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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호사유피[虎死留皮]의 명예로운 삶이란?

경인년 백호(白虎)의 해, 호가호위 비굴한 행동 사라지길 기원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호사유피[虎死留皮]의 명예로운 삶이란?

호사유피[虎死留皮]의 명예로운 삶이란?

1 까치와 호랑이를 그린 조선시대 민화. 2 연암 박지원의 초상화.

2010년은 간지(干支)로 경인년(庚寅年) 호랑이(범), 특히 백호(白虎)의 해다. 울산 태화강 지류인 대곡천 중류 암벽에는 청동기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호랑이 바위그림(암각화)이 있을 정도로 우리 민족은 호랑이에 대한 많은 기록을 전한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에는 초기국가 동예에서 ‘범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으로 섬겼다(祠虎以爲神)’라는 기록이 있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에는 헌강왕 11년(885) 2월에 호랑이가 궁궐 마당까지 뛰어들어 왔다는 호환(虎患) 기사가 나온다. 그리고 ‘삼국유사(三國遺事)’ 기이편 단군 건국신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쑥과 마늘을 먹었다는 그 유명한 얘기가 전해진다. 이처럼 한반도에 일찍부터 서식한 호랑이는 우리 민족과는 뗄 수 없는 영물(靈物)이다.

경인년의 간지로 본 역사적 사건으로는 고려 중기 의종 24년(1170) 8월에 무신 정중부(鄭仲夫·1106∼1179)가 숭문경무(崇文輕武) 풍조에 반발해 일으킨 정중부의 난(경인란)과 대한민국 수립 후 2년 만에 터진 동족상잔의 6·25전쟁이 대표적이다.

‘호질(虎叱)’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에 얽힌 고사도 흥미롭다.

수절과부 동리자와 내통하다 쫓겨난 북곽 선생

‘호질’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수록된 한문소설로,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의 거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쓴 글이다. 작자 본인이 절세기문(絶世奇文)이라 평가했는데, 조선중화주의(朝鮮中華主義)와 양반들의 위선적인 생활상을 준열히 질책함으로써 자신의 실학정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했다. ‘호질’은 ‘관내정사(關內程史)’ 7월28일자 기사에 연암이 북경으로 가는 길목인 옥전현(玉田縣)을 지날 때 한 가게에 들러 전사(轉寫)했다고 기술돼 있으나, 연암이 창작한 사실을 은닉하려고 익명의 중국인을 끌어들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줄거리를 보자. 어느 날 산중의 왕 호랑이가 먹잇감에 대해 악귀들과 담론을 했는데 마땅한 것이 없었다. 특히 인간을 두고 말하기를, 의(醫·의사)는 의(疑·의심)와 같으니 스스로 의심스러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험해서 많은 사람을 해쳤고, 무(巫·무당)는 무(誣·속임)와 뜻이 같으니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판이므로 이런 유형의 인간은 먹을 만한 고기가 못 된다고 했다. 그러던 중 선비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도학(道學)으로 덕망이 높은 선비 북곽(北郭) 선생이 동리자(東里子)란 아름다운 수절과부와 내통하다 과부의 아들에게 들켜 달아났는데 그만 어두운 밤이라 두엄 구덩이에 빠져 발버둥치다 기어나왔더니 큰 호랑이와 마주치게 됐다. 그런데 북곽 선생이 엎드려서 갖은 말로 호랑이를 추어올리면서 살려주십사 하고 빌었더니 호랑이가 “유(儒·유학자)는 유(諛·아첨함)와 같구나. 너희는 평소에 가장 어진 체하다가도 뒷구멍으론 온갖 추한 짓을 다 하고 일이 궁지에 몰리면 이렇게 아첨하지 않느냐”라고 꾸짖었다.

해가 뜨자 호랑이는 먹을 놈이 못 된다고 생각하고 가버렸고, 이때 북곽 선생이 머리를 드니 호랑이는 보이지 않고 농부들이 들에 일하러 나오고 있었다. 북곽 선생의 이상한 행색을 보고는 농부들이 무엇을 하고 계시느냐고 묻자 북곽 선생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중이다”라고 주제 넘는 말을 했다.

