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55

2008.10.07

투자은행 망해도 핵심인력은 귀하신 몸

한국·홍콩·일본 금융사들 스카우트 전 … 대형 프로젝트 수행자들 희소가치 높아

  • 이규창 머니투데이 기자 ryan@moneytoday.co.kr

    입력2008-09-29 15: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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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자은행 망해도 핵심인력은 귀하신 몸

    영국 런던의 메릴린치 사무실에서 한 직원이 통화하고 있다(왼쪽). 미국 뉴욕 본사 리먼브러더스 직원들이 짐을 챙겨 나오고 있다.

    JP모건, 모건스탠리, 메릴린치, 리먼브러더스, 베어스턴스. 세계 금융을 주름잡는다는 미국의 5대 투자은행(IB·Investment Bank) 이름이다. 이중 세 곳은 이미 무너졌고 나머지 두 회사는 IB 타이틀을 버리고 은행지주회사로 전환했다.

    ‘신이 내린 직장’으로 통했던 글로벌 IB가 몰락하면서 국내 1000여 명의 ‘귀족 근로자’들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지난해 호황을 맞고 신생업체의 대거 진출로 최고 몸값을 자랑하던 증권맨들 사이에서조차 이들은 귀족으로 통했지만 이젠 세상이 변했다.

    천정부지 몸값 등 IB 신화는 깨져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으로 몸값이 하늘 높은 줄 모른다는 금융업계에서도 상위 1%에 해당하는 IB 인력들은 특별 대우를 받는다. 30대 중반에 기본급만 1억원이 넘고 성과급에다 스톡옵션(주식매수선택권)까지 보장받는 이들의 연봉은 상상을 초월한다. 보수적인 은행에서도 IB 인력에게는 파격적인 대우를 보장해주지만 이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경쟁사들이 줄을 선다.

    이들이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이유는 리먼브러더스와 같은 외국계 대형 IB 출신이란 타이틀 때문이다. 십수 년간 최고로 군림해온 글로벌 기업에서 한국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대형 프로젝트를 수행한 인력은 그만큼 희소가치가 높다.



    게다가 금융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한국은 글로벌 IB에 사대주의적인 태도마저 보인다. 정부가 금융산업 발전의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는 대형 투자은행 육성도 글로벌 IB에 대한 공경심에서 비롯된다. 외국계 IB 출신 인사들이 산업은행 총재를 비롯한 요직을 차지하는 것도 무시 못할 흐름을 반영한다.

    그러나 주요 외신들이 ‘미국 중심 자본주의가 몰락했다’며 격렬한 반응을 보일 만큼 충격적이었던 리먼브러더스의 파산보호 신청으로 유발된 글로벌 IB의 붕괴는 IB 신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뉴욕의 리먼 본사 앞에는 방송사들이 중계차를 대기시키고 짐을 챙겨 나오는 직원들을 구경거리로 카메라에 담았다.

    리먼의 북미법인 직원 1만명은 영국 바클레이로, 아시아·태평양 법인의 3000여 명은 일본 최대 증권사인 노무라로 옮기게 됐지만 여전히 2만여 명의 진로가 불투명한 상태다. 100명이 채 안 되는 한국법인은 노무라의 인수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영국계 HSBC의 한국법인은 최근 외환은행 인수를 포기하면서 직원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어나고 있다. 론스타로부터 60억 달러에 외환은행을 인수한 뒤 한국의 소매금융 분야에 뿌리를 내리려던 HSBC의 기존 처지가 크게 변했기 때문이다. 최근 대표이사가 직접 직원들에게 ‘모두 함께 계속 갈 것’이라고 강조했지만 퇴근 후 술자리에서는 직원들이 차마 떨치지 못한 불안감을 토해낸다.

    한 외국계 IB 고위직 관계자는 “본사가 있는 미국과 유럽의 상황이 워낙 좋지 않아 한국지사의 사정을 말할 처지가 아니다”며 “최악의 경우 사업부 철수나 파산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보니 언론과의 접촉을 엄금하는 등 내부 감시가 강화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IB시대’가 끝난 것은 아니다. 골드만삭스가 은행지주로 전환한 것은 예금 기반을 강화하고 금융 원조를 쉽게 해 위기를 타파하려는 것이지 IB를 포기한다는 뜻은 아니다. 인수합병(M·A), 기업공개(IPO), 채권발행 등 IB의 고유 업무는 여전히 금융시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탄탄한 수익기반이 된다.

    따라서 모기업의 사정이 긴박해 일시적으로 한국에서 사업을 철수하더라도 1~2년 후 시장이 안정되면 언제든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 반면 외국계 IB에 종사했던 유능한 인력들이 국내 금융사로 흡수돼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핵심인력 외 직원들은 새 직장 찾기 애먹어

    1997년 외환위기 상황에서 글로벌 IB와 사모펀드에 금융약탈을 당했던 한국은 금융선진화에 힘써왔지만 토종 증권사나 은행에서 자생한 IB팀에 산업은행 민영화 같은 대형 프로젝트를 맡길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답이 쉽지 않다.

    따라서 외국계 IB의 위기를 틈타 고급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물밑작업이 활발하다. 리먼의 아시아 법인 인수전에서 노무라에 패했던 바클레이도 ‘인력 빼내기’에 주력할 것으로 알려졌다. 인재가 핵심을 차지하는 IB를 인수할 때 고급인력을 빠뜨린다면 껍데기만 인수하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콩 일본 한국 등에서 글로벌 IB 종사자들에게 스카우트 제의가 잇따르고 있다. 금융 전문 헤드헌터들은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낸다. 이미 고위직 임원들과 주요 인력들은 회사 옮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스카우트 대상은 어디까지나 핵심인력으로 제한된다. 고급 IB인력에 대한 수요는 여전하지만 채용 규모는 시장위축에 따라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트레이딩마켓닷컴은 일본법인의 1300명을 비롯한 리먼 직원들이 새 직장을 구하는 데 애먹고 있다고 상황을 전했다.

    파산한 리먼뿐 아니라 다른 외국계 IB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모기업이 어려움에 처하면서 매각되거나 사업부가 축소될 경우 앞날이 불안해진다. 게다가 증시 침체와 더불어 세계 금융산업이 붕괴위기에 처하면서 M·A 등 IB의 먹을거리도 줄어들 전망이어서 업계의 구조조정은 불가피한 상황이다.

    외국계 은행에서 IB업무를 담당하는 한 직원은 “연초까지만 해도 국내 은행의 스카우트 제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구조조정 대상 1순위가 아닐까 걱정하는 상황이 됐다”며 “재취업 걱정이야 없겠지만 연봉 1억원을 우습게 알았던 화려한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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