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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기 국수전(동아일보사 주최) 도전 5번기 3국 | 이창호 9단(백) : 최철한 9단(흑)

혼합 공격 ‘매운맛’… 최철한 시대 개막

  • 금강산=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혼합 공격 ‘매운맛’… 최철한 시대 개막

혼합 공격 ‘매운맛’… 최철한 시대 개막

2월19일 금강산호텔에서 이창호 9단과 대국하고 있는 최철한 9단.

체감온도 영하 20℃ . 금강산의 2월은 매서웠다. 그러나 탱크처럼 밀어붙이는 최철한(20) 9단의 기세는 금강산의 칼바람을 능가했다.

2005년 2월19일 금강산 제48기 국수전(동아일보사 주최) 도전 5번기 3국. 도전자 이창호 9단을 맞은 최 9단은 시종 자신만만했다. 초반 포석은 서로 평이했다. 세력은 팽팽했고, 균형은 한참 이어졌다.

중반, 이 9단이 우하귀를 파고들었다. 2국 모두 불계패를 한 이 9단은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사면초가. 금강산의 마지노선에 선 이 9단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서렸고, 승부의 여신은 그런 그를 위로하는 듯했다. 그러나 세 불리를 느낀 최 9단의 예상치 못한 반격이 판을 되돌렸다. 최 9단의 승부수에 이 9단의 대마가 어이없이 덜컥 걸려든 것(장면도 참조). 막막한 얼굴로 반상을 지켜보던 이 9단은 결국 151수 만에 돌을 던졌다. 1년 전 국수 타이틀을 뺏긴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칼을 갈아온 이 9단의 완패였다. 관전자들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해가 지지 않을 것 같던 반상의 제왕, 이창호의 처절한 패배와 최철한 9단의 비상은 찰나에 이뤄졌다. 2004년 최우수 기사로 선정돼 ‘멍석’을 깐 최 9단은 기성전, 천원전에 이어 2월19일 국수전까지 다시 장악해 국내 기전 3관왕에 등극했다.

최철한 9단은 이창호 9단의 킬러이자 라이벌이다. 유독 이 9단에게 강하다. 한국 바둑을 대표하는 이 9단이지만 최 9단 앞에만 서면 왠지 작아진다. 최 9단도 이런 천적 관계를 잘 안다.

혼합 공격 ‘매운맛’… 최철한 시대 개막

금강산 대국에서 승리를 거둔 뒤 만물상을 오르는 최철한 9단.

최 9단은 이날 대국에서 예전에 선보였던 이 9단 특유의 바둑 본령을 기대한 듯했다. 이 9단의 진짜 스타일과 당당하게 정면승부를 하고 싶은 눈치였다. 그러나 최 9단의 눈에 비친 이 9단은 상태가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았다. 자신과 마주 앉은 이 9단이 ‘투지’를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했다.



이 9단은 이날 거꾸로 자세를 바꾸어 최 9단 스타일로 치고 나왔다. 역습으로 볼 수 있는 변신이었다. 역습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날카로움이 생명이다. 그러나 이 9단이 보인 ‘변화’에는 기상천외함도, 날카로움도, 순발력도 없었다. 이 9단의 곤혹스러운 처지는 반상에 그대로 묻어났다. 이날 대국에서 이 9단은 주어진 제한시간(4시간)을 모두 썼다. 막판에는 초읽기까지 갔다. 반면 최 9단은 겨우 1시간 54분을 사용했다. 기록자에 따르면 이 9단이 장고 끝에 착수를 하면, 최 9단은 별다른 고민 없이 다음 수를 두었다. 긴장과 여유. 이 9단과 최 9단의 얼굴에는 이처럼 상반된 표정이 연출됐다. 최 9단이 금강산 대국을 통해 얻은 수확은 국수전 타이틀뿐이 아니다. 자신감도 그중 하나다.

“작년에는 흑을 잡으면 괜찮다고 봤는데… 올해는 자신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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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9단과의 팽팽하던 역대 전적도 금강산 대국으로 앞지르기 시작했다. 이쯤이면 일인자의 자리도 욕심낼 만하다. 그러나 조심스럽다. “일인자라…. 욕심이 별로 없다. 아직은 더 배우고 싶다.”

약관 20세. 그러나 말은 여물었다. 그래서 언론과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 ‘올드 보이’.

물론 겸손의 이면에 숨어 있는 야망을 슬쩍 드러내는 기술도 보통이 넘는다.

“솔직히 할 만하다고 보고 있다. 그렇다고 다 이길 것 같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위쪽(상위권) 기사들의 실력은 거의 비슷한 것 아닌가.”

최 9단의 기풍은 독특하다. 공격 스타일은 서서히, 그러나 한 번 걸리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조이는 특성이 있다. 유도로 치면 조이기와 누르기의 혼합된 기술이다. 이 공격에 걸리면 답답하다. 빠져나갈 길을 찾기 어렵다는 게 한국기원 관계자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최 9단에 대한 바둑계의 평가는 냉탕과 온탕이 교차한다. 그에게 거는 기대가 큰 만큼 우려와 지적의 목소리도 적지 않은 탓이다. 최 9단을 미완의 대기(大器)로 보는 시각은 주로 그를 아끼는 원로그룹에서 내놓는다. 실제로 최 9단이 개척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다. 3관왕(국내)의 위업을 자랑하지만, 국제기전 우승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러니 ‘국내용’이란 불명예가 따라다니고, 그래도 할 말이 없는 최 9단이다. 최 9단도 이 문제가 적이 걸리는 표정이다. 최 9단은 3월3일부터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응씨배 결승전의 남은 대국에 주력하려는 눈치다. “꼭 우승하고 싶다”는 의지도 피력한다. 이 대회에 “올인”하겠단다. 그의 ‘올드 보이’란 별명은 당분간 ‘올인 보이’로 바뀔 듯싶다.

최 9단의 비상만큼이나 이창호의 부진도 눈길을 끈다. 한국 바둑계는 그의 연패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한다. 슬럼프의 배경을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나이 탓이라는 지적도 있고, 일시적 현상이란 기대감도 흘러나온다. 그 뒤는 애정 어린 충고가 따른다.

“이 9단은 자신의 시간과 자신의 바둑을 가져야 한다.” 때로는 금강산의 만물상처럼 수만 가지 형상을 반상에 옮기는 변화무쌍함에 눈떠야 하고, 때로는 힘과 기세로 태평양을 휘어잡는 태풍처럼 강한 카리스마로 반상을 휘어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충고다.

이에 자극받은 탓일까. 이 9단은 2월25일 중국 상하이에서 열린 농심배에서 4연승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9단의 천적으로 등장한 최 9단에게 한국 바둑계는 많은 것을 기대한다. 그의 등장은 한국 바둑계의 권력 지도가 바뀌고 있음을 예고한다. 절대 지존을 허락하지 않는 바둑계는 이제 춘추전국시대로 접어들었다.



주간동아 2005.03.08 475호 (p88~89)

금강산=김시관 기자 sk2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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