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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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의 포로’를 경계한 ‘주옹설’

  • 이도희 경기 송탄여고 국어교사·얼쑤 논술구술연구소 http://cafe.daum.net/hurrah2

    입력2007-04-27 18: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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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식의 포로’를 경계한 ‘주옹설’

    고속도로 사고는 대부분 부주의 때문에 일어난다.

    아스팔트와 비포장 도로 중 어느 쪽이 차 운행에 안전한가? 논술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대부분 학생들은 포장되고 반듯한 ‘아스팔트 도로’라고 답한다. 물론 내가 원한 답변은 아니다.

    우리가 대학자들의 논문을 말할 때 중요시하는 점은 학자 자신만의 학문적 독창성이다. 학자는 독창적인 이론을 발표한 결과 학계로부터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는다. 논술도 논문의 동생뻘이라고 보면 된다. 상식적인 주장은 논술로서의 자격 상실에 해당한다. 필자가 학생들의 논술답안을 첨삭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학생들이 상식적 사고에 포로가 돼 있다는 것이다. 다음 글을 보자.

    주옹이 말하기를 “아, 손은 생각하지 못하는가? 대개 사람의 마음이란 다잡기와 느슨해짐이 무상(無常)하니, 평탄한 땅을 디디면 태연하여 느긋해지고, 험한 지경에 처하면 두려워 서두르는 법이다. 두려워 서두르면 조심하여 든든하게 살지만, 태연하여 느긋하면 반드시 흐트러져 위태로이 죽나니, 내 차라리 위험을 딛고서 항상 조심할지언정 편안한 데 살아 스스로 쓸모없게 되지 않으려 한다. 하물며 내 배는 정해진 꼴이 없이 떠도는 것이니, 혹시 무게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모습이 반드시 기울어지게 된다. 왼쪽으로도 오른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끔 내가 배 한가운데서 평형을 잡아야만 기울어지지도 뒤집히지도 않아 내 배의 평온을 지키게 되나니, 비록 풍랑이 거세게 인다 한들 편안한 내 마음을 어찌 흔들 수 있겠는가?” -권근 ‘주옹설’

    이 글은 역설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사람은 위태로운 상황이면 대비를 철저히 해 살고, 반대로 평안하면 대비를 하지 않아 죽는다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마치 물에 떠 있는 배와 같으니 늘 마음을 다잡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거센 풍랑이 일어도 자신이 중심을 잡으면 배가 안전한 것처럼 자기중심을 흩뜨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옹설’은 삶의 교훈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축구를 ‘주옹설’과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잘 들어맞는다. 한 축구 전문가의 말에 따르면 우리 축구 국가대표팀은 ‘강팀에 강하고 약팀에 약하다’. 2007년 한국축구 대표팀이 강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이나 2003년 약팀 오만에 패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물론 한국축구 대표팀의 모든 경기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런 특징을 보인다는 말이다. 세계 어느 팀이든 강팀과 경기할 때는 아무래도 준비를 철저히 할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약팀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약팀이라는 이유로 안심해 대비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 강팀이 약팀에 패하는 일이 생긴다.

    이어령 박사의 ‘디지로그’도 ‘주옹설’과 관련해 이해할 수 있다. 현대시대의 ‘총아’로까지 불렸던 디지털 기술은 장점 못지않게 단점도 많이 드러냈다. 디지털 한쪽에만 쏠려 있는 현대인들을 생각하면 ‘주옹설’에서 배 한쪽으로 치우친 것과 같다. 자기중심이 사라진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디지털의 이성과 아날로그의 감성 중간 지점에 현대인이 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중용의 도가 필요한 셈이다.

    논술시험에서 ‘현대의 진정한 리더 조건’이 논제라면 어떤 답안이 좋을까? ‘리더에게는 디지로그적 정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 좋다. 이어령 박사는 “최첨단 기술만으로, 산뜻하고 콤팩트한 외적 이미지만으로는 세계를 리드할 수 없다. 혈관을 통해 따뜻한 피가 흐르고, 심장이 뛰는 아날로그적 감성이 합쳐진 사람만이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다”고 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아마 디지로그적 리더십이라는 답변은 표현과 내용 측면에서 창의성을 인정받을 것이다.

    ‘주옹설’은 우리 사회 모든 면에서 적용할 수 있다. 홍수 등 자연재해나 과거의 삼풍백화점, 한강 다리 붕괴 등이 그것이다. ‘주옹설’의 교훈을 새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고속도로에서 일어나는 대형사고를 생각해보자. 반듯하고 포장된 도로이기에 운전자들이 방심한 결과 사고가 일어나는 것이다. 바로 ‘주옹설’의 필자인 권근이 염려했던 상황이다. ‘주옹설’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 논술답안의 논리를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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