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4

2005.10.04

‘느낌 팍’ 사투리가 딱 이래요~

  • 김민경 기자 holden@donga.com

    입력2005-09-28 16: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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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느낌 팍’ 사투리가 딱 이래요~
    올해 추석 극장가의 승자는 ‘가문의 위기’였다. ‘가문의 위기’는 배용준 주연의 깔끔한 영화 ‘외출’을 간단히 누르고 추석 연휴를 지나며 약 360만 관객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에 2위를 차지한 것은 8월에 개봉한 ‘웰컴투 동막골’이고, 3위는 하지원 주연의 ‘형사’였다.

    세 영화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이 모두 지방색이 선명한 사투리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웰컴투 동막골’의 강원도 사투리는 이미 많은 유행어를 만들었고 ‘가문의 위기’의 주인공 가문은 전라도 여수의 99간 대갓집으로 김수미, 신현준, 탁재훈 등이 모두 여수 사투리를 쓴다. ‘형사’의 하지원은 한쪽 입술을 치올리며 “긍게~”로 시작되는 액션을 선보일 때 그녀의 캐릭터는 생동감을 얻는다.

    추석에 개봉한 멜로 ‘종려나무 숲’의 주인공 김유미는 거제도 사투리를 구사한다. 덕분에 거제도가 고향인 김영삼 전 대통령이 관람해 화제가 됐다.

    ‘나의 결혼 원정기’(11월 개봉)에서 신부를 구하기 위해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농촌 총각 유준상과 정재영은 경북 예천 사투리를 구사한다. 유준상은 “예천 사투리엔 경상도와 충청북도 말의 중간쯤 되는 독특한 개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드라마 리얼리티 살리기



    ‘사생결단’에서 류승범, 황정민은 각각 부산 토박이 마약판매상과 담당 형사 역을 맡는데, 부산 사투리는 지방 도시 뒷골목으로 운명이 결정지어진 두 남자의 삶을 드러낸다. 10월7일 개봉하는 영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에서도 황정민은 부산 사투리를 쓰는데 이번에는 단순, 무식, 과격의 캐릭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원래 서울말로 돼 있던 것을 황정민의 제안으로 촬영단계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바꿨다.

    또 12월에 개봉할 곽경택 감독의 신작 ‘태풍’에서는 탈북자 2세로 나오는 이미연과 장동건이 완성도 높은 북한 사투리를 구사한다. 곽경택 감독은 2001년에 ‘친구’를 연출해 한국 영화에 본격적으로 사투리를 도입한 장본인이다. ‘친구’에서 경상도식 ‘갱글리시’를 가르치는 영어 선생님 역으로 나온 양준경 씨가 ‘태풍’의 제작사인 진인사필름의 대표인데 그가 제작한 ‘우리형’, ‘똥개’가 모두 ‘오리지날’ 경상도 사투리 영화였다.

    요즘은 드라마에서도 파출부나 수위 같은 단역이 아닌 주인공급들이 사투리를 쓰는 경우도 많아졌다. ‘가문의 위기’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선보인 김수미는 SBS 수목 미니시리즈 ‘사랑은 기적이 필요해’에서 경상도 사투리로 ‘사투리 연기’의 달인임을 증명해 보인다. 11월 방송되는 KBS 미니시리즈 ‘이 죽일 놈의 사랑’에서는 미스코리아 출신 김사랑이 드센 포장마차 주인으로 강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게 된다. 방송위원회도 지난해 ‘사투리를 사용할 때 국어순화 차원에서 신중’해야 한다는 규정을 삭제하여 사투리 심의 규정을 완화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사투리를 쓰는 목적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국립국어원의 표준어 규정)인 표준어가 도저히 담지 못하는 ‘정서’를 확보하기 위해서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당내 표준어’인 전라도와 경상도 사투리 바꿔 쓰기 행사를 열었다거나(4월)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조폭이나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권력자가 등장한 영화의 전형성이 비판받을 때조차 마찬가지다.

    사투리는 특히 언어로 이뤄지는 예술 장르인 문학과 연극에서 매우 절실한 문제다. 최명희의 ‘혼불’ 등 문학 작품들이 가장 먼저 사투리가 가진 힘을 증명한 것이나 오태석 같은 연극인이 ‘차이의 문화’를 주장하며 고집스럽게 제주, 전라 등의 사투리를 써서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웰컴투 동막골’의 경우, 영화화 전 연극 무대에서 상영될 때 주인공들은 표준어를 사용했다. 강원도가 행정구역상의 곳이 아닌 ‘이상향’ 대신이었고, 국군과 인민군, 연합군이 만난 극적 상황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중에게 스크린을 통해 보여주는 영화로 옮겨지면서 실제 배경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었어요. 영화에서 배우들이 구사하는 말은 50년대 강릉에서 쓰던 거예요. 함경도 말도 배우들에게 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당신은 1950년대에 평안도 어디서 태어나 어떤 일을 하다 군인이 된 사람’이라고 히스토리를 체득하게 했어요. 언어란 결국 인물의 정신과 문화적 배경이니까요.”

