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41

2010.06.14

간 나오토 총리 ‘체제피로’ 구해낼까

시민운동가 출신 일본 정치 새로운 장 … 7월 참의원 선거가 ‘롱런’의 기로

  • 도쿄=이종각 jonggak@hotmail.com

    입력2010-06-14 14: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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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 나오토 총리 ‘체제피로’ 구해낼까

    2008년 민주당 대표 대행으로 청와대를 방문해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한 간 나오토.

    지난해 9월 출범한 뒤 80% 가까운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기세를 올리던 일본 민주당의 하토야먀 유키오(鳩山由紀夫) 내각은 정치자금 문제로 민심이반을 자초해 결국 8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간 나오토(菅直人) 부총리 겸 재무상이 6월 8일 새 총리로 바통을 이어받았다.

    아버지가 샐러리맨인 가정 출신에, 한 번도 자민당에 몸담은 적 없는 시민운동가 경력의 간 나오토가 총리가 된 것은 현대 일본정치사에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아버지 등이 국회의원을 지낸 현역의원을 일본에선 ‘세습의원’이라고 부른다. 1996년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 총리 이후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까지 8명이 연속 세습의원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최근 총리를 지낸 아베 신조(安倍晋三),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아소 다로(麻生太郞), 하토야마는 부친이나 외조부 등이 총리 역임자였다. 이들을 ‘세습총리’라 한다. 이번에 하토야마와 동반 사퇴한 오자와 이치로(小一郞) 민주당 간사장도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지낸 세습의원이다.

    그러나 간 총리는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나는 샐러리맨의 자식이다. 보통의 가정에서 자란 젊은이가 뜻을 품고 노력하면 정치사회에서도 활약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나는 풀뿌리에서 출발한 정치가”라고 강조했다.

    간 총리는 1946년 10월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 현의 옛 이름은 조슈(長州)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메이지유신을 주도한 인물들이 이곳 출신이며, 가장 많은 총리를 배출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간 나오토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총리를 꿈꿨다고 한다. 유리회사 간부의 아들인 간은 아버지의 전근으로 도쿄로 옮겨와 도쿄공대(도쿄대 공대와는 다른 학교)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재학 중 정치서클을 만들어 학원투쟁과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부인 참정권’ 운동으로 유명한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技)의 참의원 선거에서 사무장으로 뛰어 당선에 기여했다. 또 일본에서는 아주 드물게 사촌누이인 노부코(伸子·64) 여사와 결혼했다. 노부코 여사는 대외적으로 나서는 편이 아닌 가정주부지만, 남편에게 신랄한 정치적 조언자 노릇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사촌누이인 부인 신랄한 ‘정치적 조언’



    간 나오토는 1976년 시민단체 추천으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고, 3번 연속 공직선거에서 낙선한 뒤 1980년 사회민주연합의 공인을 받아 처음 중의원에 당선됐으며, 도시·토지 문제 등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사민련이 신당 사키가케에 합류할 때(1994년) 입당했다. 간이 장래의 총리감으로 부상한 것은 1996년 1월 자민-사키가케 연립정권에서 후생상을 맡았을 때다. 혈액제제에 의한 에이즈 감염이 큰 사회문제가 됐을 때(2월) 후생성 관료들이 없다고 한 관련 파일을 지하창고에서 찾아내, 200여 명의 피해자 앞에서 무릎 꿇은 채 정부의 잘못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사죄했다. 종래의 자민당 출신 각료들과는 확연히 다른 이 같은 자세가 국민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때부터 그는 자민당 정권의 병폐인 관료주의를 해결할 것으로 기대되는 인물로 떠올랐다.

    이후(1996년 9월) 간은 하토야마와 구 민주당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았다. 이때의 구호가 ‘시민이 주역’이었다. 이 무렵 그는 정권교체를 위해 구 민주당이 오자와가 당수로 있는 자유당과 합당하는 것에 찬성했다. 오자와는 과거 금권, 파벌정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자민당 내 다나카(田中) 파와 다케시타(竹下) 파를 배경으로, 40대에 자민당 간사장을 지내며 거액의 정치자금을 모으고 권세를 휘둘러 ‘암장군(闇將軍)’으로도 불렸던 인물이다. 시민운동가 출신인 간이 그런 오자와와 손을 잡는 것은 이념적으로 상충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소수정당으론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판단을 한 것이다. 간은 구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2003년 9월)으로 출범한 현재의 민주당이 지난해 집권한 뒤 부총리 겸 국가전략상 및 재무상을 차례로 맡았다.

