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8

2009.10.27

탕 탕! … “10·26엔 가슴이 뛴다”

안중근 의거, 청산리대첩, 박정희 시해 … 한국사 물줄기 바꿔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10-21 11: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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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탕 탕! … “10·26엔 가슴이 뛴다”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총을 발사한 안중근. 그가 남긴 200여 점의 유묵엔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과 무명지 첫 마디가 없는 왼쪽 손바닥 장인이 남아 있다.

    20세기의 10월26일은 한국인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중차대한 역사적 연표다. 한말 안중근(安重根·1879∼1910)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1841~1909) 저격, 일제강점기 청산리대첩(1920년 10월21∼26일)의 마지막 전투, 유신정권 말기 김재규의 박정희 시해 등이 모두 10월26일에 발생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은 공교롭게도 총소리가 울렸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고, 이 10·26의 총성은 한국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됐다. 특히 1909년의 10·26은 올해로 100주년이 되는 만큼 역사적 의의가 더욱 크다 하겠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9시30분, 하얼빈(哈爾濱) 역사(驛舍)를 울린 총성은 바로 대한의 아들, 대한의용군 참모중장 안중근이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발사한 구국의 총성이었다. 1909년 3월 안중근을 비롯한 12명의 단지동맹(斷指同盟) 동지는 왼손 무명지 첫 마디를 잘라 그 피로써 대한독립을 맹세하고 일제 고관과 친일파 암살을 단행하기로 결심했다. 그 후 10월경 이토가 러시아의 대장대신 코코프체프(Kokovsev. V. N)와 회견하기 위해 만주에 온다는 것을 알고 거사를 준비했다.

    하얼빈 울린 구국의 총성 그리고 만세 삼창

    단지동맹은 뤼순(旅順)역을 출발한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가 어느 역에 정차할지 몰랐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대동공보사(大東公報社)를 통해 하얼빈역에 정차한다는 첩보를 접하고 동지 중 우덕순(禹德淳)과 조도선(曺道善)은 기차의 정차역인 채가구(蔡家溝)역, 안중근은 하얼빈역에 배치돼 저격하기로 계획했다. 그런데 당일 열차는 채가구역을 통과해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10대 때부터 궁사(弓射)로 실력을 연마한 명사수인 안중근은 5m 거리에서 7.65mm 구경 7연발 브라우닝 M1900 권총을 발사해 이토에게 3발을 명중시키고 나머지 4발은 주변 인물에게 발사한 후 러시아어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삼창했다. 곧 이토는 열차로 옮겨져 러시아 의사와 일본인 의사의 진찰을 받았는데 3발의 실탄 중 제1발은 심장, 제2발은 폐, 마지막 1발은 복강을 관통했다.

    일설에 따르면 잠시 의식을 회복한 이토가 “누가 또 부상을 당했는가, 누가 총을 쏘았는가, 구두를 벗겨달라”고 한 뒤 “조센징 바가야로”를 내뱉고는 오전 10시경에 절명했다고 한다. 당시 안중근은 이토가 대한의 주권을 침탈한 원흉이며 동양평화의 교란자이므로 대한의용군 사령 자격으로 총살한 것이지, 안중근 개인 자격으로 사살한 것이 아니라고 거사 동기를 분명히 밝혔다.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할 때까지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뤼순 평화도시를 구상하고 동북아 평화체제를 위해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집필하면서 200여 점의 유묵을 남겼는데, 서명 부분에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을 쓴 뒤 낙관을 사용치 않고 무명지 첫 마디가 없는 왼쪽 손바닥을 대신 찍었다. 죽음을 며칠 앞둔 안중근은 정근(定根)·공근(恭根) 두 아우에게 “내가 죽거든 시체는 우리나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반장(返葬·객지에서 죽은 사람을 그가 살던 곳이나 고향으로 옮겨 장사를 지냄)하지 말라.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뤼순 감옥의 형장에서 순국했다. 안 의사의 의거에 대해 일본 교과서는 대부분 이 사실을 기술하지 않고 소수의 교과서만 아주 간략히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이름을 빼고 ‘한국인’ ‘한국의 청년’이라는 익명을 쓰고 하나같이 ‘암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이 사건을 한국의 자객이 우발적으로 저지른 사건처럼 조작했다.

