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4

2008.07.15

농산물 유통과정서도 인증제 절실

업체들 국내 인증 없다 보니 해외 인증 통해 안전성 과시 … BL 인터내셔널, 영국 BRC 인증 받아

  • 이정훈 동아일보 출판국 전문기자 hoon@donga.com

    입력2008-07-07 1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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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산물 유통과정서도 인증제 절실
    #1경기도 ○○항에는 세계적인 농산물 수출 회사가 운영하는 창고가 있다. 이 회사는 바나나 등 과일을 한국에 수출하는데, 이 창고는 이 회사의 한국지사가 관리한다. ○○항에서는 상자에 담겨 하역된 과일을 지게차가 떠서 창고에 집어넣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과일은 상할 수 있는 식품이기에 냉장 상태로 운반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이 회사 지사는 냉장하지 않은 상태로 과일을 창고에 보관한다. 물론 포장도 하지 않는다. 얼마 뒤 이 과일은 트럭에 실려 전국의 대형 할인점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할인점 매대에 진열된 이 회사 과일은 깨끗한 모습이다. 진열하기 전 할인점에서 세척했기 때문이다. 소비자들은 깨끗한 모습에 끌려 안심하고 이 과일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2 서울 ○○동에 있는 한 도매시장은 지방에서 올라온 농산물을 서울과 수도권의 매장으로 전파한다. 새벽 3~4시에 이 시장 청과물 판매소를 찾아가면 유명 백화점 로고가 찍힌 트럭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온(常溫)에서 사람들에 의해 포장된 과일은 트럭에 실려 서울과 수도권의 이 백화점 지점으로 옮겨진다.

    #3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형 할인점은 과일의 신선도를 지키기 위해 매일매일 소비되는 물량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이다. 워낙 많은 과일이 소비되는 설, 추석 같은 대목에는 더욱 그렇다. 명절 때는 2~3일치를 쌓아놓고 판매해야 소비자들이 요구하는 물량을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대목에는 창고가 아닌 곳에 청과물을 쌓아놓고 판매 단위로 포장한다.

    바야흐로 식품안전이 강력히 요구되는 시절이다. 두 달여 동안 계속된 촛불시위도 근저에는 광우병 걸린 쇠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욕구가 깔려 있다. 지금까지의 농산물 안전은 생산과정에만 주목했다. 과도한 농약 살포를 따지는 잔류농약 검사와 원산지 증명, 유전자 변형식품 여부 등만 살펴본 것이다.



    덕분에 농산물 생산과정의 안전성은 눈에 띄게 향상됐다. 저농약 농산물이 등장하고 원산지 제도가 정착된 것이다. 그러나 농산물의 안전은 생산과정에서의 안전만으로는 보장되지 않는다. 농산물은 수확 후 가장 빨리 부패하므로 수확 후부터 상점 매대에 오를 때까지의 유통과정도 안전해야 보장받을 수 있다.

    청과물은 사람 입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를 만지는 사람은 위생적이어야 한다. 위생모를 쓰고 비닐장갑을 끼고 과일을 만져야 한다. 청과물을 다루는 곳은 청과물이 상하는 것을 막도록 저온상태를 유지하고, 쥐나 벌레가 기어다녀서는 안 된다. 작업자들이 이용하는 화장실은 청결한 수세식이어야 한다. 시설뿐 아니라 작업 절차도 위생을 지킬 수 있도록 짜여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농산물 생산과정의 안전을 담보하는 제도는 정착됐어도 유통과정에서의 안전을 요구하는 제도는 전무한 상태다. 임시건물이나 야적장에서 청과물을 다듬어 포장하는 것은 비일비재하다. 수도권 지역에는 축사로 사용되다 청과물 포장장으로 변경된 곳이 적지 않다. 한때 소와 돼지가 살던 곳에 청과물을 풀어놓고 아주머니들이 매장용 소포장을 하는 것이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므로 한국에서는 이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선진국은 다르다. 선진국은 생산과정은 물론 유통과정에 대해서도 안전을 요구하는 제도를 정착시켰다.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에서는 정부가 아니라 청과물을 판매하는 상점이 나서서 최고의 유통 안전시스템을 구축했다.

    영국에는 한국에도 진출한 테스코 같은 대형 할인점 등 대소 상점을 회원으로 한 영국 도소매인협회 BRC(British Retail Con-sortium)가 있다. 농산물에 문제가 생기면 소비자는 곧바로 판매한 상점에 항의하므로, BRC 측은 엄격한 위생시설과 절차를 가진 유통업체로부터만 농산물을 공급받겠다며 ‘BRC 기준’을 만들었다. 이 기준에는 청과물을 만지는 사람의 복장은 어떠해야 하고 작업장과 화장실은 어떠해야 한다는 등 세세한 사항이 들어가 있다.

    한국에선 아직 생산과정 안전성만 중시

    농산물 유통과정서도 인증제 절실

    상온에서 평상복 차림으로 청과물을 분류하는 기존 시장. 식품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생산과정뿐 아니라 유통과정에도 안전을 담보하는 시스템이 정착돼야 한다(왼쪽). 청과물은 사람 입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이를 만지는 사람은 위생적이어야 한다. 저온에서 위생복을 착용하고 청과물을 선별하는 BL 작업장.

    BRC 회원들은 이 기준을 만족시킨 유통업체에서 공급받는 청과물만 판매한다고 광고함으로써 소비자의 격찬을 받았다. 이후 다른 선진국도 모방해 비슷한 제도를 만들었으나, 가장 엄격한 것은 BRC의 기준이다. 영국의 상점은 수입 농산물도 판매하므로 영국에 농산물을 수출하는 회사들도 BRC 인증을 획득했다. 이러한 업체들은 “우리는 BRC의 인증을 받은 업체”라는 점을 강조하며 제3국 수출에 나섬으로써 BRC 인증의 명예는 더욱 높아졌다.

    그러자 국제표준화기구 ISO(International Organization for Standardization)도 ‘ISO 22000’이라는 국제식품안전기준을 만들었다. ISO 22000은 여러 나라에 적용돼야 하는 것이라 BRC만큼 엄격하지는 않다.

    한국은 우수 농산물을 선정하는 GAP(Good Agricultural Practice) 인증제도를 만들었으나, GAP은 생산과정에서의 안전을 요구할 뿐 유통과정에서의 안전은 요구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BL 인터내셔널(대표 이범신)이라는 농산물 유통기업이 한국 최초로 ISO 22000과 BRC 인증을 함께 획득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회사는 조만간 한국도 소비자들의 요구 때문에 상점들이 인증받은 유통업체에서만 농산물을 공급받을 것으로 보고 미리 시설을 갖추고 작업자를 교육시켜 인증을 받아냈다.

    할인점계의 양대 산맥은 이마트와 홈플러스. 두 회사는 경쟁의식 때문에 상대 회사에 납품하는 유통회사로부터는 농산물을 공급받지 않는다. BL은 홈플러스에 청과물을 납품해왔다. 그런데 이마트 측이 ‘전통’을 깨고 BL에서 청과물을 공급받는다는 결정을 내렸고, 이어 GS 마트도 같은 결정을 내렸다.

    BL의 이범신 사장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이 발효돼 시장이 개방되면 안전성을 갖춘 식품에 대한 수요가 높아질 것으로 보고 미리 준비했다”고 말했다. 먼저 준비한 자가 미래를 열어간다. BL을 선두로 식품안전 사각지대인 유통체제의 근대화가 이뤄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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