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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진의 큰 역사

사진의 큰 역사

사진전이 한창이다. 헬무트 뉴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안드레아스 거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등 지난해와 올해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사진가들의 작품을 갤러리에서 감상할 때면 드는 생각이 하나 있다. 사진은 미술인가? 미술이라면 언제부터 회화처럼 예술의 한 장르로 간주되기 시작했는가? 20세기 독일의 걸출한 문예비평가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작은 역사’라는 글에서 기술복제시대의 새로운 예술양식으로 사진을 주목한 이래, 21세기는 사진의 시대라 할 정도로 사진의 자리는 막강해졌다.

‘현대’라는 시간성에 사로잡힌 예술가치고 사진을 간과한 사람은 드물다. ‘현대성’의 창시자로 불리는 19세기 상징주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 샤를 보들레르가 그렇고, 보들레르에 열광해 아예 파리에 와 살다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파리에 관한 매혹적인 책까지 쓰고, 결국은 나치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눈을 감은 발터 벤야민이 그렇고, 보들레르와 벤야민과 같은 대문자 B의 성을 가진 20세기 주목할 만한 문화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카메라 루시다’)가 그렇다.

삭막한 현대의 공간도, 제국의 박물관도 한 장 사진에

보들레르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육필 편지에 ‘어머니의 사진을 갖고 싶어요’라고 쓰면서 그러나 ‘어머니가 사진을 찍으실 때에는 제가 있을 때여야 해요. 어머니는 사진에 관해서 잘 모르시니까요’라고 덧붙인다(‘나다르 사진집’). 보들레르의 이 말은 이미 그 자신 사진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때가 언제냐. 1865년,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이다. 보들레르가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절친한 친구인 사진가 나다르가 있었기 때문이다.

펠릭스 나다르는 사진의 역사에서 맨 앞자리에 놓이는 인물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가장 준수한 이미지의 보들레르의 초상과 화가 밀레, 들라크루아, 시인 테오필 고티에, 네르발,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와 그 아들, 음악가 베를리오스 등의 초상을 사진으로 볼 수 있다.



사진 기자 겸 만평가, 또 소설가이자 비행사였던 나다르가 결국 사진가로 이름을 새기면서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빛에 대한 감각은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보다도 더 배울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주제에 대한 도덕적 통찰력이다.”

갤러리의 사진전에 가서 새로운 경향의 사진들을 접할 때면 자연스레 되새겨지는 대목이다.

현재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안드레아스 걸스키와 토마스 스트루스’전의 작품들은 주제에 대한 도덕적 통찰력이라는 나다르적인 시각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들은 독일 현대 사진을 대표하는 두 사람으로 걸스키는 현대성을 상징하는 삶의 공간들, 즉 호텔 로비, 거대한 유통창고, 백화점, 증권시장 등 전형적인 반복 혹은 복제 가능한 형태를 띤 공공성의 장소들을 주목하고, 스트루스는 과거성을 상징하는 성소(聖所)들, 즉 거대한 박물관·성당들을 싸안아 렌즈에 담는다.

3개층에 전시된 두 작가의 작품을 모두 합쳐봐야 스무 점도 안 된다. 스트루스의 박물관 시리즈인 ‘페르가몬 박물관 2’와 사진에 디지털을 접목해 할인매장의 기계적인 복제성과 평면성을 제시한 ‘99센트 2’ 앞에 아무리 오래 서 있는다고 해도 감상은 10여분이면 끝난다. 주제와는 별도로 감상 뒤끝이 단순 명료하다. 차갑다. 왜인가? 사진적, 아니 독일적인 것인가? 사진전을 나와서 오히려 생각이 복잡 미묘해진다.

페르가몬 박물관은 어떤 곳인가? 일찍이 프랑스와 영국이 루브르와 대영박물관에 경쟁적으로 그리스와 이집트 문명을 어마어마하게 재현해놓은 것을 보고 뒤늦게 그에 질세라 더 어마어마하게 소아시아(현 터키)의 페르가몬 유적을 통째로 떠안아다 놓은 곳이다. ‘99퍼센트 2’란 작품은 통조림이며 주스며 초콜릿들이 흐트러짐 없이 빼곡히 정비돼 있는 99센트 할인매장을 두 컷으로 나란히 펼쳐놓은 것이다. 보는 순간, 그들 앞에 서 통조림을 집거나 초콜릿을 집는 나를 떠올리게 된다.

현대성이란 무엇인가.

사진의 큰 역사

함 정 임/ 소설가

처음으로 그것을 문제 삼은 보들레르에 의하면 변화로운 현대인의 불안한 삶을 순간순간 자각하는 것이다. 자각은 곧 영원성으로 연결된다. 과거에서 미래로, 미래에서 가장 오랜 뿌리, 영원으로의 순환. 시간의 순환, 곧 동시성, 나아가 동시대성을 깨닫는 것이다. 현대의 공간에서 인간은 왜소하다. 제국의 박물관에서 폐허의 옛 문명은 무력하다. 그러나 삭막한 현대의 공간도, 막강한 제국의 박물관도 한 장의 사진에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거기에 사진의 큰 역사가 있다.



주간동아 2005.03.01 474호 (p96~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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