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27

2010.03.16

“약자 배려는 감사 지나친 관심은 사양”

시각장애인 1호 사시합격자 최영 씨의 사법연수원 첫날 만반의 준비 끝낸 연수원 “최대한 지원”

  • 김유림 기자 rim@donga.com

    입력2010-03-10 13:50: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3월2일 오전 9시경, 한 남성이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한 사법연수원 기숙사를 나섰다. 때가 묻지 않아 샛노란 시각장애인용 점자블록을 지팡이로 두들기며 조심스레 길을 찾아 걸었다.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곳을 지나, 꽃을 파는 행상 옆을 지나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뎠다. 5분 남짓 걸었을까. 대강당에 도착한 그는 제41회 사법연수원 입소식에 참석했다. 1급 시각장애인 최영(30) 씨가 최초의 시각장애인 사법연수생으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다.

    “요란 떨기 싫어요. 다른 사법연수생이랑 똑같이 시작하고 싶습니다. 시험에 붙고 나서도 기자들이 많이 찾아왔는데, 그때는 얼떨결에 모든 것을 다 말했지만, 이젠 부담스럽습니다.”

    언론의 과도한 관심과 여느 사법연수생들과 다르다는 사실이 부담스러웠던 탓일까, 최씨는 입소식 하루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사코 인터뷰를 거절했다. 입소식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입소식을 50분 앞둔 오전 8시30분경 사법연수원 기숙사 1층 최씨의 방을 찾았다. 형광등을 켜두지 않아 캄캄한 방에서 최씨가 포근한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다른 사법연수생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싶지 않아요. 저도 여기에 공부하러 온 수많은 학생 중 한 명일뿐입니다. 입소식이지만 가족도 부르지 않았어요. 조용히 공부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평범한 학생 중 한 명일 뿐”



    “약자 배려는 감사 지나친 관심은 사양”

    1 최씨의 학습교재는 모두 음성파일로 변환해 제공된다. 2 건물 현관문의 손잡이에 점자 표시가 돼 있다. 3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로 가는 길까지 노란색 점자블록이 설치돼 있다.

    최씨는 고3이던 1998년, 점차 시야가 좁아져 실명에 이르는 ‘망막색소변성증’ 진단을 받았다. 글씨가 희미하게 보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1년 재수해 2000년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2002년부터 사법시험에 응시하다 2005년 사법시험 스트레스로 시력이 극도로 나빠져 시각장애 3급 진단을 받았다. 책을 못 보게 됐지만, 그래도 강의 테이프와 복지재단에서 만들어준 기본서 음성파일로 공부를 계속했다. 2006년 2월 1차 시험부터는 법무부에 요청해 화면 낭독 프로그램을 이용, 컴퓨터로 읽어주는 문제에 음성으로 답하는 형식으로 시험을 치렀다. 5전 6기 끝에 2008년 12월 제50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 ‘3대 고시’를 통틀어 시각장애인으로서는 그가 최초 합격자다.

    그가 살게 될 사법연수원 기숙사에 들어서자 바닥에 죽 깔린 노란 점자블록이 눈에 띈다. 최씨의 보행을 돕기 위해 사법연수원에서 준비한 것. 보도블록을 따라 걸어가니 현관 가장 가까운 방에 닿았다. 114호, 최씨의 방이다. 사법연수원은 최씨에게 이동이 편하고, 필요시 즉시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관리실에서 가장 가까운 방을 배정했다. 보통 2인 1실이지만 최씨가 방 안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음성파일을 들으면서 공부할 수 있도록 혼자 방을 쓰게 했다.

