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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REPORT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전설적인 종군기자 마거리트 히긴스 … 한국인이 보여준 진정한 용기 보도

  • 주성민 군사전문 자유기고가 bluejays@kebi.com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1950년 11월 22일 중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던 워싱턴의 북폭 자제 지시에도, 맥아더 극동군 사령관은 인민군의 주 보급선을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신의주교 폭파를 명령했다(왼쪽). 6·25전쟁 보도로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히긴스 기자가 6·25전쟁 직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만나 얘기를 나누고 있다.

해질 무렵 한 여인이 미군 지프에 앉아 정신없이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얇은 스웨터에 해군 네이비블루의 군청색 스커트를 입은 여인은 기사 쓰는 일에 몰두해 지나가던 군인들이 쳐다보는 줄도 몰랐다. 전설적인 종군기자(war correspondent) 마거리트 히긴스였다.

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진 지 4일째인 1950년 6월 28일, 그는 미국의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 송고할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날 새벽 방어선이 무너져 서울은 북한군에 함락됐다. 국군 병사들은 후퇴하느라 바빴으나, 땅거미가 내려앉는 황혼 녘 미모의 여성이 지프에 앉아 타이핑하는 모습은 너무도 뜻밖의 광경이었다.

히긴스는 늘 최전선에서 종군한 기자였다. 그는 전쟁 속에서 한국인들이 보여준 진정한 용기를 보았다. 그는 자신이 목격했던 한국인들의 꺾이지 않는 용기에 대해 숱한 기사를 썼고,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는 ‘한국을 도와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6·25전쟁을 취재하며 한국인에 대한 깊은 이해심과 신뢰를 보여주었다. 최근 정부는 히긴스의 이런 정신을 높이 사 고인이 된 그에게 훈장을 추서했다. 9월 2일 어머니를 대신해 외교훈장을 받은 린다 밴더블릭 박사는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고 어머니는 굳게 믿었다. 자유를 지켜낸 한국인에게 어머니를 대신해 박수를 보낸다.”

히긴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베트남전쟁, 콩고 내전 등 여러 전쟁터에서 종군하며 많은 특종 기사를 썼다. 1945년 4월에 쓴 ‘다카우 수용소 해방기’도 그중 하나다.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 히긴스는 미군 기관지 ‘성조지(Star · Stripes)’의 기자인 육군 상사와 뮌헨 근교의 악명 높은 유대인 수용소 다카우를 찾아갔다. 운이 좋았던 두 사람은 경비병들을 무장해제시키고 그곳을 접수했다. 미군 42사단이 다카우로 진격하고 있었으나 그들이 더 빨랐다. 이 특종 보도로 그는 미군으로부터 특별훈장을 받았고, 그해 뉴욕 ‘여기자 클럽’이 주는 ‘해외보도상’도 수상했다.



6월 27일 비 내리는 김포에 도착

1950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도쿄 특파원이던 히긴스(당시 30세)는 본사로부터 한국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뉴욕타임스’의 번튼 크레인 등 3명의 동료와 미군 수송기에 올랐다. 6월 27일 오후 일본에서 이륙한 수송기는 전투기의 호위를 받으며 비 내리는 김포에 도착했다. 4명의 기자는 미군 군사고문단 본부에 도착해 책임자인 라이트 대령의 집무실로 갔다. 그곳은 카빈 소총과 탄약, 담배꽁초가 널려 있어 엉망이었다. 기자들이 대령에게 전황을 묻자 인스턴트커피를 끓이던 그가 대답했다.

“아직은 희망이 있지만 장담하긴 어렵소.”

자정이 가까워져 히긴스는 고문단 관사의 방 하나를 배정받았고 남자들은 바깥의 숙소로 갔다.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고문단에서 남자 기자 숙소로 전화해 “상황이 좋지 않다”며 깨웠다. 그들이 본부로 가자 상황실 작전장교가 사태를 설명했다.

“적의 전차가 서울로 들어왔다. 빨리 한강을 건너 수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

당시 북한군은 소련제 최신형 전차 140대를 앞세워 진격하고 있었다. 3명의 기자는 지프에 올라타 한강철교로 갔으나 후퇴하는 군인과 차량, 피란민으로 북새통이었다.

