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19

2010.01.12

2002 월드컵, 협력과 경쟁의 추억

유치 전부터 대회 끝날 때까지 신경전 … 2022년 단독 개최 꿈 이루나

  • 이웅현 도쿄대 박사·국제정치 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입력2010-01-07 1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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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월드컵, 협력과 경쟁의 추억

    2002 월드컵 개막식. 오랜 악연 때문에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할 듯하던 두 나라가 낙심으로 시작해 환희로 끝맺는 드문 공감대를 형성한 시기였다.

    한국과 일본이 강화도에서 불행한 만남(1876년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가진 지 꼭 120주년이 되던 1996년 5월31일. 알프스 산맥 저편의 호반 도시 취리히에서 타전된 소식이 지구 반대편 동쪽 끝 두 나라의 2억 인구를 실망스러운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이들을 바라보며 역시 침묵 속에서 선망의 눈길만 보내야 했던 중국의 13억 인구를 포함하면, 전 세계 인구의 4분의 1이 순간적이긴 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심리적 패닉 상태에 빠졌다.

    2002년 월드컵 본선 한일 공동개최. 한국인들은 (1966년의 북한을 포함해) 월드컵 본선에 5번이나 진출한 ‘축구 민족’이 왜 그때껏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나라와 축제를 준비해야 하는지 의아해했다. 일본인들은 축구의 국제화에서 한발 앞서나간 경제대국이 왜 뒤늦게 유치전에 뛰어든 발전도상국과 함께 호스트가 돼야 하는지 불만스러워했다. 본선 진출 횟수와 축구의 세계화, 경제의 선진화로 치면 월드컵대회 본선은 남미와 유럽이 독점해야 할 것이라는 사실을 이 두 나라는 애써 외면했다.

    강자에 편승 전략 vs 잠재적 2인자 규합

    사단은 그보다 10년 전,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 아벨랑제의 입에서 시작됐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이 FIFA의 제왕은 2002년 월드컵을 아시아에서 열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분명 일본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홍콩과의 아시아 지역예선에서 패배하고 전국적인 소요사태를 경험한 중국이 바로 그해부터 축구 선진화에 박차를 가했고, 역시 이 대회 아시아 지역예선 최종 라운드에서 일본을 연거푸 격파한 한국이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출전 이후 32년 만에 본선 무대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보지 못했다.

    ‘긴 것에는 감겨줘라’(강자를 존경하고 따르라는 의미)는 속담에 충실한 일본은 즉각 아벨랑제에 편승했다. 이는 국제무대에서 강자에 편승하는 일본의 외교 스타일을 따른 것이나 다름없다. 옛 일본은 1902년 당대의 세계 제국 영국과 동맹을 맺었고, 1939년 유럽에서 시작된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것처럼 보이자 이듬해 “버스를 놓치지 말자”는 구호를 외치며 독일을 친구로 삼았다. 패전 후 일본의 성공 배경에도 미국이라는 힘센 친구가 있었다. 일본은 FIFA의 ‘긴 것’에 휘감겨들면서 1991년 대회 유치를 공식 선언했고, 1993년에는 J리그의 돛을 높이 올렸다.



    축구에 관한 한 아시아의 전통적 ‘맹주’임을 자부하던 한국은 일본보다 2년 늦은 1993년 대회유치위원회를 만들었고, 스포츠신문 기자들은 한국의 프로축구리그를 일본의 그것에 빗대 K리그(정식 명칭이 된 것은 1998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후발주자의 외교적 선택은 당연히 ‘잠재적 2인자들’의 규합이었다. 유럽축구연맹의 요한슨 회장을 비롯한 아시아, 아프리카의 표들을 끌어모으면서 한국은 강자 독식의 국제무대에 새로운 외교실험과 학습을 병행해 나아갔다. 아벨랑제는 이러한 행위가 “FIFA를 깨는 짓”이라며 공개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FIFA의 1인자도 결국 기울어진 균형추 앞에 굴복했고, FIFA는 사상 초유의 월드컵 본선대회 아시아 개최, 그것도 공동개최를 결정했다.

