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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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대학은 新빈곤층 양성소?

대학등록금 파격 인상 후 학자금 대출 허덕 … 세계화 열풍에 유럽 공교육 무너진 영향

  • 코벤트리=성기영 통신원 sung.kiyoung@gmail.com

    입력2009-10-21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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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 대학은 新빈곤층 양성소?

    영국 대학생들은 학자금 대출과 취업난의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

    “대학 다니는 동안 아르바이트를 두 개나 했다.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 늘 허덕거렸지만,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 대학을 갓 졸업한 내겐 3만 파운드(약 6100만원)의 빚만 남았다.”

    “등록금 인상을 추진하는 정부는 부모님이 내 학비를 어느 정도 대주리라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대준 돈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졸업생 1인당 4600만원 ‘빚’ 예상

    얼마 전 영국 공영방송 BBC 웹사이트에 올라온 대학생들의 하소연이다. 최근 발표에 따르면 올 가을 입학 예정인 영국 대학 신입생(대학원 포함)은 졸업과 동시에 1인당 평균 2만3000파운드(약 4600만원)의 부채를 짊어질 것으로 예상됐다. 대학 졸업과 함께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는 현실은 2006년 영국 정부가 대학등록금 시스템의 대수술에 나섰을 때부터 예상됐던 것.

    당시 토니 블레어 총리는 야당 및 대학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등록금 대폭 인상 방안을 관철했다. 그전까지만 해도 영국의 대학등록금은 연 1100여 파운드 수준에 묶여 있었다. 각 대학 스스로 등록금을 결정할 수 있는 재량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영국 대학의 경쟁력이 미국 대학에 비해 점점 뒤떨어진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재정난을 호소하는 대학이 늘어나자 블레어 정부는 등록금 제도 개선으로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새로운 제도의 초점은 등록금 결정 권한을 대학에 주는 대신 약 3000파운드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것. 하지만 대부분의 대학이 상한선 근처까지 등록금을 부과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등록금은 3배 가까이 인상됐다. 정부가 추진한 등록금 개편 방안의 의회표결을 앞두고 여론은 크게 갈라졌다. 대학들은 ‘수익자 부담’ 원칙을 내세우며 등록금 인상이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야당 등은 대학교육의 혜택이 결국 국민경제 전체에 돌아갈 것이기 때문에, 대학 재정은 국가 부담의 원칙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후자가 전통적인 유럽 대학의 학풍을 계승한 논리라면 전자는 세계화 바람이 불어닥친 이후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지기 시작한 영국 대학들의 중흥을 꾀하자는 것인 셈이다. 의회표결 결과는 정부 안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야당인 보수당과 자유민주당은 반대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심지어 집권노동당 내에서도 70표가 넘는 반대표가 나왔다. 노동당이 스코틀랜드 출신 의원들의 지지를 끌어모아 턱걸이한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대신 블레어 정부는 일시적인 등록금 납부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학자금 및 생활자금 대출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이른바 ‘소득연계형 등록금 후불제’의 도입이다. 이 제도의 초점은, 당장 등록금 내기 어려운 학생들에게 정부가 저리 대출을 알선해주고, 졸업 후 직장을 구해 일정액 이상의 소득이 생기는 시점부터 이를 나눠 갚게 한 것이다.

    현재는 1만5000파운드의 연봉을 받는 시점부터 상환하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대졸 평균초임에 해당하는 1만8000파운드의 연봉을 받는다면 매주 5.19파운드씩 갚으면 된다. 취업에 실패하거나 직장을 잃으면 상환의무도 자동 중단된다. 그러나 학생들 처지에서 보면 이 제도에는 문제가 있다. 상환의무가 중단되는 기간에도 이자가 계속 누적될 뿐 아니라, 대출받은 학자금으로 기숙사비, 생활비, 교재비 등을 다 부담하기엔 어림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정부는 등록금을 인상하는 대신 저소득층 자녀 장학금 혜택을 확대하도록 의무조항을 달았다. ‘저소득층’의 기준은 부모의 소득수준을 따른다. 그러나 문제는 영국 부모는 한국 부모처럼 자녀 학비를 대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모 소득이 괜찮은 수준이라 저소득층 장학금 수혜대상에서 제외되면서도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어정쩡한 학생들은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과 달리 부모 지원 없어

    졸업 후 취직해 학자금 대출을 스스로 갚느라 애쓰는 사회 초년병 가운데는 ‘생떼를 써서라도 부모 도움을 받을 걸 그랬다’며 후회하는 이도 적지 않다. 게다가 최근엔 경기침체로 일자기 구하기가 쉽지 않다. 영국 청년실업률은 전체 실업률의 두 배를 넘어선 상태. 한편으로는 대학교육의 미래와 관련한 근본적인 질문이 정부를 괴롭히고 있다. 비싼 등록금 때문에 대학 진학률이 떨어져 결국 미래 국가경쟁력의 질적 저하를 불러오지 않겠느냐는 것.

    대졸자들이 대학원 진학 등 더 많은 연구기회를 버리고 너도나도 빚을 갚기 위해 취업전선으로만 몰려가지 않겠느냐는 걱정스런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아직까지 이런 우려가 현실화했는지 결론짓기는 이르지만, 등록금 인상 이후 대학 진학률은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변화는, 시험기간을 제외하곤 빈자리가 넘쳐나던 대학 도서관에도 면학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등록금을 둘러싼 논란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다. 정부 일각에서는 2010년 이후 3000파운드의 등록금 상한선마저 없애려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일부 대학은 총장 연석회의 등을 잇따라 개최, 등록금 추가 인상 필요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는 등 여론몰이에 나섰다. 물론 등록금 추가 인상을 위해서는 의회 상하원 표결을 또 한 번 거쳐야 한다. 전통적으로 정부 주도의 공교육 시스템을 강조해온 영국에서 ‘교육의 시장화’라는 근본적 명제를 놓고 대논쟁이 예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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