그들의 지프가 철교를 반도 못 건너고 멈춰 있을 때, 국군 폭파반이 양쪽에서 통행을 차단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리를 폭파했다. 철교에 있던 프랭크 기브니 기자는 그때의 상황을 ‘타임(Time)’지에 이렇게 썼다.

“갑자기 하늘에서 오렌지색 거대한 불꽃이 번쩍했다.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나 우리가 탄 지프가 튀어 올랐다. 내 안경은 산산조각 났고 머리에서 흐른 피가 옷을 적셨다. 크레인 기자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소리쳤다.”

이 때문에 피란민은 물론 트럭에 타고 있던 한국군이 자신의 눈앞에서 모두 죽고 말았다고 그는 기사에 썼다. 관사에서 잠자던 히긴스도 연락을 받았으나 이미 다른 기자들은 떠난 다음이었다. 60여 명의 군사 고문단은 철수 시기를 놓치면 북한군의 포로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전전긍긍했다. 히긴스에겐 포로가 될 걱정보다 더한 게 있었다. 특유의 기자 근성을 지닌 그답게 ‘서울 함락’이란 특종 기사를 어떻게 내보낼까를 걱정했던 것이다. 초조해하는 그에게 대령이 물었다.

“기사 때문에 걱정하는 거요?”

히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법을 묻자 대령이 대답했다.

“기사를 짧게 줄여봐요. 무선통신 장치로 보낼 수 있게 해볼 테니까.”

그는 바로 지프로 가 타이프라이터를 꺼내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지나가던 군인들은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히긴스는 고문단 일행과 나룻배로 한강을 건넜고 산길을 걸어 수원까지 강행군해 철수했다.

남자도 힘든 포화 속에서 취재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9월 3일 6·25 전쟁 60주년 ‘낙동강지구전투 전승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경상북도 왜관철교 아래에서 당시 전투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다음 날인 6월 29일, 히긴스는 수원에서 최고지휘관 맥아더와 조우했다.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전용기 C-54 바탄(Bataan)을 타고 날아온 맥아더는 한강변에서 쌍안경으로 강 북쪽의 서울을 관찰한 뒤 수원 전방지휘소로 돌아왔다. 그때 그는 한강교 폭파사건과 맥아더의 한국전선 방문 기사를 쓰느라 활주로 구석에서 타이핑에 몰두해 있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본 맥아더가 다가갔다.

“여기선 기사를 보내기 힘들 텐데, 내 비행기로 도쿄에 가는 게 어떻겠소?”

사진기자가 촬영한 사진에는, UN군 사령관 앞에서 두 손을 허리에 붙인 채 얘기 나누는 히긴스의 모습이 아주 당당해 보인다. 송고가 쉽지 않던 그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고, 맥아더를 인터뷰해 미군이 대규모로 참전한다는 특종을 잡아냈다. 도쿄에서 기사를 보낸 그는 다음 날 한국 전선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에는 수백 명의 기자가 종군했지만 여성 기자는 단 2명이었다. 히긴스와 ‘라이프(Life)’의 사진기자 마거리트 버크화이트였다. 두 사람은 제2차 세계대전 후 동유럽을 함께 취재 여행한 적이 있다. 이들은 남자도 견디기 힘든 최전선의 포화 속에서 취재하는 맹렬한 기자였다.

히긴스는 한국 해병대의 작전에도 동행했고, 전선에서 병사들과 많은 시간 대화했으며, 병사들은 그를 ‘매기’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좋아했다. 그러나 미국 대사였던 무초는 이런 히긴스가 못마땅했다. 결국 무초는 히긴스에게 한국을 떠나달라고 통고했는데, ‘귀찮고 성가시다’는 게 이유였다.

