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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리라

4월 23~25일 영랑문학제 … 셋째 아들 현철 씨 名詩 탄생 비화 책으로 출간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리라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리라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어 한국인에게 매우 친숙한 이 시가 하마터면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 전남 강진 태생의 시인 영랑 김윤식(金允植, 1903~1950)은 모란이 필 무렵에 맞춰 해마다 생가 사랑채에 전국의 유명 문인과 문인 지망생을 초청해 시 창작 대회를 열었다. 1930년대 초 어느 봄날, 영랑도 사랑채를 에워싸듯 화려하게 핀 모란을 보며 시 한 편을 썼다. 하지만 그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공개도 하지 않고 시를 쓴 종이를 손바닥으로 비벼 쓰레기통에 던지려 했다. 이를 본 11년 연상의 선배 춘원 이광수가 “왜 그걸 버려? 이리 줘” 하고는 종이를 빼앗아 읽어보니 깜짝 놀랄 만한 대작이 아닌가! 춘원은 그 자리에서 큰 소리로 시를 낭송해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명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김영랑 시인의 셋째 아들 현철(炫澈·75) 씨가 아니었다면 이런 한국 문단(文壇)의 비화도 영원히 묻힐 뻔했다. 현철 씨는 13세인 1948년까지 강진에서 살았고, 그해 여름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해 1950년 9월 28일 영랑이 북한군의 포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버지 곁에 머물렀다. 그 후 현철 씨는 서울 MBC 기자로 일했고, 39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현지에서도 기자생활을 하다 2008년 영구 귀국했다. 그의 귀국 목적은 두 가지. 그동안 선친에 대해 잘못 알려진 부분을 바로잡고,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발굴해 전하기 위해서다.

쓰레기통에 던지려 했던 종이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리라
“2006년 강진에서 ‘제1회 영랑문학제’가 열려 오랜만에 귀국해 생가를 둘러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1943년 선친이 직접 사랑채 초가지붕을 기와로 올렸는데 이를 다시 초가지붕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영랑 생가는 국가지정문화재인데 원형을 훼손했으니 제대로 고증해 복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영랑을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서 정말 놀랐습니다. 선친은 일제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 단발령 등에 불복했고 광복군 군자금 모금을 도왔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서정시인이지만 국내에 출간된 영랑의 시집, 전집, 평전에는 선친의 성격이나 취미에 대해 몇 줄 언급했을 뿐 이렇다 할 일화가 거의 소개되지 않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선친의 시를 읽어왔고 대부분의 시가 탄생한 생가 주변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바로잡을 건 바로잡고, 새로운 사실은 알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됐습니다.”

현재 고향 강진에서 ‘영랑 현구 문학관’ 관장과 ‘한국시문학파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현철 씨는, 영랑 시집의 베트남어판·영문판·일본어판 출판을 지휘하고 난해한 영랑의 시어를 하나하나 감수해 개정판이 출간되도록 도왔다. 올해는 숨겨진 일화를 모은 에세이집 ‘아버지 그립고야’를 펴냈다. ‘아버지 그립고야’를 통해 우리는 소박하면서도 호방한 성격의 영랑과 그의 주옥같은 시의 탄생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하리라

1927년 영랑 생가 사랑채에서 강진 국악 동호인들과 연습 중 기념촬영을 했다(왼쪽). 영랑이 친필로 쓴 시 ‘달밤에 이슬아침에’의 일부.

영랑은 14세에 첫 결혼을 했으나 1년여 만에 상처하고 8년 뒤 개성 처녀 안귀련(安貴蓮) 씨와 재혼했다. 이 결혼의 주례는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이 맡았고, 하객 중에는 훗날 세계적인 무용가가 된 최승희가 있었다. 영랑은 재혼 전 친구이자 시인인 최승일의 동생 최승희(당시 숙명여고생)와 사랑에 빠졌으나 “무용가 지망생은 장손 며느리가 될 수 없다”는 완고한 부친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최승희는 이별의 쓰라림을 뒤로하고 오빠와 함께 옛 애인의 결혼을 축하하러 온 것이다.

“언어의 멋과 격조가 높은 영랑은 玉”

4·4(1919년 기미독립만세 때 강진 의거일) 사건으로 6개월간 옥고를 치른 뒤에도 영랑은 여운형, 김구 등 독립운동가와 교류했다. 특히 백범 선생은 광복군 군자금을 모으러 강진에 내려왔다가 ‘탑골 꼭대기’(영랑 생가의 별명)에 사는 청년 영랑을 만나 도움을 받은 뒤, 그 인연으로 광복 직후 전국 순회강연 때 다시 강진에 들르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출옥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영랑이 도쿄 음악대학 성악과에 진학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말술도 사양하지 않던 영랑은 거나하게 취해 귀가할 때면 두 팔을 벌리고 우렁찬 바리톤으로 오페라 ‘카르멘’의 아리아 ‘투우사의 노래’를 불렀다. 타고난 풍부한 성량에 예리한 예술감각 등 자질은 충분했으나, 역시 “성악을 하려 하면 학비를 끊겠다”는 아버지의 완고함에 뜻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신 사랑채 가득 클래식 음반을 모으고 서울, 심지어 도쿄에서 열리는 음악회까지 빠짐없이 참석하며 음악에 대한 갈증을 풀었다. 서양음악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조예도 깊어 영랑의 남도 판소리는 명창들도 놀랄 정도였다. 또 거문고, 가야금, 북, 양금의 연주 실력도 빼어나 임방울, 박초월, 이화중선, 이중선 등 명창들이 강진에 올 때면 영랑의 북 연주 실력을 믿고 고수를 데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미당 서정주 선생이 생전에 현철 씨에게 전한 이야기 가운데 영랑이 “언니 이화중선보다 아우 이중선의 소리가 촉기 있다”고 평한 대목이 있다. 미당이 영랑에게 “촉기가 무엇이냐”고 묻자 “같은 슬픔을 노래하면서도 그 슬픔을 딱한 데에 떨어뜨리지 않는 싱그러운 음색의 기름지고 생생한 기운”이라고 설명했다. 이 ‘촉기’란 말은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영랑의 시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문학평론가인 소천 이헌구(전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 씨는 “북에는 소월이요, 남에는 영랑이 있다. 그러나 언어의 멋과 리듬의 격조가 높은 점에서 영랑은 옥이요, 소월은 화강석이다. 소월의 그 많은 한의 노래는 영랑의 옥저(옥피리)의 여운에 미치지 못하는 바 없지 않다”라고 평했다. 시인 박목월 선생도 1966년 현철 씨를 만나 “좀 더 시간이 흘러 독자들이 영랑 시의 진가를 알게 되면 소월 시 못지않게 영랑 시를 가까이하리라 확신하네. 시간이 흐르도록 내버려둘 수밖에 없지”라는 예언과 같은 말을 남겼다.

2008년 영랑은 작고한 지 58년 만에 금관문화훈장에 추서됐다. 강진군은 2006년부터 매년 영랑 생가 일원에서 ‘영랑문학제’를 열고 있다. 생가 마당에 탐스러운 모란이 피는 계절에 맞춰 백일장과 시낭송경연대회, 연극 공연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마련된다. 올해도 영랑문학제는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린다.



주간동아 2010.04.20 732호 (p70~71)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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