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2

2010.04.20

10년 만에 느끼는 국가의 넓은 품

난민 출신 1호 한국인 아브라함 “우리나라 따뜻하고 안전, 정말 행복”

  • 이혜민 기자 behappy@donga.com

    입력2010-04-14 15: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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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 만에 느끼는 국가의 넓은 품

    에티오피아에 남은 친척들에게 해가 될지 몰라 얼굴을 공개할 수 없다는 아브라함이 법무부에서 받은 메달을 보며 웃고 있다.

    “국가에 대해 부정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 말은 하지도 않겠지만 기사에 쓰지 말아주세요. 국가라면 (국민에게) 그럴 수 있어요. 당시 법으로는 제가 ‘난민 인정자’가 아니어서 대학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었지만, 저 같은 사람 덕에 ‘청원’이 돼서 법이 바뀌었으니 그것으로 족해요. 이제는 ‘난민 신청자’도 대학에 갈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난민으로) 인정받기까지 3년이라는 시간을 빼앗겼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국민은 법 안에서만 행동할 수 있는 거잖아요. 제대로 된 법이 없는 나라도 많은데…. 이렇게 안전한 나라의 국민이 됐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좋아요.(웃음)”

    3월 19일 법무부로부터 귀화 증서를 받은 에티오피아 출신의 난민 인정자 아브라함(38·세례명)의 애국심은 남달랐다. 2001년 한국 땅을 밟고 이듬해 ‘정치적 박해’를 이유로 난민 지위를 신청, 2005년 9월 최종적으로 ‘난민 인정’ 지위를 부여받고 지난해 3월 귀화 신청을 한 뒤 예상 심사기간보다 6개월 빠른 시점에 귀화에 성공해 10년 만에 ‘국가의 따뜻한 품 안’을 느꼈기 때문일까.

    주민등록증 없어 여태 혼인신고도 못해

    한 자동차 부품업체 경영기획부 차장인 그의 퇴근시간에 맞춰 4월 5일 오후 7시 천안에서 가진 인터뷰 자리. 중형차를 타고 나타난 그는 조용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으로 가자는 기자의 말에 라이브 카페로 인도하곤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갔다. 가수의 노랫소리 때문에 재차 물어야 할 때도 많았지만 그는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유창한 모국어(한국어)로 답했다. 무엇보다 한국이 좋은 이유가 궁금했다.

    “생각해보세요. 옷을 사러 가면 비싼 옷도 있고 싼 옷도 있는데, 어떤 것을 고르시겠어요? 본인이 좋아하는 옷을 고르겠죠? 비싼 옷도 자기가 안 좋으면 그만이에요. 저는 그냥 한국이 좋아요. 우리나라는 평화적, 경제적, 생활적 의미로 안전하죠. 여성이 밤늦게 돌아다닐 수 있는 나라가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세요? 얼마 없어요. 귀화해서 무엇보다 좋은 건 ‘완전한 안전’을 갖게 됐다는 거예요. 사람들도 좋죠. ‘프리덤(freedom)’이 있다는 것도 좋고요.”



    현재 단국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4학기 과정을 밟고 있는 아브라함은 ‘(직장인으로) 월급만 받고서는 잘살 수 없다’는 생각에 주경야독(晝耕夜讀) 중이다. 에티오피아의 대학연구소에서 만난 여성을 한국으로 데려와 둘만의 조촐한 결혼식(2005년)을 올리고 다섯 살짜리 딸도 낳았지만, 주민등록증이 없어 혼인신고는 물론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채 부유(浮游)하며 살았기에 성공의 열망은 더욱 간절하다.

    “국민이 됐으니 앞으로는 수월하게 해외 비즈니스를 할 수 있을 거예요. 비즈니스를 할 만한 분야는 매우 많죠. 한국과 아프리카를 오가며 투자할 수도 있고, 무역을 할 수도 있고…. IT(정보기술) 분야를 해도 좋을 거예요. 한국 IT 회사가 만든 제품을 다시 프로그래밍해 아프리카에 판매하면 돈도 많이 벌 수 있지 않을까요?(웃음)”

    밝은 웃음 뒤에 감춰진 그의 과거는 어둑했다. 한국 땅을 처음 밟은 2001년 8월 21일을 잊지 못하는 이유도 “다시 살아난 날”인 까닭이다.

    10년 만에 느끼는 국가의 넓은 품
    아디스아바바 국립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모교에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던 아브라함은 2001년 5월, 10년 넘게 지속된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시위에 참가한 뒤 조국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한국에서 1960년에 학생들이 4·19혁명을 일으켰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에서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 시민들이 거리에 나섰지만” 군부의 대규모 검거령이 떨어진 뒤 수많은 시민이 구속되고 목숨을 잃었다. 장군이었던 그의 아버지도 파벌이 다르다는 이유로 집과 땅을 몰수당하고 감시를 받다 세상을 떠났다. 이어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의지할 곳이 없었다. 한국을 오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눈앞에 놓인 길이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건물에 불이 나면 어디로 나갈 것 같으세요? 옥상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고, 정문으로 나올 수도 있고, 비상구를 찾을 수도 있겠죠? 그래요, 사람마다 다른 방법을 찾을 거예요. 어떤 사람은 걸어서 국경을 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운 좋게 비자를 받아 미국이나 캐나다로 들어갈 수도 있어요. 당시만 해도 300, 400명이 걸어서 케냐로 들어갔죠. 그런데 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일본인 선교사와 전화연락이 돼 ‘살 길’을 찾게 된 경우예요. 에티오피아 상황을 걱정하던 선교사분이 ‘한국은 어학연수 비자를 상대적으로 쉽게 받을 수 있다’며 비자 수속을 도와주셨거든요.”

    “아프리카 오가며 무역 해보고파”

    그렇다고 한국행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케냐로 들어와 열닷새를 보내고, 다시 일본의 선교사 집에서 보름간 신세진 뒤에야 비로소 한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에서 러시아, 일본, 영국 등 세계 각국의 유학생들을 태운 버스(선문대 어학당 소속)에 오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어요. 이제는 살았구나 싶었죠. 그 후로는 그야말로 마음 편히 한글 공부만 하면서 살았어요. 고마운 선교사가 계속 학비를 대주셨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죠.”

    한국어를 배울수록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다는 그는 법무부에 ‘난민 신청’을 한 뒤 교회에서 간사생활을 하며 근근이 먹고살았다(난민 신청자는 법적으로 일할 권리가 없지만 당시만 해도 법이 엄격하게 적용되지 않아 일하다가 검거될 확률은 0%에 가까웠다). 2004년 ‘난민 인정자’가 되어 호서대 신학과에 입학할 때도 교회의 도움이 컸다. 신학과에 입학한 이유는 기도하면서 ‘에티오피아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목사가 되고 싶다’ ‘공공에게 평화를 전하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겹게 졸업하고 나니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목사가 되고 싶은 마음 반, 그렇지 않은 마음 반인 상태에서는 좋은 목사가 되기 어렵다’는 결론이 앞섰다. 졸업 후 대학시절에 영어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소기업에 채용돼 수출입 업무를 담당하면서 무역인으로서의 미래를 꿈꾸게 된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끝으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라는 그에게 국적의 의미를 물었다.

    “국적이 없다는 것은 권리도 없고, 책임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는 뜻이에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은 것과 같죠. 잃었던 국적을 찾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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