수원에서 AP통신과 ‘시카고 데일리 뉴스’ 등의 기자들과 합류한 히긴스는 대전으로 갔다. 그들은 대전에서 스미스 부대(Task Force Smith)로 알려진 미군 2개 전투중대가 처음 전선에 투입된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군 참전’ 기사를 보낼 마땅한 수단이 없어 골머리를 앓았다. 고민하던 그들은 대전에 가 있던 무초 대사의 숙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그곳엔 통신시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초가 히긴스를 싫어한다는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기자들이 찾아가자 대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도 없이 거실로 안내했고, 테이블엔 그가 마시던 스카치위스키가 병째 놓여 있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자들은 위스키와 가장 가까운 부류로 통한다. 히긴스는 자신의 저서 ‘War in Korea’에서 “스트레이트로 마신 위스키가 그처럼 확확 달아올랐던 적은 없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무초 대사의 숙소에도 통신시설은 없었다. 히긴스와 AP 기자는 소파에 파묻힌 동료 둘을 위스키와 함께 남겨두고 나왔다. 위스키보다 기사 송고가 다급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은 대전역 부근 미군 정보과를 찾아내 전화로 도쿄를 연결한 뒤 간신히 기사를 불러줄 수 있었다. 6·25전쟁에서 활약한 기자들은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때까지 기사를 보낼 수단을 찾느라 두고두고 골탕을 먹었다.

미 육군의 첫 전선 침투 부대인 24사단 21연대 1대대, 즉 스미스 부대의 2개 중대는 7월 5일 오산에서 북한군 107 전차연대의 기갑부대와 대결했다. 이들은 75mm 무반동포를 쏘며 4대의 전차를 파괴했다. 그러나 30대가 넘는 전차는 그들을 지나쳐 계속 전진해갔다.

1시간 후 북한 4사단 주력군에 맞서 42명의 적을 사살하면서 중대원들은 적의 진격을 저지했다. 그러나 이들의 화력은 열세였고 총알마저 바닥나 7시간 동안 150명이 전사하고 26명이 실종됐으며, 남은 360여 명은 간신히 퇴각했다.

60년 전 스미스 부대가 처절한 근접전을 벌였던 오산 1번국도 옆 죽미령고개 현장에는 참전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브라보 중대와 찰리 중대의 희생자 176명이 자신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워커 “전쟁터 여자 안 된다” 추방령

불바다 인천 상륙 동행 자유를 위한 고귀한 희생 기록

하긴스 기자를 한국에서 추방한 건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었다. 6월 23일 서울 용산 미8군 사령부에서 열린 워커 장군 동상 제막식에서 축사를 낭독하는 캐슬린 스티븐스 주한 미대사.

히긴스를 한국에서 추방한 건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었다. 그는 “전쟁터는 여자가 올 곳이 못 된다. 우린 숙녀를 위한 아무런 시설도 없다”며 그에게 추방령을 내렸다. 히긴스는 전선 취재를 포기할 수 없어 도쿄의 맥아더에게 탄원서를 보냈다. 그러나 기다려도 소식은 없었고 속이 탄 히긴스는 워커 중장에게 전화했다. 후임 특파원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저돌적이며 거친 성격으로 유명한 워커는 이를 거절했다.

“잔소리 말고 떠나라!”

그래도 그는 “기자에게서 보도권을 빼앗지 말라”며 저항했다. 한국에 온 지 20여 일째인 7월 16일, 대구로 호송된 히긴스는 8군 공보장교들에게 이끌려 도쿄행 항공기에 실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도쿄에 도착하자 재미있는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탄원서를 받은 맥아더가 12시간 전 워커 앞으로 ‘추방을 취소하라’고 전문을 보냈다는 것이다. 워커가 직속상관의 전문을 수신하고도 모른 체한 것이라 히긴스는 도쿄에서 몹시 약이 올랐다.

맥아더는 ‘뉴욕 헤럴드 트리뷴’에도 전문을 보냈다.

“한국에서 여기자 종군금지 조치를 해제한다. 마거리트 히긴스는 뛰어난 직업정신으로 우리 모두의 존경을 받고 있다.”

기세 좋게 전선으로 돌아온 히긴스에게 워커 중장은 사정했다.

“당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난 두고두고 비난받을 거요. 그러니 제발 몸조심해 죽거나 포로가 되지 말아요.”