연암은 ‘호질’의 배경을 춘추시대 도덕기강이 문란한 정(鄭)나라로 설정하면서 천하무적의 호랑이는 대청황제(大淸皇帝), 비열한 북곽 선생은 청조에 곡학아세하는 한족(漢族) 지식인, 호랑이조차 두려움에 떨게 하는 비위(胃)와 죽우(竹牛) 등의 맹수는 중국 북방 유목민족(티베트, 위구르, 몽골)에 대한 알레고리로 만들어 청조 현실을 풍자했다. 이와 함께 피비린내 나는 4색 당파로 붕당정치(당쟁)를 하는 혼탁한 조선사회를 싸잡아 비판했다. 물론 소문난 절부(節婦)임에도 사실은 성(姓)이 다른 자식을 다섯이나 둔 동리자는 당시 형식적인 예치주의(禮治主義)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호사유피 인사유명’의 고사는 당(唐, 618∼907) 멸망 후 전개된 5대10국시대(907∼960)를 다룬 ‘5대사(五代史)’ 양서(梁書) 21 왕언장(王彦章) 열전에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당애제(唐哀帝)를 폐하고 스스로 후량(後梁, 907∼923)의 태조가 된 주전충(朱全忠·852∼912)의 부하로 왕언장(862∼923)이란 우직한 장수가 있었다. 그는 전장에 늘 무게가 100근이 넘는 2개의 철창을 갖고 나갔는데 회초리처럼 휘둘러서 사람들은 그를 왕철창(王鐵槍)이라 불렀다.

호사유피[虎死留皮]의 명예로운 삶이란?

60년 전 경인년에 발발한 6·25전쟁.

회유 뿌리치고 죽음 택한 왕언장

주전충이 후량의 태조라고 하나 그가 차지한 영토는 중원의 제한된 지역에 그쳤고 주변 군웅이 호시탐탐(虎視眈眈) 그를 노렸다. 그 가운데 산서(山西)를 무대로 한 진(晋)나라 왕 이존욱(李存)의 위협이 대단했다. 그는 당말 황소의 난을 진압한 애꾸눈인 독안룡(獨眼龍) 이극용(李克用)의 아들로 하북(河北)에서 후량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그때 후량의 조정은 당쟁으로 시끄러웠다. 그러자 왕언장은 “이번 전쟁에서 이기고 살아서 돌아온다면 궁중에서 썩은 구더기처럼 우글거리는 고관대작을 모조리 처치하겠다”고 했으나 초토사(招討使·변란이 일어난 지방에 파견한 무관직)로 출전했다 크게 패하여 파면됐고, 그 후 이존욱의 군사가 침입했을 때 또다시 기용되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존욱은 왕언장의 용맹함을 아까워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했으나 그는 “아침에 양나라를 섬기고 저녁에는 진나라를 섬기는 일은 할 수 없소”라고 제의를 거절하고 사형을 택했다.

왕언장은 평소 “표범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豹死留皮 人死留名)”라는 고사를 입버릇처럼 자주 인용했다(우리나라에서 ‘표(豹)’가 ‘호(虎)’로 바뀜). 왕언장은 일국의 장수로 지켜야 할 명예만큼은 소중히 명심하고 있었다.

경인년 2010년은 21세기 10년의 마지막 해로 6월에 풀뿌리 민주주의의 심벌인 지방선거가 치러진다. 권세가의 집에 드나들면서 정치적 로비 행위를 빈발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이러한 시점에 조선의 조종성헌(祖宗成憲)인 ‘경국대전(經國大典)’ 형전 금제(禁制) 조항에 명시된 ‘분경금지법’이 주목되는데, ‘분경’이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준말로 ‘분주히 쫓아다니며 이익을 다툰다’는 뜻이다. 경국대전에선 ‘분경하는 자는 장(杖) 100대, 유배 3000리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경인년 새해에는 여우가 호랑이의 위엄을 빌려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비굴한 삶이 아닌 ‘호사유피(虎死留皮)’의 명예로운 삶을 택하는 한 해가 돼야겠다. 그리고 우리 모두 까치와 호랑이 그림인 희보도(喜報圖) 한 점씩을 갖는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주간동아 2010.01.19 720호 (p66~67)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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