    ‘절반의 성공’에서 공동의 승리로

    독식을 희망하던 일본에는 ‘절반의 실패’ 또는 “최악의 시나리오”(모리 겐지, J리그 회장)였다. 뒤늦게 뛰어든 한국으로서는 사실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구원(舊怨)의 경쟁국에 완벽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떨쳐내지 못했다.

    근대화의 선발주자와 후발주자로서 1876년 첫 만남을 가진 두 나라 사이에 남은 것은 불쾌한 기억뿐이었다. 120년 동안 경쟁의 즐거움보다는 독주(獨走)와 완승만 좇던 두 나라는 그럼에도 서로 다른 외교 스타일을 견지한 끝에 1996년 선의의 경쟁과 화합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절반의 승리’가 아닌 ‘공동의 승리’를 거둔 셈이었다.

    미증유의 월드컵 본선대회 공동개최를 성공으로 이끌고자 이후 2002년까지 한국은 6000만 달러를, 일본은 7500만 달러를 투자했다. 건전한 경쟁과 협력을 위한 비용을 들이면서도 개최하는 그해까지 신경전도 그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대회 명칭에 어느 나라가 앞에 와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첫 신경전에서는 한국이 승리했다. 곧 이은 결승전 유치전에서는 일본이 승리했다. FIFA의 공동개최 홍보사진에 나타난 축구경기장 조감도가 ‘일(日)’자를 연상케 한다며 한국이 항의하기도 했다. 영국의 ITV가 월드컵 뉴스 보도의 테마뮤직으로 일본을 소재로 한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어떤 갠 날’을 쓰려 한다는 소식에 영국의 한국인들이 분노했다.

    그럼에도 1996~2002년의 6년은 오랜 악연 때문에 감정의 공유가 불가능할 듯하던 두 나라가 낙심으로 시작해 환희로 끝맺는 드문 공감대를 형성한 시기였다. 19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일본-이라크전 추가시간에 터진 오만 자파르의 동점골 덕분에 한국이 일본을 제치고 본선 진출을 확정짓자(상자기사 참조), ‘도하의 비극’ ‘카타르의 기적’이라며 경쟁의식과 경멸을 감추지 않던 두 나라가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예선에서는 ‘함께 가자! 프랑스로’라는 공동의 구호를 내걸었다.

    2002 월드컵, 협력과 경쟁의 추억

    2002 한·일 월드컵에서 골을 넣은 박지성이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달려가 품에 안기고 있다. 이 대회에서 한국의 4강 진입은 축구의 ‘탈아입구’를 꿈꾸던 일본을 무색하게 했다.

    동아시아 4개국 월드컵 공동개최 어떨까?

    역사 논쟁보다는 ‘축구’를 화제로 만나는 양국 국민의 수도 급증했다. 2002년에는 한일 정상이 공동개최를 더 나은 양국관계를 만들기 위한 가교로 삼자고 선언하기도 했다. 최대의 에필로그는 2005년 ‘한일 우정의 해’ 선포와 상호간 입국비자 면제조치였다. 2002년 월드컵 개막 직전 홍콩의 ‘파 이스턴 이코노믹 리뷰’지는 월드컵 한일 공동개최를 ‘한 맺힌 대결(Grudge Match)’이라고 표현하면서도, 오랜 원한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는 계기가 되리라고 전망했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던 것이다.

    일본 vs 한국. 인구 3대 1, 국토면적 4대 1, 1인당 국민소득 2대 1. 결정적으로 역사의 가해자와 피해자다. 어느 모로 보나 균형이 맞지 않는 동아시아의 숙적도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협력적 경쟁을 하면 과거지향적인 정서의 상당 부분이 미래지향적 상호이해로 바뀌리라는 점을 1996~2002년의 짧은 협력의 역사는 보여줬다. 냉전과 열전 사이에서 백안시하기만 하던 두 나라가 협력과 경쟁의 성공사례를 만들어낸 것이다.

    현재 한국은 2022년 월드컵 본선대회 유치를 희망하고 있다. 44년 만에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는 북한, 1986년 축구 근대화를 선언하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낸 중국, 2002년 공동개최를 한국과 함께 한 일본. 모두가 잠재적 경쟁국이 될 것이다. 그런데 6년 협력의 성공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한 우리가 유치전에서 치러야 할 출혈 대신 ‘동아시아 4개국 월드컵 공동유치’, 즉 범아시아인의 축구제전 개최라는 혁명적 선택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한국과 일본 사이의 협력과 우호, 건전한 경쟁의 경험을 동아시아 전체로 파급시킬 수 있지 않을까.

