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4

2005.10.04

배 가르고 두개골 쪼개고 숨가쁜 시신과의 전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유전자분석 등 억울한 죽음 예방 ‘궂은일 24시’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5-09-28 13:45: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배 가르고 두개골 쪼개고 숨가쁜 시신과의 전쟁

    부검에 쓰이는 장비들.

    하얀 시트에 돌돌 말려 온 반 발쯤 되는 두 살 난 여자아이의 시신은 마치 밀랍인형 같았다. 사반(死斑)이 번지지도 않은 채 경직된 하얀 몸을 연구사가 번쩍 들어 저울에 올렸다.

    “아이고, 어린애야? 아이를 만지는 건 괴로운데.”

    안타까운 탄성이 터진다. 아름다운 시신은 없다지만, 세상의 때가 아직 묻지 않아서일까. 해부대 위로 옮겨진 아이의 시신은 하얗고 깨끗했다. 살아 있을 때 엄마가 곱게 손질해줬을 긴 머리카락을 면도칼로 깨끗이 민 뒤 메스로 두피를 가르자 생각보다 너무 쉽게 얼굴 가죽이 벗겨졌다. 문득 영화 ‘페이스 오프’가 떠올랐다.

    두피 아래로 상아색 두개골이 드러나자 톱질이 시작됐다. 법의연구원 두 명이 교대로 톱을 잡아 두개골을 가르는 모습과 쓱~쓱~, 드르륵~ 하는 소리가 겹쳐 무척 그로테스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옆에 있던 아이의 아버지는 차마 더는 보지 못하겠는지 밖으로 나가버렸다.

    “차량이 아이의 머리 부위를 역과(轢過·차에 깔림)해서 사망했습니다. 차량 바퀴에서 아이의 피부조직이 발견됐기 때문에 사인은 분명해요. 하지만 운전자는 아이가 깔렸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하고, 유족들은 그럴 리 없다고 주장해서 신체의 손상 정도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부검을 한 것입니다.”



    40분여의 부검을 마치고 김유훈 법의관이 이렇게 설명했다.

    계속 시신은 밀려들어왔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목매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50세 남성, 머리가 처참하게 부서지고 뇌는 반쯤 없어졌으며 온몸에 멍이 든 30세 여성, 아버지에게 온몸을 맞아 외상성 쇼크로 사망한 8세 소년 등 이날 총 21구의 시신이 해부대 위에 올랐다.

    올해로 창립 50주년 … 세계적 수준 성장

    매스꺼운 비린내가 부검실 전체에 진동했다. 물에 젖어 썩은 카펫에서 나는 냄새와 비슷했지만 훨씬 지독했다. 30세 여성의 복부를 가르자 호박색의 누런 지방층 밑으로 내장이 드러났고 비린내는 더욱 심해졌다. 폐와 간, 창자가 파열돼 있고 군데군데 피가 고여 있었다. 살해 당시의 처참한 광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연구원들은 시신 내부에 고인 피와 위 속의 음식물 등을 국자로 떠 용기에 담았고, 장기는 꺼내 일일이 무게를 잰 뒤 다시 집어넣었다. 연구원이 벗긴 안면 피부를 다시 씌우고 능숙한 바느질로 복부를 꿰매자 시신은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기자는 여러 차례 고개를 돌렸지만 법의관들과 연구원들은 표정 변화 하나 없었다. 김 법의관은 “영혼이 떠나간 시신은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 남겨진 증거이고, 철저한 검사를 통해 사자의 원을 풀어주는 게 우리의 임무”라며 부검하면서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배 가르고 두개골 쪼개고 숨가쁜 시신과의 전쟁

    9월5일 부검 중인 법의관과 연구원들.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소장 이원태·이하 국과수). 부검과 초보적인 감정을 하는 것으로 업무를 시작한 국과수가 이젠 세계적 수준의 과학기술을 보유한 과학수사의 본산으로 성장했다. 현재 행정자치부 소속인 국과수는 1955년 문을 열어 86년 지금의 서울 양천구 신월동 청사로 이전했고 93년 부산에 남부분소, 97년 전남 장성군에 서부분소, 2000년 대전 유성구에 중부분소를 개소해 전국을 관할하고 있다. 현재 관련 분야 석사 100여명과 박사 42명을 포함한 245명의 직원들이 매년 22만여 건의 감정 업무를 처리해낸다. 9월5일, 창립 50주년을 맞아 과학수사의 한 단계 도약을 모색하고 있는 국과수를 찾았다.

    보통 국과수 하면 부검을 떠올리지만, 국과수에서 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국과수는 크게 법의학부와 법과학부 두 부서로 나뉜다. 법의학부에는 법의학과, 유전자분석과, 범죄심리과, 문서영상과가 있다. 이곳에서는 부검 및 사인규명, 대량 재해의 개인 식별(법의학과), 혈액·혈흔·모발·인체 분비물 및 조직 등에서 유전자분석을 통한 개인 식별 및 유전자 자료관리(유전자분석과), 범죄심리 분석 및 연구(범죄심리과), 필적·인영 감정 및 불명문자 판독, 영상 복원 및 판독(문서영상과) 등을 수행한다.

    법과학부에는 약독물과, 마약분석과, 화학분석과, 물리분석과, 교통공학분석과가 있다. 업무는 변사체 등의 생체시료에서 의약품류 및 독극물류에 대한 감정 및 연구, 식품의 유행성 감정(약독물과), 아편·코카인·마리화나 등 향정신성의약품류 감정 및 연구(마약분석과), 비규제 약물 남용 및 혈중 알코올 감정, 변사체 혈액 중 유해성 물질 감정(화학분석과), 물리적 폭발 및 기계구조물 파괴 등의 원인 규명(물리분석과), 교통사고 원인 규명 및 각종 증거물 분석(교통공학분석과) 등이다.

