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4

2017.02.08

김민경의 미식세계

치열한 한 끼, 뒤끝 없는 화려함

서울의 매운 냉면

  • 푸드칼럼니스트 mingaemi@gmail.com

    입력2017-02-03 16:3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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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는 냉면을 먹는 데 제때가 따로 없다. 겨울이 제맛이라니 요맘때 먹어야 하고, 여름에는 당연히 찬 음식인 냉면이 당긴다. 매끈한 목 넘김과 개운한 맛이 좋아 입이 깔깔해지는 가을과 봄에 먹기에도 무리가 없다. 요 몇 년 매스컴을 통해 냉면의 가치와 매력이 한껏 알려지면서 냉면 사랑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그 사랑의 형태도 재미있다. 고기나 동치미로 만든 웅숭깊은 맛 국물에 툭툭 끊기는 메밀 면을 말아 내는 평양냉면을 대할 때 사람들은 자못 진지하다. 심심하면서도 섬세한 맛에 걸맞은 음미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홍어나 간자미 회 또는 명태식해를 올리고 참기름과 겨자를 곁들여 칼칼한 양념에 비벼 먹는 함흥냉면의 시간은 좀 더 경쾌하다. 뜨거운 육수나 면수를 곁들여 리드미컬하게 냉면 한 그릇을 비운다. 해물을 달여 발효한 육수에 면을 말고 육전을 얹어 내는 진주냉면은 흔히 맛볼 수 없는 독특한 매력에 먹는 내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도대체 어느 별에서 왔는지 묻고 싶을 만큼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매운 냉면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냉면의 한 줄기다. 매우면 매울수록 더 뜨겁게 사랑받고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치열하게 먹는다.

    서울 송파구 잠실본동에 있는 ‘해주냉면’은 정신여중고를 나온 친구의 손에 이끌려 찾은 곳이다. 심심하게 생긴 냉면을 우습게 봤다가 큰코다친 곳이지만 발길을 끊을 수 없다. 냉면치고는 물기가 없고 차진 매운 양념 한 국자, 편육 두 쪽, 달걀 반쪽(요즘에는 메추리알), 저민 오이가 무심하게 올려져 있다. 마늘과 고춧가루 등 한국의 매운맛을 총집결시킨 양념은 먹을수록 맵다. 냉면만큼 인기 있는 뜨거운 육수는 매운맛을 살살 부추긴다. 달콤하고 시원한 무절임으로 질깃질깃한 냉면을 감싸 먹으면 그나마 견딜 만하다. 1983년 포장마차에서 시작한 ‘해주냉면’은 지금의 양념을 완성하기까지 8년간 공을 들였다. 빈틈없이 매운맛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깃대봉냉면’은 풍문여고를 나온 친구가 데려갔다. 처음 갔을 때는 ‘내가 이곳을 다시 찾아올 수 없겠구나’ 싶은 곳에 냉면집이 있었다. 밤중에 마을버스를 타고 한참을 올라간 뒤 내렸더니 컴컴한 동네였다. 밝기가 영 시원찮은 가로등 아래 간판도 없는 집, 현관이 무색하게 길가로 밀려나온 신발만 가득한 집이었다. 뜨끈한 방바닥에 앉아 먹던, 통깨가 잔뜩 떠 있는 매운 국물 냉면 맛을 잊을 수 없다. 맵싸하고 시원한 국물 맛에 반해 훌훌 마시다 보면 콧잔등과 등줄기에 땀이 절로 맺힌다. 그때가 21년 전이고 지금은 숭인동으로 자리를 옮긴 ‘깃대봉냉면’은 어느새 반백 살이 됐다.

    용산구 보광동에 있는 ‘동아냉면’은 나의 첫 직장 ‘사수’를 따라갔다. 달고 맵고 시원하며 면발도 톡톡 잘 끊기고 중독성 강한 육수까지 있다. 짭조름한 고기소로 꽉 찬 찐만두를 매운 냉면과 번갈아 먹는 맛도 일품이다. 물냉면에 매운 양념을 곁들여도 좋고, 비빔냉면에 찬 육수를 보태 먹어도 맛있다.



    그러고 보니 나를 매운 냉면의 세계로 이끈 사람은 모두 여자다. 교복 치마 펄럭이며 문턱 닳게 드나들던 학교 앞 분식집의 향수가 매운 냉면과 닮아서인가.


    서울의 매운 냉면집△‘깃대봉냉면’ 서울 종로구 지봉로12길 3, 02-762-4407, 오전 10시 30분~오후 9시 30분(연중무휴) △‘해주냉면’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12길 5-22, 02-424-7192, 오전 11시 30분~오후 9시(일요일 휴무) △‘동아냉면’ 서울 용산구 우사단로 5, 02-796-7442, 오전 9시 30분~오후 9시(연중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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