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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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정남 피살 파장

김정남 생전 마지막 인터뷰 취재기 | “당신, 인생 그렇게 살지 마”

프랑스 파리 한 호텔에서 김정남과 조우…사생활 노출 꺼려

  • 이세형 동아일보 기자 turtle@donga.com

    입력2017-02-17 16:3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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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는 국내·외 언론사 기자 가운데 마지막으로 고(故)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장남이자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인 고 김정남(46·사진)을 인터뷰했다. 2014년 9월 29일 오전 8시 반,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 거리 근처에 있는 르메르디앙 에투아 호텔에서였다.

    당시 삼성그룹을 출입하던 기자는 이 회사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삼성전기의 유럽 신사업 현장을 취재하고자 그 전날(9월 28일) 파리에 도착했다. 파리로 떠나기 전날(9월 27일) 기자는 가족과 저녁식사를 하며 “파리에 가서 운 좋게 김한솔(김정남의 아들로 당시 파리정치대 르아브르 캠퍼스 재학 중)을 만나서 인터뷰하면 좋겠다”는 농담을 했었다. 하지만 파리에서 실제로 ‘김씨 일가 구성원’을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9월 28일 밤, 대한항공편으로 파리에 도착한 직후 기자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며 삼성전기의 유럽 신사업 현황과 목표를 설명해주던 이 회사 관계자는 ‘브리핑’을 마치기 전 이렇게 말했다.

    “참. 북한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 아시죠. 이 친구가 우리 회사 임원들이 묵고 있는 호텔 식당에서 아침에 보이더라고요.”

    놀라웠다. 또 신기했다. 김정남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다는 것은 알려졌지만, 주로 목격되던 곳은 동남아시아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진짜 김정남 맞나요.”(기자)

    “그런 것 같아요. 여러 번 마주쳤어요. 우리랑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기도 하던데요.”(삼성전기 관계자)

    기자는 삼성전기 관계자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그리고 9월 29일 새벽 4시 반부터 르메르디앙 에투아 호텔 식당 앞에서 소위 ‘뻗치기’(현장 지키기)를 했다. 그리고 약 4시간 뒤 내연녀로 추정되는 여성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러 가는 김정남을 만났다.

    당시 김정남은 얇은 점퍼와 회색 티셔츠,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통통한 체형이었지만 비교적 건강해 보였다. 또 김정남과 동행한 여성은 20대 중·후반 혹은 30대 초반으로 보였고, 160cm 중·후반 정도 키에 검은색 생머리와 오뚝한 코를 지닌 미인형이었다. 빨간색 긴팔 티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한국 또는 북한 여성으로 보였다.



    질문 거부하지 않은 김정남

    “김정남 선생님이시죠. (기자 명함을 건네며) 동아일보 기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기자를 보자 동행하던 여성은 시선을 피하며 굳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김정남은 달랐다. 그는 비교적 담담했고 자연스러웠다.

    “여기(호텔)에 한국 사람들이 좀 보여서 누군가가 미디어(언론)에 이야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했는데…. 결국 왔군요.”

    김정남이 아무 말 없이 자리를 피했다면 기자는 기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비록 ‘화끈한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기자와 질문을 무조건 거부하지도 않았다. 당시 그와는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눴다.

    “북한 사정은 어떻습니까.”(기자)

    “제가 잘 모릅니다.”(김)

    “선생님이 어떻게 모르십니까.”(기자)

    “제가 솔직히 잘 모르고요. 알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김)

    “동생분, 그러니까 김정은 조선노동당 위원장의 국가 운영 방향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기자)

    “(약 15초간 아무 말 없이 기자 얼굴을 바라봤고, 중간 중간 한숨을 내쉼) 내가 언제 어떻게 인터뷰하겠다는 약속은 못 합니다. 하지만 생각을 정리해서 마음이 내키면 (기자 명함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김)

    당시 김정남은 아는 것도 꽤 있어 보였다. 또 하고 싶은 말도 많은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자신이 지금 이야기를 하는 건 적절치 않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말하는 게 무섭다’는 표정도 약간 담겨 있었다.

    “선생님, 그래도 한 말씀해주시죠.”(기자)

    “아닙니다. 저는 잘 모릅니다. 이제 좀 그만….”(김)

    자리를 피하려는 김정남을 막아섰다. 그리고 다소 분위기를 바꾸는 질문을 던졌다. 좀 더 가벼운 주제였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세요.”(기자)

    “(웃으면서 팔을 벌린 채) 보니까 어떠세요. 아직 쓸 만해 보이지 않나요.”(김)

    기자는 계속 궁금한 것, 아니 김정남이 상대적으로 편하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은 주제로 질문을 이어갔다.

