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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교양 돋보기|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초우량 신인류 만들면 안 될까

복제에 관한 인문학적 상상력 … 인간이 자신의 형질 디자인하는 시대 올 수도

초우량 신인류 만들면 안 될까

초우량 신인류 만들면 안 될까
이제 원숭이만 남았다.’ 황우석-이병천 박사팀이 이끈 개 복제 실험의 성공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의 제목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묘한 느낌이 들었다. 황 박사는 영장류의 복제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이 기사는 영장류 복제를 버젓이 목표로 제시해놓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왜 남은 것은 원숭이만일까? 사실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는가. ‘이제 인간만 남았다.’

황 박사는 “100년 이내에 인간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 말을 뒤집으면 100년 후에는 인간 복제도 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황 박사는 영장류를 복제할 생각이 없다고 밝혔지만, 모든 과학자들에게 그와 똑같은 신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가 아닌가. 황 박사는 ‘치료 목적’ 이외의 복제는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치료 목적’의 복제라 해서 끔찍한 상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개봉된 할리우드 영화 ‘아일랜드’를 생각해보라. 거기에는 치료 목적으로 인간을 사육하는 어느 거대한 농장의 얘기가 등장한다. 외부 세계가 오염되어 있다고 믿고 밀폐된 공간에서 무미건조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복제 인간들. 그들의 꿈은 추첨을 통해 파라다이스로 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 파라다이스라는 게 누군가에게 장기를 내주기 위해 올라가야 하는 수술대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랑의 복제

황 박사가 치료 목적 이외의 복제는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도 언론의 상상력은 이미 그를 제치고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다. 조선일보는 ‘우리 집 강아지 영원히 키우는 시대 오나?’라며, 애완견 복제의 상업화를 암시했고, 동아일보도 미국의 고양이 복제 사업을 예로 들며 ‘이번에 성공한 기술이 상업적으로 이용된다면 엄청난 돈이 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애완 고양이도 복제하는데, 애완견을 복제 못할 게 뭐 있는가?



황 박사가 개발한 이 기술은 멸종된 동물들을 복원하는 데에도 사용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분명히 치료 목적을 넘어선 사용이다. 어쨌든 생태계의 파괴로 사라진 생명체를 복원하는 데 성공한다면, 다른 종을 멸망시킨 인류의 죄는 조금 덜어질지 모르겠다. 영화 ‘쥬라기 공원’처럼 동물원에서 공룡들을 보는 날이 올까? 허황된 상상이겠지만, 솔직히 내 눈 앞에 티라노사우루스가 서 있는 모습이 보고 싶기는 하다.

초우량 신인류 만들면 안 될까

영화 ‘아일랜드’의 한 장면

멸종 생물을 다시 보고 싶고, 기르던 개를 계속해서 키우고 싶다면, 기르던 자식은 어떻겠는가? 철학자 데카르트는 사랑하던 딸이 죽자, 그와 똑같은 자동인형을 만들어 평생을 간직했다고 한다. 만약 당신이 생명공학자이고 인간 복제 기술을 갖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런데 사랑하는 아이를 교통사고로 잃었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한번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라.

원본과 복제

듣자 하니 과학기술부에서는 이미 고양이 복제 프로젝트를 가동하고 있다. 복제 동물에게서 나타나는 생명 단축이나 장기의 비대와 같은 현상들을 극복하기 위한 연구라고 한다. 복제 양 ‘돌리’의 경우에도 조로현상이 나타나고, 여러 가지 질병에 걸리는 등 문제가 많았다고 한다. 원본만한 복제가 없다고, 아직은 복제가 원본을 따라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이번에 복제된 ‘스너피’는 어떨까?

독일의 비평가 발터 벤야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사진과 영화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복제 기술에 관해 얘기한다. 사진과 영화라는 ‘기술복제’는 외려 원본보다 뛰어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사진이 원작 회화를 베꼈는데, 이제는 거꾸로 회화가 사진을 베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에드가 드가는 그림을 그릴 때 카메라 앵글의 시각을 취했고, 마르셀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 그릴 때 연속촬영 기법을 흉내 낸 바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복제는 어떨까? 과학기술부에서 수행하는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두어, 복제에 따르는 문제점들을 완벽하게 극복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복제를 통해서 결코 원본에 뒤떨어지지 않는 클론을 얻게 될 것이다. 하지만 왜 복제의 질(質)을 굳이 원본의 수준에 묶어놓아야 하는가? 이왕 복제를 하는 김에 원본보다 더 뛰어난 클론을, 말하자면 현생인류보다 더 뛰어난 신인류의 무리를 만들어내면 안 될까?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

실제로 인문학의 상상력은 이미 거기에 가 있다. 작년에 한국을 방문한 칼스루헤 조형대학의 총장 페터 슬로터다이크. 이 철학자는 ‘인간농장을 위한 규칙’이라는 책에서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간의 개선에 관한 생각을 암시한 바 있다.