맥아더의 특별 배려로 이제 처지가 바뀌었다. 그런데 불행히도 워커 중장은 지프를 타고 가다 국군 트럭에 들이받히는 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때 패튼 전차군단의 사단장으로 독일 전선을 누비며 나치를 격파한 맹장이었다.

미 전역 순회 “한국을 돕자” 호소

전쟁이 시작된 이후 2개월이 넘도록 UN군은 북한군에 계속 밀리기만 했다. 전황은 비참했고 한반도는 마지막 그루터기인 부산만 남겨두고 있었다. UN군은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 전선의 유지도 힘겨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맥아더는 인천 상륙을 기획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히긴스는 작전 취재를 위해 미 해군에 가 승선을 요구했다. 그러나 해군은 전함에 여성을 태우지 않는다는 전통을 내세워 거절했다. 그 정도로 물러설 히긴스가 아니었다. “난 최전선의 참호 속에도 있어봤다. 그러니 갑판에서라도 자겠다. 태워만 달라”며 그는 싸우다시피 해서 병원선 승선을 허락받았다. 대부분의 기자가 맥아더와 함께 기함(flagship) 매킨리를 탄 것에 비하면 엄청난 차별이었다. 히긴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병원선은 전선에 맨 나중 도착하는 지원 선박이라 작전에 대한 기사는 한 줄도 못 쓸 게 뻔했다. 그는 수송선단의 지휘관인 함장을 찾아갔다. 잘 곳이 없으니 갑판에 슬리핑백을 놓고 자겠다며 매달린 결과 “좋아요, 비상실이 하나 비었으니 그걸 사용해요”라는 허락을 받았다. 히긴스는 즉시 방을 찾아가 문을 잠가버렸다. 혹시라도 함장 마음이 변해 하선하라 하면 맹세코 잠긴 문을 안 열어줄 생각이었다.

마침내 한반도의 전세를 바꿀 작전이 9월 15일 새벽 시작됐다. 상륙작전이 전개되자 엄청난 포격 속에서 상당수 기자가 공포에 질려 상륙을 두려워했다. 히긴스는 미 해병대원들과 같이 상륙정을 탔고, 함포사격으로 불바다가 된 해안에 올라 취재를 시작했다. 그가 쓴 상륙종군기 ‘붉은 해안(Red Beach)’은 9월 18일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전면기사로 실렸다.

이 보도를 통해 히긴스는 이듬해 여성 기자로는 처음 ‘퓰리처 국제 보도상’을 수상했다. 그는 미국 언론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기자 중 한 사람이었고 전설적인 종군기자였다.

히긴스는 한국에서 6개월간 취재 후 귀국해 전쟁 경험을 쓴 ‘War in Korea’를 1951년 출판했다. ‘자유를 위한 희생’이라고 번역된 이 책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미국이 주도한 UN연합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운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책은 베스트셀러가 됐고, 그는 이 책을 가지고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미국인들에게 ‘한국을 도와야 한다, 자유를 지켜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는 전쟁이 가열되던 베트남에서도 종군했으나 1966년 취재하다 감염된 풍토병으로 45년간의 생을 마감했다. 미국 정부는 종군기자로서 히긴스가 쌓은 뛰어난 업적과 한미동맹 유대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고귀하게 평가했다. 그는 국가를 위해 희생된 군인은 아니다. 그러나 유해는 알링턴 국립묘지에 명예롭게 안장됐다. 번호 ‘4705-B’인 이곳은 관광명소로 알려진 존 F 케네디의 묘지와 불과 50여m 거리에 있다. 워싱턴의 링컨기념관 부근 한국전쟁참전 기념비의 검은 화강암에는 ‘FREEDOM IS NOT FREE’라고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라는 건 히긴스의 신념이었고, 우린 모두 그에게 정신적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히긴스는 59년 전 자신의 책을 이렇게 마감했다.

“한국에서 우린 준비하지 못해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 승리에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다. 그러나 패배의 대가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주간동아 2010.09.20 755호 (p124~128)

주성민 군사전문 자유기고가 bluejays@keb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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