    간 나오토 총리 ‘체제피로’ 구해낼까

    민주당 2기 내각 공식 출범을 하루 앞둔 6월 8일 새 출발의 의미로 파이팅을 외치는 간 나오토 총리.

    지연과 혈연, 기업과 단체 등을 지지기반으로 해온 자민당은 90년대에도 ‘시민’을 ‘추상적인 유령’이라고 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발언처럼 시민을 적대시했다. 그로부터 십수 년이 지나 시민운동을 정치의 원점으로 삼은 간이 총리가 된 것은, 어쨌든 일본 정치의 새로운 장을 연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1955년 자민당 결성 이후 자민당 출신이 아닌 사람이 총리가 된 경우는 1994년 자민 사회 연립정권 때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사회당위원장 한 사람뿐이다. 그러나 그는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한 제1당인 자민당에 얹혀 있는 총리였다는 점에서 거대 여당의 총리인 간과는 의미가 다르다. 간 총리의 취임은 자민당 출신이 아닌 사람도 집권당 총리가 될 수 있다는 전례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단명정권은 국정 혼란 악순환

    현 천황의 연호는 헤이세이(平成)이고, 2010년은 헤이세이 22년이다. 그 사이 16명의 총리가 바뀌었다. 평균 재임기간은 1년 5개월 남짓이고, 특히 최근 총리 4명은 평균 재임기간이 1년에 불과하다. ‘단명경량 내각’이 반복되고 있다. 이처럼 단명정권이 계속되는 현상을 사카이야 다이치(堺屋太一) 전 경제기획청 장관은 ‘체제피로’라고 말했다. 현 체제가 시대의 변화에 뒤떨어져 그 윤리관과 미의식이 세상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 예로 도쿠가와 막부 말기 14년 동안(1853~1867) 막부의 최고책임자인 로주(老中)에 임명된 총 40여 명의 평균 재임기간이 1년 2개월에 그쳤는데, 그 전 150년간은 약 130명의 로주가 평균 6년 이상 재임했음을 들었다. 사카이야는 일본이 지금처럼 대외적으로 고립되고 관료 주도가 진행된다면 곧 경제적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경고한다.

    이 같은 분석이 타당한지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학년마다 학급 반장이 바뀌듯 매년 한 명꼴로 총리가 바뀌어서는 국정이 제대로 운영될 수 없음이 자명하다. 총리 재임기간 1년 남짓으론 국가의 장기 비전을 입안해 추진하기는커녕 정책 하나도 추진하기 어렵다. 정권마다 내세운 개혁과 변화는 고사하고 국정 혼란만 가중시키는 셈이다. 지금 일본에선 1990년 이후 일본 경제의 버블이 꺼지면서 시작된 ‘잃어버린 10년’이 다시 10년 연장됐다는 자괴의 목소리마저 들린다. 단명총리, 경량내각도 그 같은 사태를 만든 주원인일지 모른다. 간 총리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정치의 역할은 빈곤·전쟁 등 국민과 세계인을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를 여하히 적게 하는가에 있다”며 ‘최소불행 사회’를 지향한다고 천명했다. 간 총리는 30여 년에 걸친 정치 경력을 갖고 있지만 안보·외교 분야에서는 이렇다 할 경험이나 식견이 없다. 다만 그는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반대하고 외국인 지방참정권 부여에도 찬성하는 등 한일관계를 중시해 과거 자민당 출신 총리와는 달리 한국과 큰 마찰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오는 7월 11일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간 총리는 오자와 측 인사를 정부와 당 인사에서 배제하는 ‘탈(脫)오자와’ 인사로 체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간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이 참의원 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그도 단명총리의 대열에 끼는 불행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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