“장기적 발전이 또한 종적 특성들의 유전학적 개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미래의 인간공학은 명백한 형질 설계로까지 밀고 나갈 것인가? 인류가 종 전체에 걸쳐 탄생 운명론에서 선택적 탄생 및 탄생 이전의 선택으로 방향 전환을 실행할 수 있는가?”

초우량 신인류 만들면 안 될까

2003년 12월 광우병에 걸리지 않는 복제 소를 탄생시킨 황우석 박사.



슬로터다이크의 이 언급이 알려지자, 독일 사회 전체가 격렬한 논쟁의 도가니에 빠져들고 말았다. 언론에서는 이를 ‘차라투스트라 기획’이라 부르며, “이는 나치 우생학의 생명공학적 버전이나 다름없다”고 격렬히 비난하고 나섰다. 좋은 종자를 얻는답시고 유대인과 집시를 솎아내고, 정신박약아들에게 독주사를 놓았던 나치 인종주의의 기억을 갖고 있는 사회이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러나 슬로터다이크는 언론이 자신의 논지를 곡해했다고 반박했다. 실제로 그의 말을 보면 모든 문장에 물음표가 붙어 있다. 자신은 그저 물음을 제기했을 뿐인데, “신문기자들이 이 의문문을 규정문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슬로터다이크의 진짜 생각은 무엇일까? 알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의문문을 가장한 사실상의 규정문이라고 본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슬로터다이크는 ‘전통적인 휴머니즘’의 기획이 실패했다는 데서 논의를 시작한다. 플라톤 이래로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인간들을 길들이려고 했으나, 교양으로 인간성을 개조하는 것은 오늘날 철저히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하긴 아무리 교육을 해도 인간들은 날로 흉악해져만 가고, 세상 어디를 가도 ‘교육의 실패’를 얘기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 그러니 쓸데없이 교육에 매달리느니, 차라리 ‘기술’을 동원하는 게 낫지 않은가?

유럽의 경우에는 이런 발상을 아예 입에서 꺼내는 것조차 못하게 막는 분위기가 있다. 하지만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로 충만한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사정이 다른 모양이다. 슬로터다이크가 인용하는 어느 미국의 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유전자의 간단한 조작만으로 현생 인류보다 더 우수한 종자를 얻을 수 있다면, 나는 그 유혹에 기꺼이 몸을 맡길 것이다.” 엄청난 발언이나, 이 말 때문에 미국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유전자 조작으로 우리보다 잘생기고,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나아가 우리보다 인간성도 좋은 인류를 만들어낸다는 생각. 만약 이 발상이 성공한다면, 언젠가 사회는 현생인류보다 우수한 ‘초인’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들은 아마도 자신들의 과거에 속하는 우리의 미련함을 놀리고, 우리의 동물성을 경멸하고, 우리의 못생긴 외모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마치 현생인류가 네안데르탈인을 비웃듯이 말이다.

선택과 자연도태

사람들은 인간이 자연의 과정에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데 흔히 거부감을 갖고 있다. 슬로터다이크가 말하는 ‘선택적 탄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유전공학을 통한 인간의 형질 개선을 주장하는 이들은, 이게 결코 자연에 대립되는 인공의 개입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전자를 선택해 점점 더 우수한 형질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과정이며, 자신들은 단지 자연이 이미 하는 그 일을 그저 조금 가속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하긴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오늘날의 현생인류가 되기까지 수십만년이 걸렸다. 그 기나긴 시간을 언제 기다린단 말인가? 그 과정을 몇 년 혹은 몇십 년으로 단축시킬 수 있다면, 천박한 동물들의 축사가 고귀한 천사들의 거처로 변하지 않겠는가? 이 얼마나 가슴 벅찬 미래의 비전인가.

게다가 ‘형질 설계!’ 유전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다. 인간이 유전자를 레퍼토리 삼아 자신의 형질을 직접 디자인한다니,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삶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존재미학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독서나 교양, 체육과 선행을 통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작품으로 완성하려 했다. 하지만 교육을 대신해 생명공학이 그 과제를 넘겨받았다. 정말로 모든 이가 제 형질을 디자인하는 삶의 예술가가 될 날이 올 것인가?

더 멋진 신세계

물론 이런 고약한 상상력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준’의 문제다. 지성이나 덕성이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의 속성이 과연 누구나 합의하는 인간의 객관적 성질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지성, 덕성, 아름다움은 ‘문화적 가치’의 영역에 속한다. 예컨대 어떤 권력집단이 ‘우수함’을 가리는 자신들만의 기준을 전 사회에 관철하려 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것은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그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멋진(?) 신세계’가 될 것이다.



주간동아 2005.08.16 498호 (p9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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