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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밴드 형제는 뜨거웠다

데이비드·에드 영국 노동당수 경선 출마 … 정책과 지지세력 대척점, 흥미진진한 대결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밀리밴드 형제는 뜨거웠다

밀리밴드 형제는 뜨거웠다

영국 노동당 당권을 놓고 맞붙은 밀리밴드 형제. 왼쪽이 형인 데이비드 밀리밴드, 오른쪽이 네 살 아래 동생인 에드 밀리밴드다.

13년 만에 보수당에 정권을 내주고 야당이 된 영국 노동당이 새로운 지도부 구성에 나섰다. 그리고 중도좌파 노선을 지속할지, 전통 지지층을 되찾기 위해 좌파 노선을 강화할지 등 정책 노선을 놓고 당내 토론이 한창이다. 그런데 9월 말로 예정된 경선에서 정작 관심을 끄는 것은 정책 논쟁이 아니라 두 명의 후보다. 모두 5명이 출사표를 던진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한 데이비드 밀리밴드 전 외무부 장관과 에드 밀리밴드 전 에너지·기후변화 장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들은 네 살 터울의 형제다.

노동당 당권을 놓고 맞붙은 밀리밴드 형제는 이미 당내에서 차세대 리더로 점찍어둔 엘리트 의원이다. 형인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노동당 정권에서 환경부 장관으로 내각에 진출한 뒤 잇따라 외무부 장관을 맡아 국제무대에도 널리 이름을 알렸다. 동생인 에드 밀리밴드는 형보다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대중연설 능력이나 정책적 완성도에서는 능가한다는 평가다.

학자 아버지로부터 지적 세례

현재 분위기로 보면 선두주자는 형인 데이비드 밀리밴드 의원으로, 고든 브라운 총리 시절부터 노동당의 차기주자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그의 주가가 크게 오르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브라운 총리의 인기가 걷잡을 수 없이 떨어지면서 노동당에서 ‘브라운 회의론’이 고개를 들 무렵부터였다. 당내에서 전임 블레어 총리를 지지해오던 그룹은 대안으로 데이비드 밀리밴드를 지목했다. 당시 야당이었던 보수당 당수 데이비드 캐머런 현 총리에 맞서려면 브라운보다 훨씬 젊고 역동적인 카드를 내세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반(反)브라운 목소리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며 당내 권력투쟁 양상으로 비화할 움직임마저 감지되자, 데이비드 밀리밴드는 브라운 지지를 선언하며 당권에 도전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그는 이처럼 당내에 광범위한 지지 그룹이 존재하는 만큼 지난 5월 총선 패배 이후 가장 먼저 당권 도전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출마 선언 직후 당내 주요 중진 의원의 잇따른 지지 선언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동생 에드 밀리밴드 전 장관은 형과는 다른 정책 노선을 내세우고 있다. 형 데이비드가 블레어 총리가 설계하고 당내에 착근시킨 ‘신노동’, 이른바 ‘뉴 레이버(New Labour)’ 노선을 상징한다면, 에드는 브라운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흥미로운 건 두 사람이 당내에서 정책으로나 지지세력 분포로나 대척점에 있다는 사실. 데이비드가 노동당의 전통적 좌파 노선을 과감하게 버리고 중도지향적 노선을 개척한 블레어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에드는 이를 비판하며 친노동자 정책을 강화할 것을 주장한다. 노동당의 모태라 할 수 있는 노동조합 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는 쪽도 에드다.

이렇게 형과 동생이 이번 노동당 경선에서 정책적 차별성을 보임에도, 정치적 궤적만을 놓고 본다면 많은 유사점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형제 모두 20대 초반부터 정치에 입문해 의회정치 메커니즘 안에서 잘 훈련받은, 말하자면 ‘준비된 지도자감’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형인 데이비드는 30대에 환경부 장관을 거쳐 41세에 외무부 장관에 올라 30년 만에 최연소 외무부 장관 탄생이라는 신화를 낳았다. 동생 에드는 17세에 노동당에 입당해 대학 시절부터 예비 정치인 훈련을 받은 것으로 유명하다. 당내 중진급 정치인 밑에서 참모 역할을 하며 차근차근 경력을 쌓은 점도 비슷하다. 데이비드는 블레어 시절 총리실 정책라인을 이끌면서 정치적 경험을 쌓았고, 에드는 브라운 총리가 재무부 장관으로 일하던 시절 정책 브레인으로 정치에 몸담기 시작했다.