    “아까, 같이 내려온 여자분, 동행이시죠.”(기자)

    “네.”(김)

    “가족이신가요”(기자)

    “저기요. 가족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같이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건 프라이버시이니 더 묻지 마세요.”(김)

    “가족인지, 친구인지만 말씀해주시죠.”(기자)

    “프라이버시이고 절대 말 못 합니다.”(김)

    “파리에 오신 이유가 있나요. 혹시 아드님(김한솔)을 만나러 오신 건가요.”(기자)

    “프라이버시입니다.”(김)

    “요즘도 주로 마카오나 싱가포르 쪽에 계시나요. 혹시 거주지에 큰 변화를 주실 계획(망명할 계획)은 있으신가요.”(기자)

    “정말 프라이버시입니다. 절대 이야기 못 합니다.”(김)

    가장 궁금했던 질문 가운데 하나를 던졌다. 바로 북한에서 김정남의 후견인 구실을 하던 고모부 장성택 전 국방위원회 부위원장(2013년 12월 숙청)에 대한 질문이었다.

    “선생님, 장 부위원장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기자)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비교적 여유 있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김정남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고개를 돌리면서 푹 숙였고, 아랫입술도 살짝 깨물었다. 한눈에 봐도 가슴 아프고, 생각하기도 싫은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는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가장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할 말 없습니다. 이제 그만 좀 하시죠.”(김)

    더 캐물어도 김정남이 특별한 이야기를 할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기자도 타협안(?)을 제시했다.

    “선생님 사진만 찍겠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더 안 하겠습니다.”(기자)

    하지만 김정남의 답변은 단호했다. 그리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절대 안 됩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아들에게 어머니가 아닌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싫었던 것 같다).”(김)

    자리를 떠나는 척했다. 하지만 기자는 몰래 김정남이 아침식사를 하고자 식당 앞에서 들어가려고 기다리는 모습을 뒤에서 촬영했다. 또 식당에 들어가 그가 식사하는 모습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기자의 모습을 본 김정남은 빠르게 얼굴을 돌리며 손으로 가렸다. 결국 김정남의 정면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사진 찍자 손으로 얼굴 가리고 항의

    그리고 김정남은 기자에게 뛰어왔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야. 인생 그렇게 살지 마.”(김)

    김정남은 기자에게 뛰어와 화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또 휴대전화를 빼앗으려 했다. 기자는 당연히 안 뺏기려 몸을 피했고 “몰래 사진 찍어서 미안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이해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기자와 김정남의 ‘소동’을 본 호텔 직원들이 뛰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라고 묻는 호텔 직원들에게 김정남은 유창한 영어로 “이 사람이 나를 사진 찍었어요. 이건 사생활 침해입니다. 경찰 부르세요”라고 말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보는 호텔 직원들에게 기자도 설명해야 했다.

    “이분의 사진을 찍은 건 맞습니다. 이 사람은 북한의 유명 정치인이고, 저는 한국 메이저 신문의 기자입니다. 보도를 위해 찍은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물리적 충돌이 없었습니다.”(기자)

    화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기자를 쳐다보는 김정남과 어리둥절해하는 호텔 직원들 사이에서 잠시 머물던 기자는 슬쩍 식당에서 걸어나온 뒤 숙소(약 5분 거리에 있는 다른 호텔)로 뛰었다. 그리고 서울 본사에 전화해 상황을 보고한 뒤 기사를 작성, 송고했다.

    이렇게 본보 기사(2014년 9월 30일자 A1·6면)가 보도된 뒤 김정남이 묵었던 르메르디앙 에투아 호텔은 파리주재 한국 언론사 특파원은 물론이고, 전 세계 주요 매체 기자들로 붐볐다. 그러나 김정남은 이미 호텔을 떠난 뒤였다.

    당시 기자는 2014년 10월 1일까지 파리에 머물렀다. 기자생활을 하며 평생 보기 힘든 유명 인사(?)를 만나 ‘특종’을 한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당시 자유로워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경직돼 있던, 또 편하게 말하면서도 중요한 이야기는 잘 안 하던 김정남의 모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다. 그러나 북한 지도층 출신 인사치고는 개방적으로(?) 보이는 김정남의 모습은 그래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혹시라도 나중에 이 사람이 북한에 변화가 생길 때 중요한 구실을 하는 건 아닐까’란 생각도 했었다.

    그리고 약 2년 5개월 뒤인 오늘(2월 14일) 오후 7시 반 무렵, 그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국제공항에서 북한인으로 보이는 여성 2명에게 독침을 맞아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는(인터뷰했던) 사람’이 이국땅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그를 파리에서 괴롭혔던 생각이 떠올라 조금 미안했다. 또 가뜩이나 예측 불가능한 북한과 김정은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어떤 혼란과 변화를 가져올지 걱정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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