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5

2005.03.08

DNA 분석 확대 범죄 두 손 들까

獨, 모스함머 사건 신속 해결로 적극 활용 탄력 … 개인정보 유출 우려 반대 의견도 만만

  • 슈투트가르트=안윤기 통신원 friedensstifter@hanmail.net

    입력2005-03-03 17: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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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14일 독일 뮌헨에서는 유명 의상디자이너 루돌프 모스함머가 자택에서 전화선에 목이 졸린 채 피살체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모스함머는 영화배우 출신 미 캘리포니아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 테너 호세 카레라스 등 세계 각국 유명인사들의 의상을 만들던 명성 있는 디자이너였고, 평소 독특한 차림새와 기인 같은 행각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던 사람이었다.

    독일 언론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 사건은 사건 발생 이틀이 채 되기도 전에 유력 용의자가 체포되면서 일단락됐다. 용의자는 25세의 이라크 청년 헤리쉬였다. 그는 동성애 매춘의 화대로 약속한 2000유로(약 300만원)를 모스함머가 주지 않으려 해 다툼 끝에 범행을 저지르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렇게 신속하게 범인을 찾아낸 데는 유전자분석이 결정적 구실을 했다. 수사관들은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화선에 묻은 미세한 피부세포 조각에서 유전자 표본을 검출한 뒤 이것을 기존 자료들과 비교함으로써 쉽게 용의자를 찾아낼 수 있었다. 헤리쉬가 2001년 폭행과 여성 성추행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비록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경찰이 그의 유전정보를 DNA 데이터뱅크에 보관해둔 덕분이다.

    슈뢰더 총리 지지로 ‘찬반논쟁’

    여론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이 이토록 신속하고 깔끔하게 처리되자 정부와 경찰 관계자들은 한껏 고무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바이에른 주 내무장관 귄터 벡슈타인은 “앞으로 유전자분석을 범죄수사의 기본으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주지사 슈토이버 또한 “유전자분석은 21세기 수사방법의 핵심이 돼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민당(CDU) 원내 부대표 볼프강 보스바흐 또한 시사잡지와 한 인터뷰에서 “지금까지 경찰은 용의자에 대해 지문 채취, 얼굴 사진 그리고 신상명세만 기록해두었는데, 이제는 유전자 표본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용의자 유전자 정보를 채취해 방대한 분량의 데이터베이스(DB)를 구축해두면 향후 범죄수사에 유용하게 쓰일 것이란 생각이다.



    독일에서 지금까지 유전자분석이 수사에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1998년 9월 발효된 DNA에 의한 신분확인법에 따라 독일 비스바덴에 있는 연방범죄수사국은 약 38만개의 유전자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독일 인구가 약 9000만명인 점을 고려할 때 이는 그리 방대한 수준이 아니다. 주로 법정에서 중형선고를 받은 사람들, 혹은 재범 우려가 높은 강간범, 인신매매범, 살인범 등의 유전정보가 수집,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수사관들이 자료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법원 판사의 승낙을 얻어야 한다. 사소한 범법 사실 때문에 경찰서를 드나든 사람들은 이 조사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모스함머 살인사건을 계기로 유전자분석 방법을 더욱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미 2004년 11월 각 주의 내무장관들이 모인 회의에서도 의견이 모아졌다. 결정적으로 1월17일 연방 내무부장관 오토 쉴리가 TV 방송에서 감식이 필요한 모든 범죄사건 수사에 유전자분석 방법을 사용할 것이라고 밝히고, 이틀 뒤 슈뢰더 총리가 쉴리 장관의 의견을 지지하며 “모든 범죄와의 전쟁에서 유전자분석 방법을 더욱 효율적으로 사용하라”고 주문하면서 본격적인 찬반논쟁에 들어갔다.

    유전자 감식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무엇보다 개인정보 보호를 중시하는 측에서는 유전자 DB 확대가 가져올 폐해를 우려한다. 집권 연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녹색당 원내 대표인 폴커 벡은 유전자를 통해 질병, 성별, 종족, 나이 등 노출하고 싶지 않은 개인의 특징이 제삼자에 의해 판독될 수 있다는 이유로 유전자 DB 확대를 반대했다. 이런 신상 정보는 개개인이 스스로 감독·관리할 자유를 가져야 하는데, 이런 기본권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민당(FDP) 내무 담당 대변인 막스 슈타들러 또한 유전자분석을 지문, 사진 등 다른 감식 방법과 동격으로 놓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발했다. 녹색당 당수인 클라우디아 롯은 중한 범법 행위에 대해서만 유전자분석 방법이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요구했다. 롯은 “이 수사기법을 확대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의심받는 사회에 살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꼬집었다.

    개인정보 장악 소리 없이 진행

    독일판사연맹 역시 유전자 채취, 분석의 확대 적용을 경고하고 나섰다. 연맹의 의장 볼프강 아렌회벨은 “개인의 신상에 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유전정보를 탐내는 집단들에 유전자 DB가 누출된다면 어떤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겠는가”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헌법재판소 역시 유전자 감식 방법 사용을 제한하고 있는 형사소송법의 조항에 대한 몇 차례의 판결을 통해 개인의 신상정보 관리 권한을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연방 내무장관 쉴리는 경범, 예컨대 좀도둑에 대해서까지도 강하게 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다룬 한 토론회에서 기사당(CSU) 사무총장인 마르쿠스 죄더는 반대 의견을 내놓는 녹색당을 “범죄 현실을 망각하고 있다”면서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유아살해범이나 강간범의 인권을 사회 안정보다 높이 두려는 사람은 범죄의 공범자나 다름없다”며 “정보 보호나 범법자 인권 보호가 피해자를 보호하는 것보다 앞설 수는 없다”고 역설했다.

    범죄수사와 사회안정을 위해서라면 개인정보 보호가 조금 손상될 수 있다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는 이러한 분위기는 사실 20년 전만 해도 독일에서 상상할 수 없었다. 83년 콜 정부가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시도하다 사회 각 분야의 맹렬한 저항에 못 이겨 포기한 바 있다. ‘유리시민(Glaserne Burger)’, 즉 국가가 국민의 속을 유리처럼 꿰뚫어보려 한다는 두려움이 수만명을 움직여 헌법소원, 보이콧, 시위 등 격렬한 저항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 국가의 정보 장악 시도는 서서히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예컨대 e메일은 이미 국가가 합법적으로 훔쳐볼 수 있다. 법에 따라 모든 통신사업자는 의무적으로 고객의 통화 내용을 보관해야 한다. 2004년 4월부터 은행도 국가기관의 요청이 있을 경우 언제라도 고객의 계좌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 2006년부터는 지문 날인된 여권이 발급될 계획이다. 현재 독일 정부는 주민등록증에도 지문 날인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몇 년 전 큰 소동을 일으켰던 수사 목적을 위한 도청 또한 여전히 말없이 진행되고 있다. 이제 독일정부는 광범위한 유전정보 DB 구축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이 모든 조치를 정당화하는 근거는 언제나 ‘범죄 예방’ ‘안정된 사회’라는 이상적 목표다. 이것은 물론 누구나 바라는 바다. 하지만 그 대가로 개인신상에 관한 모든 정보를 유리처럼 훤히 노출하라면? 누군가에 의한 통제가 상존하는 유리 사회 속에서 개인은 더 불안을 느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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