    연극과 영화 ‘웰컴투 동막골’ 양쪽의 프로듀서를 맡은 이은하 PD의 설명이다.

    ‘순수’함을 보여주는 50년대 강릉 사투리를 쓸 수 있었던 건 개그맨에서 영화배우로 진로를 바꾼 심원철(석용 역)이 할머니에게서 배운 말을 기억한 덕분이었다. 예를 들어 박광현 감독이 “죽을 것처럼 아플 때 강원도 사람들은 어떻게 말하냐”고 물으면 심원철이 “ 긴소리 없이 ‘마이 아파’ 합니다”라고 대답해 시나리오가 만들어졌다.

    언어란 인물과 정신 문화적 배경

    ‘가문의 위기’의 전편 ‘가문의 영광’(2002, 감독 정흥순)은 100% 기획 영화로 코미디 액션의 장르적 전형을 따랐다. 우리나라에서 진한 가족애, 건달이라는 설정은 당연히 전라도라는 지역적 배경을 가져오게 한 것이다. 제작사 태원엔터테인먼트의 하상희 씨는 “가족 코미디라는 설정을 과장하기 위해 호남 주먹이라는 설정이 필요했고, 1편의 전라도 사투리가 젊은 관객들에게 인기를 모았기 때문에 2편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고 말한다.

    ‘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감독이 만든 ‘쓰리 몬스터’에서 강도로 나온 임원희가 태연히 상대의 목을 조르고 손가락을 자르며 느리게 내뱉던 충청도 사투리도 빼놓을 수 없다. 충청도 사투리는 요즘 ‘그 까이꺼’라는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등 개그맨들의 언어로 사랑받아왔지만, 부자들을 향해 가슴에 묻어두었던 원한을 소름끼치게 드러내는 데 이 지역 사투리처럼 적절한 말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그러나 사투리가 언제나 환영받는 건 아니다. ‘정서’적 언어인 만큼 상처도 더 아프게 건드리기 때문이다. 한 드라마 PD는 “건달을 늘 전라도로 설정해서야 되겠냐는 사장의 지적에 일부 연기자를 대체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70년대 광주에서 빈민들과 함께 산 실존 인물 박흥순의 비극적 삶을 그린 영화 ‘무등산 타잔 박흥순’은 ‘전라도 새끼가 깡패밖에 할 게 더 있냐’는 광고 카피로 여론의 집중포화를 받았다. 백상시네마 고대석 대표는 “지역감정을 자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이번 추석 광주 극장에서 ‘가문의 위기’ 등을 보면서 30대 이상에선 여전히 (지역색이) 껄끄러운 문제임을 느꼈다. 10대인 딸 세대는 사투리보다 인터넷에 더 민감하더라”고 말한다.

    또 최근 한 개그프로는 ‘목포는 항구다’라는 코너 제목을 지역 여론에 밀려 바꾸기도 했다.

    사투리가 다양한 대중 문화를 통해 확산되고, ‘죽은 언어의 부활’이 아니라 문화적 다양성을 표현하는 새로운 언어로 각광받고 있음에도 이 같은 흐름의 가장 뒤에 서 있는 것이 언어 정책을 입안하는 국립국어원(전신은 국립국어연구원)이다. 사투리를 쓰는 사람을 ‘교양 없는’ 사람으로 규정해 간접적으로 사투리를 없애는 데 앞장서온 국립국어원은 지난해부터 부랴부랴 사투리 자료를 수집, 녹음하는 일에 나섰다. 그나마 1년 3억원이라는 부족한 예산 때문에 각 지역에서 사투리를 연구해온 교수 등 민간인들의 헌신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립국어원 한 연구사는 “표준어 규정은 하루빨리 전 사회가 머리를 맞대고 검토해야 할 문제”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급한 것은 사투리들을 기록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일이다. 영화와 드라마의 사투리들은 이 같은 필요성을 대중적으로 인식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EBS 다큐멘터리 ‘울고 웃는 우리말, 사투리’를 만든 유병선 PD는 “여전히 사투리를 쓰면 촌스럽다, 취직이 안 된다는 인식과 미디어의 무차별적 전파로 사투리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면서 “역시 다양한 뿌리를 가진 언어가 생명력도 길다는 것이 결론”이라고 말했다. 사투리는 우리 스스로 가졌으나 그동안 알지 못했던 소중한 유산이다. 마음이 급해지는 건, 사투리를 쓰는 ‘동막골’ 사람들뿐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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