때는 마치 물결이 치는 듯하다가 다시 고요하게 마무리. 물론 그애와는 연애는커녕 “고맙다” 말 한마디 못했지만, 지금도 건반 앞에 앉으면 지극히 자연스럽게 손이 그 곡을 연주한다.

    너무 진부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털어놓는 것은, 유키 구라모토의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연 하나쯤은 품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구라모토의 최고 명반 중 하나인 ‘Romance’(1998) 한국판 재킷에는 ‘사랑하는 연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 함께 간 여행에서 이 음악을 들었다’는 한 음악평론가의 절절한 사연이 담겨 있다. 사실 구라모토의 음악은 화려하거나 웅장하지 않다. 주로 안개, 호수, 꽃, 동산 등 목가적인 풍경을 그리는 곡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선율이 귀에 익고 멜로디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화려하지 않은 단음표들이 가슴속 사연만 묻어놓는 방을 노크하는 듯하다.

    구라모토가 10월 2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피아노 포엠(Piano poem)’이란 이름으로 콘서트를 연다. ‘당신의 마음에도 시가 있습니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콘서트에서 그는 5월 발매한 앨범 ‘피아노 포엠’의 곡들과 ‘Lake Louise’ ‘Second Romance’ 등 대표곡을 연주한다. 30인조 디토 체임버 오케스트라도 함께할 예정이다.

    앨범 ‘피아노 포엠’은 일본 전통시 ‘하이쿠’를 닮았다. 열일곱으로 제한된 글자에 계절, 감정, 여운을 남기는 하이쿠처럼 단조로운 선율에 제한된 연주로도 긴 여운을 남긴다. 각 곡은 독립적이지만 앨범 하나를 1번 트랙부터 들으면 꼭 한 사람의 감정 변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연결된다. 그중 8번 트랙 ‘Promenade’의 투명한 멜로디 진행은 구라모토의 장점을 잘 살렸다. ‘Romance’나 ‘Sailing in silence’(2000)와 같이 ‘구라모토의 대표곡 목록’에 수록될 것이란 예감이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10월 초, 다정한 사람과 구라모토의 공연을 본 뒤 걷는 가을밤의 정취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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