일반 유권자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40대 초·중반의 이 형제가 유망 정치인이 되기까지 아버지인 랠프 밀리밴드의 영향이 컸다. 랠프 밀리밴드는 폴란드에서 벨기에로 이주한 유대계 마르크스주의 학자로 런던정경대(LSE) 교수 출신이다. 영국 사회주의 운동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학자이기도 한 그는 1960년대 말 유럽의 신좌파 운동을 이끈 이념적 지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이런 아버지 밑에서 지적 세례를 받고, 유대인 특유의 엄격한 환경에서 성장한 두 아들이 노선 갈등을 겪는 노동당 내 당권투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경선은 대단한 흥행 요소를 안은 셈. 게다가 두 사람은 최근 영국 의회에 ‘쓰나미’를 몰고 왔던 주택수당 부당청구 스캔들에 전혀 연루되지 않았다는 점도 강점으로 꼽힌다. 의원 수당을 편법으로 청구해 챙긴 국회의원 수십 명이 차기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고 하원의장 사퇴로까지 이어진 이번 스캔들에서 밀리밴드 형제는 어디에도 연루되지 않아 깨끗한 정치인이라는 브랜드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 형제 중심의 경선 구도를 더욱 흥미롭게 하는 에피소드도 때맞춰 등장했다. 블레어 총리는 최근 회고록을 공식 출판했는데, 후임자였던 브라운 총리와의 불화설을 상세히 묘사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2007년 브라운에게 총리직을 물려주고 중도 사퇴했던 블레어 전 총리는 브라운이 1990년대 말 자신이 내세웠던 중도지향적 ‘뉴 레이버’ 노선을 포기하면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다고 각을 세웠다. 블레어와 함께 ‘뉴 레이버’의 공동 설계사로 꼽히는 피터 맨덜슨 전 기업혁신기술부 장관도 엄호 사격에 나섰다. 맨덜슨 전 장관은 “노동당이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좌파 노선으로 회귀하려 한다면 정치적으로 막다른 골목을 만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두 사람 모두 지금까지는 지지 후보를 명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그러나 최근 이런 행보가 ‘뉴 레이버’ 노선 계승을 표방하는 데이비드에 대한 암묵적 지지로 해석되고 있다. 노동당 내 헤비급 ‘올드 보이’들이 사실상 형 데이비드의 지지를 선언하고 나서자, 동생인 에드 진영은 발끈했다. 지금껏 에드는 “부유층에 대한 증세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며 “중산층과 서민 위주의 정책을 통해 잃어버린 전통 지지층을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해왔기 때문.

20대 정치입문 ‘준비된 지도자감’

다른 후보 진영도 “두 사람이 나서는 게 데이비드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며 견제 사격에 나섰다. 이번 노동당수 경선에는 밀리밴드 형제 외에 3명이 더 출마했다. 브라운 전 총리의 최측근이었던 에드 볼스 전 아동가족부 장관, 영국 의회 역사상 흑인 여성으로는 최초로 의원 배지를 단 다이안 애보트, 앤디 번함 전 보건부 장관이다. 57세의 다이안 애보트를 제외하면 당권을 노리는 후보 모두 40대 초·중반이라는 점도 놀랍다.

5명의 후보 중 앤디 번함과 다이안 애보트가 후보 등록 당일에야 등록에 필요한 추천인 수를 넘긴 것을 고려하면, 현재 판세는 3강 2약이다. 물론 그중에서도 밀리밴드 형제간 1, 2위 다툼이 가장 볼만하다. 노동당수를 뽑는 경선은 노동당 의원(MP)과 유럽의회 의원 (MEP) 전원, 일반 당원 그리고 노동조합 등 관련 단체 회원의 3가지 그룹으로 나뉘어 실시된다. 1994년 당시 경선 유권자는 100만여 명이었으나 이번에는 더욱 늘어날 전망. 노동당 경선 결과는 9월 25일 맨체스터에서 열리는 가을 정기 전당대회에서 발표된다.



주간동아 2010.09.20 755호 (p130~132)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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