    학습 교재는 모두 음성파일로 변환해 제공한다. 음성파일의 경우도 일괄적으로 변환하는 것이 아니라 책에 나오는 각주를 본문으로 삽입하고 중간 중간 페이지를 불러주는 등 최씨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했다. 최씨 맞을 준비에 앞장섰던 정윤형 기획교수는 “평가의 경우 음성파일로 문제를 내고 최씨가 말로 대답하는 형식으로 치를 예정이다. 시험시간을 얼마로 할지, 평가 장소는 어디서 할지 등 구체적인 방식은 계속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각종 기록이나 도면 등 이미지로 된 학습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특별히 점자 프린트도 설치했다. 교수들이 학습자료를 올려놓는 사법연수원 홈페이지 역시 시각장애인의 접근성 규칙을 준수해 고쳤다. 기숙사식당에서 최씨가 무선 리모컨 버튼을 누르면 식당 종업원이 직접 밥을 떠다주고 식사가 끝나면 혼자 기숙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보도블록까지 데려다준다.

    최씨 스스로도 사법연수원에서의 생활을 준비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 바로 사법연수원에 들어오지 않고 1년을 보냈다. 2년간의 사법연수원 생활을 위해 스스로 준비해나간 것. 최씨는 “혼자 걷는 연습과 사법연수원에서 사용할 음성 듣기 학습기계의 사용법도 익혔다”고 밝혔다.

    사법연수원에는 2010년 검사로 임관한 양익준(31) 씨 등 보행장애를 겪는 연수생은 있었지만, 시각장애인은 최씨가 처음이다. 정 교수는 “이동만 어려웠던 다른 장애 학생과 달리 학습, 평가, 생활 등 하나하나 신경 쓸 부분이 많았다. 그래도 최씨가 사법시험을 통과해 정식으로 연수생이 됐으므로 충실히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현재 각 대학 로스쿨에서 공부를 하는 시각장애인이 몇 명 있는 것으로 안다. 시각장애인이 편하게 공부할 수 있는 사법연수원을 만들어놓으면, 더 많은 시각장애인 사법연수생이 배출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법연수원은 2008년 12월, 최영 씨가 사법시험 최종 합격한 직후부터 그가 당장이라도 입소할 수 있도록 준비해왔다. 사법연수원 총무과 김학기 사무관은 “시각장애인 학생을 받아본 적이 있는 일본 사법연수원이나 국내 맹아학교를 교수들이 직접 견학하고, 시각장애인이자 특수교육 전문가인 조선대학교 김영일 교수의 특강을 듣는 등 최씨에게 최적의 학습 배경을 제공하기 위해 많이 애썼다”고 밝혔다. 장애인의 권익 보장을 주장하는 사회운동가 박종태 씨는 “우리나라의 국가기관 중 시각장애인을 위한 시설을 가장 잘 갖춘 곳이 사법연수원”이라고 말했다.

    교수·동료들 “함께 공부하게 돼 행운”

    최씨는 24명 학생과 한 조를 이뤄 공부한다. 자리가 지정된 강의실에서 최씨는 교탁과 가장 가까운 앞자리에 앉게 됐다. 그곳에서 최씨는 1학기 동안 ‘사회보장법’과 ‘법률영어 기초’ 과목의 수업을 듣는다. 최씨의 지도교수를 맡은 유승룡 교수(민사법)는 “개인적으로 매우 뜻 깊은 일이라 최대한 도와주고 싶다. 다른 학생들도 최씨 곁에서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료들도 그와 함께 생활하게 될 2년간의 연수원생활에 대한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최씨와 함께 사법연수원에 입소한 최기룡(28) 씨는 “자신이 장애인으로서 어려움을 겪었으니 약자의 마음을 더 잘 알고 인간적인 판결을 하리라 믿는다. 같은 조가 된다면 많이 돕고 싶다”고 말했다. 김각궁(28) 씨도 “최씨와 동료가 돼 반갑다”며 “그의 강한 의지를 배우고 싶다”고 전했다.

    “저도 6년간 공부해서 들어왔어요. 최씨는 장애가 있는데도 이 어려운 사법시험을 통과한 걸 보면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일 것 같아요. 그 정신력이라면 어떤 일도 극복할 수 있겠죠.”

    그토록 기다려왔던 사법연수원 입소 첫날. 최씨는 “감사하다”는 말로 이날 하루의 소회를 밝혔다.

    “오늘 하루 동안 제 주변에 관심 갖고 도와주신 분이 많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능력 있는 법조인으로 성장하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