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훔볼트대 전경. 조각상은 이 대학 물리학 교수였던 헤르만 폰 헬름홀츠(1821~1894).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훔볼트대는 근대 독일사의 일대 전환기에 탄생했다는 점이다. 1810년 훔볼트대가 처음 문을 열었을 당시는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천하를 호령하던 때였다.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은 프랑스와 인접한 독일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으로 중세 이래 1000년 가까이 지속된 독일의 전통, 즉 수많은 독립된 정치적 단위로 구성된 국가연합체가 해체됐다. 제국은 해체 과정에서 대부분의 지역이 프랑스 위성국가로 전락하거나 아예 프랑스 영토로 병합됐다. 18세기 이후 제국의 패권을 다투던 두 강대국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가까스로 독립은 유지했으나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 전쟁의 피해는 프로이센의 경우 특히 심각했다. 1806년 예나와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잇따라 패전을 경험한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에서 나폴레옹과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의 내용은 굴욕적이었다. 프로이센은 엘베 강 이서(以西) 지역을 포함, 영토의 절반가량을 상실했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아울러 프로이센 상비군의 병력은 엄격히 제한된 반면 프랑스군이 프로이센 영토에 주둔하게 됐다.
국가존망 위기 프로이센 개혁의 산물
한마디로 패전 후 국가 존망의 위기에 당면한 프로이센은 일단의 개명(開明) 관료가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농노제가 폐지되고 길드제도가 해체됐으며, 제한적이나마 대의제와 지방자치제가 도입됐다. 또 징병제도가 생기고 군 장교집단의 인적 쇄신이 이뤄졌다. 이러한 개혁의 궁극적 목표는 근대화를 통해 프로이센을 중흥하자는 것이었다. 그것은 ‘아래로부터’ 혁명이 아니라 ‘위로부터’ 개혁으로 국가와 사회의 혁신을 꾀한 것으로, 프랑스가 몰고 온 충격과 위기에 대한 나름대로 확신에 찬 창의적 대응방식이었다.
프로이센 개혁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베를린대(1949년 이후 설립 주역인 ‘빌헬름 폰 훔볼트’의 이름을 따 훔볼트대로 개칭)의 창설이었다. 틸지트의 굴욕 이후 프로이센이 시도한 개혁에는 경제, 행정, 군제뿐 아니라 교육도 포함됐는데, 베를린대 설립은 교육개혁의 핵심이었다. 재정이 바닥나고 국가의 존속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교육, 특히 대학 교육에 눈을 돌렸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다. 그들은 ‘물리적인 힘에서 잃은 것을 정신적 힘에서 만회해야 한다’는 프로이센 국왕의 발언처럼 고등교육 진흥에서 국가 위기 극복방안을 찾았다.
대학의 자유와 국가 충돌은 생각 안 해
독일 동부 아우어슈테트에서 벌어진 나폴레옹 - 프로이센 전투를 재연한 모습. 이 전투에서 패전한 프로이센은 1807년 틸지트에서 나폴레옹과 치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다.
다른 하나는 실용적인 직업교육 대신 순수학문 연구를 표방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당시 프로이센에 대두한 반(反)프랑스, 반나폴레옹의 민족주의 성향을 반영했다. 즉 프랑스에서는 18세기 말 혁명을 거치면서 전통적인 대학이 광산·건축·군사·의학 등 여러 분야의 전문적인 직업학교로 재편됐는데, 프로이센의 개혁가들은 프랑스식 학제개혁에 대한 대응으로 대학을 순수 학술기관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베를린대가 처음에 256명의 학생, 24명의 정교수로 개교했을 때 철학·법학·의학·신학 등 4개 학부가 있었지만, 12명의 교수가 배치된 철학부가 대학의 중심이 됐다.
특수한 직업전문학교가 아니라 학문 연구를 추구하는 보편적 대학을 건립한다는 구상은 18세기 말 독일 지식인들이 가졌던, 교육에 대한 독특한 관념과 인식의 산물이었다. 신인문주의(新人文主義)라 일컫는 당시 지적 조류와 밀접하게 연관된 새로운 교육이념에 따르면, 교육은 본질적으로 각 개인의 개성을 완벽히 구현하고 정신적 능력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개성과 능력 계발을 강조하는 교육이념은 출생이 아니라 성취 능력이 지배하며, 직업 및 신분집단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담고 있었다. 피히테, 훔볼트 등의 개혁가는 교육을 새로운 사회의 이상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교육이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과 의지를 함양함으로써 인간을 독립적, 자율적 존재로 키우는 데 그 목표가 있었다.
신인문주의 교육이념에서 대학은 장래 직업활동을 준비하는 곳이 아니었다. 대학의 본질은 지적, 정신적 계발을 위해 학문을 연마하는 곳이었다. 대학에서 학문 연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었으며, 전문직업과 결부된 실용성 여부는 부차적이었다. 또한 대학은 완성된 지식을 전달하거나 습득하는 곳이 아니라 탐구를 통해 스스로 배우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신인문주의 교육이념에 따라 창설된 베를린대는 흔히 지적하듯 ‘근대 대학의 효시’가 됐다. 대학은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기관이 됐으며, 새로운 세미나 형식이 중세 이래 대학의 전통이었던 강의와 설교를 대신하게 됐다. 특히 교육과 연구를 결합하려 한 베를린대 이념은 오늘날 세계 유명대학이 지향하는 ‘연구중심 대학’의 기원이 됐다.
훔볼트를 비롯한 베를린대 창설자들은 국가 주도로 대학을 설립하면서도 중세 이래 대학이 누린 자유와 국가권력이 충돌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은 갖지 않았다. 그들은 당시 독일 특유의 관념론적 국가관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에게 국가는 가장 고귀한 도덕 이념의 구현자로서 국민의 지적, 도덕적 갱신을 이끄는 존재였다. 그들이 개혁을 통해 추구한 것은 교육과 학문을 진흥하는 근대적인 ‘문화국가’였다. 이 근대국가는 18세기 절대주의 국가와 달리 대학과 상호 대립이 아니라 보완 관계에 있으며, 국가에 의해 대학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이 아니라 보장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