    꿈이라고 해도 좋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은 공동의 ‘꿈’을 일궈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것이 2002년 붉은악마들의 함성 아니었던가.

    축구와 정치는 한국이 한 手 위?

    한국, 월드컵 4강·직선제 쟁취로 日 ‘탈아입구(脫亞入歐)’ 무색


    2002 월드컵, 협력과 경쟁의 추억
    “구습을 고집하고 문명의 수용을 거부하는 한국과 중국의 문명개화를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여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여기서 벗어나 서양의 문명국가들과 진퇴를 함께하고, (겉으로는 몰라도) 마음으로는 동아시아의 악우(惡友)를 사절하자.”

    1885년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시아를 무시하고) 유럽을 문명의 척도로 삼아 배우자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이다. 이 원조 보수의 논리는 일본 축구인들의 의식까지 지배했다.

    이미 1970년대부터 유럽과 남미의 선진축구를 배우는 데 주력하던 일본은 1990년대 J리그의 출범과 함께 노골적인 서구 편향 기치를 내걸었다. 멕시코 월드컵 득점왕 리네커(영국), ‘하얀 펠레’ 지코(브라질)를 비롯한 유럽과 남미의 ‘선진’ 축구스타들을 J리그 선수로 대거 영입하면서 ‘축구의 세계화’를 지향했다. 월드컵 본선 무대에 연속 출사표를 던지는 한국 축구를 우회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축구에 관한 한 한국은 일본의 천적이자 악우였다. 일본에 선진축구 열풍이 불던 1970년대에도 한국은 아시아의 각종 대회를 석권하면서 ‘토종’ 축구 스타일을 견지했다. 비서구적이고 비과학적이지만 나름대로는 역동적인 한국 축구 때문에 일본은 1980년대 이후에도 월드컵 본선 진출의 꿈을 번번이 접어야 했다.

    특히 1981년을 제외하고 1972년부터 1984년까지 매년, 그리고 1991년까지 간헐적으로 개최된 한일축구정기전에서는 15전10승3패2무로 한국이 압도적 우위를 지켰고, J리그 출범과 함께 정기전도 열리지 않게 됐다. 축구의 ‘탈아입구’였다. 1993년 10월25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브라질 유학파 미우라가 결승골로 한국을 침몰시키자 한국은 이날을 ‘제2의 국치일’로 명명했고, 일본의 탈아입구 전략은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불과 사흘 뒤 이라크가 일본의 발목을 잡으면서 일본 축구계는 ‘아시아 극복’의 중요성을 되씹어야 했다. 축구의 탈아입구를 ‘혁명적으로’ 실현한 것은 오히려 2002년 월드컵 4강 한국이었다.

    ‘혁명적인’ 변화는 한국 축구뿐 아니라 한국 정치의 전유물이다. 1987년까지 군부통치 아래 신음하던 한국은 대통령 직선제와 민주주의를 쟁취하면서 축구의 역동성뿐 아니라 정치변화의 다이내미즘까지 과시하고 나섰다.

    일본의 젊은이들이 안정적인 서구적 정치 스타일과 후기 산업사회의 평화를 만끽하는 동안 한국의 청년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거리에서 피를 흘리고 최루탄 가스를 마셔야 했다(사진). 이렇게 피의 대가로 얻은 민주정치의 역동성은 일본 정치의 무미건조함과 크게 대비됐다. 일본의 ‘주어진’ 민주주의는 더 이상 한국인의 선망의 대상이 아니었다. 일당 장기집권체제에서 정치에 무관심해진 일본인들은 지도자를 자기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정치체제를 ‘혁명적’으로 쟁취한 한국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축구와 1980년대의 정치. 많은 사람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고 승패를 결정지어야 하는 이 두 분야에서 ‘다이내믹 코리아’는 (자만심을 섞어 말하면) 일본에 이제 탈(脫)의 대상이 아니라 극(克)의 대상이 돼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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