    강력범 유전자 DB화 인권 논란 탓 실행 못해

    “사건 현장에 떨어진 정액 하나로 범인을 잡을 수 있습니다.”

    유전자분석과 한면수 과장의 이야기다. 유전자형 분석은 이젠 과학수사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먼저 성범죄 현장에서 수거된 하얀 휴지 조각에 묻은 정액에서 유전자를 추출해낸다. 이는 증폭기를 통해 1억 가락으로 늘어나고, 유전자형 분석기는 ‘XY, 15, 19, 13’이라는 DNA의 고유 번호를 띄운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이 기호를 용의자의 DNA와 대조해 범인 검거에 사용하는 것. 그렇게 잡은 범인이 바로 수도권 유흥업소를 중심으로 50여 차례 강간을 저지른 성폭행범 ‘빨간 모자’다.

    “범인이 잡히기 전 강간 사건 현장에서 여러 차례 동일한 DNA 기호가 나타났어요. 그래서 한 사건의 용의자로 ‘빨간 모자’가 잡힌 뒤 그가 다른 사건들의 범인인 것도 바로 알 수 있었죠. 하지만 만약 우리가 범죄자 유전자 데이터베이스를 가지고 있었으면 좀더 쉽게 범인을 잡을 수 있었을 겁니다. 모든 범죄가 다 그렇지만 특히 강간은 상습범이 많으니까요.”

    배 가르고 두개골 쪼개고 숨가쁜 시신과의 전쟁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교통사고 감정’은 가장 골치 아픈 일 중 하나다.

    현재 국과수는 방화,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른 수형자와 구속 피의자들의 유전자를 데이터베이스화하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인권 침해 등의 논란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미해결 사건의 현장에서 발견된 유전자 정보 3000여 건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한 과장은 “증거물에서 DNA를 추출해내는 전처리 기술은 우리가 세계 최고의 수준이지만 법적으로 범죄자 유전자를 데이터베이스화할 수 없어 뛰어난 기술과 고가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체 분비물을 통한 유전자분석이 보편화되기 전 사건을 풀어가는 실마리는 현장에 있는 모든 물질들이었다. 이를 분석해내는 곳이 바로 법과학부 화학분석과다. 화학분석과 고분자연구실 홍성욱 실장은 “물체의 접촉이 있으면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범인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든 증거물을 은폐했겠지만, 보이지 않는 증거물은 꼭 남아 있다. 우리가 하는 일이 이를 밝혀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3년 말 발생한 유영철 연쇄살인 중 하나인 서울 삼성동, 혜화동 노인 피살 사건에서 처음 발견한 증거물은 문에 묻은 족적의 구두흔이었다. 유영철이 검거된 뒤 국과수는 유 씨가 가지고 있던 신발의 굽을 검사한 결과 구두의 보조굽과 성분이 일치함을 밝혀냈다. 이에 이 사건도 유영철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됐다. 다음은 홍성욱 실장의 설명이다.

    “추락사한 여인이 있었는데, 사체의 손톱에서 다양한 섬유가 검출됐어요. 처음에는 단순 추락사인 줄 알았는데, 이상하더군요. 수사 결과 여인은 윤간을 당했고, 저항하며 피해 다니다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겁니다. 즉 강간범들은 그 다양한 섬유의 주인들이었던 거죠. 이처럼 미세증거물의 확보는 수사의 기본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사건 현장에서 중요한 단서를 놓치는 경우가 많아요. 이에 대한 교육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첨단기술·장비·인력 부족은 ‘여전’

    법의관들은 가장 큰 골칫덩이가 ‘교통사고 감정’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미묘하게 얽혀 있기 때문. 이처럼 교통사고에 관한 사안이 무척 민감한 데다, 업무량도 증가하자 1991년 이를 전담하는 교통공학과가 탄생했다. 교통공학과 박성지 박사는 “교통사고는 반드시 인체 손상을 동반하게 되는데, 의학적인 지식뿐 아니라 공학적인 지식을 동원해야 원인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차량이 보행자를 정면에서 쳐 사망했는데, 부검해보니 이상하게도 내부 장기의 손상 없이 척추만 끊어졌어요. 그래서 국과수 내부에서도 차량과의 충돌이 사인인지, 아닌지를 놓고 수많은 토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보행자 사고에 대한 전용 소프트웨어를 도입해서 해석해보니 충돌시 허리가 꺾이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 밝혀졌어요. 이로써 인체 손상의 원인을 명확히 밝혀낼 수 있었죠.”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국 CBS 드라마 ‘과학수사대 CSI’. 작은 단서 하나로 범인을 잡아내는 과학적인 수사에 시청자들은 혀를 내두른다. 이에 국과수 이원태 소장은 “우리나라 국과수 인력의 수준은 전혀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쓰나미(지진해일) 대참사 때 함께 일했던 독일 수사팀이 ‘한국 팀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감탄했을 정도라고.

    하지만 첨단기술과 장비, 지원 부분은 떨어지는 편이다. 특히 인력 풀이 많이 모자란다고 한다. 국과수 정원이 281명인데, 현재 인원은 245명이다. 부검을 담당하는 법의관도 22명인데, 정원보다 3명이 적다. 월급도 적고 일 자체도 힘들기 때문에 지원하는 사람이 적다고 한다.

    올해로 50살이 된 국과수는 분명 한 단계 도약하고 있다. 하지만 이 도약을 지속하기 위해선 국가의 지원과 국민의 성원이 뒷받침돼야 한다. 국과수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마지막 감시자란 점에서 더욱 그렇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