    그리고 일본 교과서 대부분은 일제의 한국 병탄(합방조약) 사실을 회피하는데, 그나마 언급한 교과서도 한국인이 아무런 저항 없이, 또 일제의 무력행사 없이 조약이 체결된 것처럼 기술했다. 더욱 분노가 치미는 것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사살이 한국 병합의 동기가 된 것처럼 왜곡한 대목이다. 1948년 4월 남한의 김구·김규식과 북한의 김일성·김두봉 간의 이른바 4김(金) 비공식 회담에서 만주 뤼순에 있는 안중근 유골 국내 이장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나, 북한 측의 황해도 고향 이장론과 남한 측의 서울 이장론이 대립하다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유해 발굴 실패 … 국립묘지에 허묘도 없어서야

    탕 탕! … “10·26엔 가슴이 뛴다”

    2006년 1월 하얼빈 역에 세워졌다 철거한 안중근 의사 동상. 최근 부천에 세우기로 했다.

    지난해 3월 대한민국 정부는 건국 후 처음으로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최근 뤼순순국선열기념재단, 안중근의사숭모회, 안중근평화재단 등을 중심으로 유해 발굴 작업이 추진되고 있지만 너무나 오랜 시간이 지나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몇 해 전 필자는 뤼순(현재는 다롄시 뤼순구구)을 찾아 다롄(大連)대학 중한문화교류연구소 소장 유병호 박사의 소개로 만주족 출신인 조중화(趙中華) 뤼순일아감옥구지진열관(旅順日俄監獄舊址陳列館) 관장의 안내를 받았다.

    그의 안내로 안 의사가 재판을 받았던 고등법원 구지(舊址)와 수감됐던 뤼순 일아감옥을 둘러봤다. 뤼순 일아감옥은 당대 세계 최대 규모의 감옥으로,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申采浩·1880∼1936) 선생도 일제의 병보석을 마다하고 옥사하신 곳이라 우리로서는 통곡할 만한 역사 현장이다.

    감옥에 죄수복을 입은 신채호 선생과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걸려 있어 더욱 가슴이 미어졌다. 안 의사가 사형된 곳을 복원해 만든 기념관도 봤는데 안 의사의 휘호 10여 점과 ‘동양평화론’ 원고, 1909년 12월13일 시술(始述)된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안 의사의 자서전으로 ‘응칠’은 그의 아호)가 전시돼 있었고 옆방에는 형장을 복원해 천장에 밧줄을 매달아놓았다.

    하얼빈 역두(驛頭)에 안 의사의 동상과 의거에 대한 안내판이 없는 게 가슴 아프지만 정작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안 의사의 허묘조차 없다는 사실에 더욱 심한 자괴감에 빠져든다. 오는 10월26일은 안 의사가 의거하신 지 100주년 되는 날이다.

    서거 후 100년이 다 되도록 유해를 찾지 못한 후손들이 더욱 면목 없는 역사의 죄인이 되고 말았으니, 8월 말 하얼빈의 한 백화점 창고에서 3년8개월 동안 햇빛을 보지 못했던 안 의사 동상이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 동상은 중국에서 사업하는 이진학 씨가 사비를 들여 2006년 1월 하얼빈역 주변에 세웠지만 중국 정부가 ‘외국인 동상을 야외에 전시할 수 없다’는 규정을 내세우는 바람에 자진 철거한 뒤 그가 운영하는 백화점 창고에 보관했다가 지난달 국내로 들여왔다.

    당초 서울 효창공원에 동상을 세우려 했으나 ‘학술·예술적 가치가 검증되지 않았다’는 국가보훈처의 반대로 무산됐다. 최근에야 경기 부천시에서 동상을 유치하기로 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우리 조국은 안 의사가 염원한 대로 일제 식민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분단되어 2개의 나라가 들어선 지 60여 년이 지나고 있다. 아, 안 의사가 바라던 대한독립의 날은 정녕 언제 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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