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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 ‘시골의사’의 책장

‘쿨’한 여인, 우리 사회 위선 조롱

정이현 소설집 ‘낭만적 사랑과 사회’

‘쿨’한 여인, 우리 사회 위선 조롱

‘쿨’한 여인, 우리 사회 위선 조롱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직접 영화를 본 적 없는 필자가 여태 제목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일단 잘 지은 제목인 듯하다. 마초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영화 제목에서 떠올려지는 여주인공의 이미지는 유혹적이지만 치명적인 ‘팜므파탈’이나 요부(妖婦)의 느낌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훨씬 리듬감 있고 발랄한 악녀 이미지에 가깝다.

‘발랄한 악녀’와 ‘치명적 요부’의 차이가 무엇인지 되묻는다면 설명하기 곤혹스럽지만, 상징(symbol)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원형(pro 혹은 proto type)에 가깝기 위해 아무리 애써도 원형을 재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상징체계’를 이용한다. 즉, 상징은 원형을 복제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궁극에 이를 때 원형을 대신하는 이미지인 셈이다.

그러니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상징적인 제목도 기존의 ‘악녀’ ‘요부’가 아닌 다른 이미지를 가리키는 듯한데, 영화를 보지 않은 필자가 그에 대해 더 이상 답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하다.

어쨌든 정이현의 소설을 읽으면 ‘달콤, 살벌한 연인’이라는 영화제목이 떠오른다. 그만큼 그의 작품에서 다루는 주인공들의 세계가 기존 방식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운 세계라는 뜻이다. 그 점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소설집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낭만’이란 국어사전에 “실현성이 적고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심리상태, 또는 그런 심리상태로 인한 감미로운 분위기”라고 설명돼 있다.

즉 이 작품은 실현성이 적지만(‘없지만’이 아니라는 데 주의해야 한다. 실현 가능성이 없다면 ‘망상’이 된다), 매우 정서적이고 이상적인 눈으로 쓴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라는 뜻이 된다. 그러고 보면 이 작품집의 제목도 ‘달콤, 살벌한 연인’ 못지않게 잘 붙인 제목이다.



소설집은 낭만적 사랑과 사회, 트렁크, 소녀시대, 순수, 무궁화, 홈드라마, 신식 키친, 이십세기 모단 걸-신 김연실전 등 8개의 중·단편으로 구성돼 있다. 제목을 대강 일별하기만 해도 주인공들이 여성이라는 점은 쉽게 알 수 있다. 물론 여성 작가의 작품집이라는 점에서도 그 점은 짐작할 수 있다. 한데 이 책의 주인공들은 다른 여성 작가들의 작품 주인공과는 다른 독특한 개성을 공유한다.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나쁜 여자, 즉 악녀라는 점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바쁜 남자와 만나 눈물 한 바가지를 흘리며 패퇴하는 나약한 주인공이 아니다. 이 책의 주인공을 만난 남자들은 대개 채 ‘일합’도 겨루기 전에 일패도지(一敗塗地)하고 만다. 8개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희생자로 등장하는 이가 ‘이십세기 모단 걸-신 김연실전’의 주인공 김연실인데, 그녀 역시 당시의 잣대로 보면 패배자로 보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책이 ‘페미니즘 문학’처럼 단박에 들여다보이는 ‘어떤 주장’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제목에서 다시 드러난다. 책의 제목은 ‘낭만적 사랑’이 아닌 ‘낭만적 사랑과 사회’다. 그러니 작가는 일견 실현 불가능한 듯 보이는 특별한 사랑(혹은 여자) 이야기로 ‘동시대의 사회’를 재조명하거나, 최소한 드러내고 싶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물론 필자의 생각이지만 대저 동시대의 예술이란 작가의 의도와 감상자의 의도가 일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니만큼 그렇게 읽어도 무방하리라 본다. 앞서 말한 대로 주인공은 대부분 나쁜 여자다. 작가는 남편을 세 번이나 살해하고도(정황상) 뻔뻔하게 불운이었다고 말하는 여자, 남성 중심의 마초 사회에서 지배당하거나 애써 지배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이용하는 여자, 가짜 납치극을 꾸미는 여고생, 사랑이 필요조건에서 제외돼버린 ‘결혼’ 제도에 굳이 맞서지도 버티지도 않으며 타협하는 남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쿨’한 여인, 우리 사회 위선 조롱

박경철
의사

우리 시대가 갈구하는 잃어버린 ‘도덕률’에 대해 가가대소(呵呵大笑)하며 “영구 없다!”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정이현의 작품은 ‘매우 정서적이며 이상적으로 사물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이고 정서적인 눈으로 애써 현실을 부정하려는 우리 사회의 위선적 행태를, 이른바 ‘쿨’하고 ‘뻔뻔한’ 여인을 통해 조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특히 정이현 특유의 감미롭지만 날카로운 문체, 감각적이지만 냉소적인 얼개는 독자들이 독서의 여러 맛을 골고루 맛볼 수 있게 해준다. 자칫 ‘대중성’과 ‘문학성’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듯한 정이현의 소설이 탁월하게 여겨지는 것 또한 바로 이런 점 때문이기도 하다.

http://blog.naver.com/donodonsu



주간동아 2009.09.22 704호 (p9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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