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4

2005.03.01

‘독도 영웅’ 안용복, 일본에 살아 있다

영유권 확인 위한 발자취 日 문서와 구전으로 남아 … 공로 무시하고 기록 없는 조선과 대비

  • 김래주/ 소설가 laejoo@dreamwiz.com

    입력2005-02-24 12: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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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도 영웅’ 안용복, 일본에  살아 있다

    안용복이 일본에 첫발을 디뎠던 시마네현의 오키섬. 당시 이 섬은 돗토리성 소속이었는데, 돗토리 현립박물관에는 안용복의 일본 방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안용복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시마네현 옆 돗토리(鳥取)현의 현립박물관이었다. 돗토리 현립박물관은 옛 성터 안에 있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이 성을 찾아와 성주를 만났다고 한다.

    박물관 관계자는 돗토리현의 ‘안용복 사건’을 전하는 자료로 18세기 오카지마가 남긴 ‘죽도고(竹島考)’와 ‘인부연표(因府年表)’, 그리고 당시 성주의 가신이었던 와다 시키부가 쓴 ‘공장(控帳·일지)’ 등을 내밀었다. 이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왜인들은 이곳까지 찾아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한 안용복을 ‘안핀샤’로 불렀으며, 안용복은 얼굴이 검고 고향은 ‘동래부 부산 좌천1리’였다. 국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다.

    안용복은 처음 왜인들에게 나포돼 일본에 갔다. 울릉도에 출어하는 왜인들을 제지하기 위해 일단의 청년을 이끌고 울릉도에 갔다가 동료인 박어둔과 함께 왜인들에게 붙잡혀 일본에 가게 된 것인데, 이러한 사실은 ‘죽도고’의 ‘오타니가(家) 선인(船人)에 의한 조선인 연행’이란 항목에 자세히 나와 있다.

    안용복이 끌려온 곳은 돗토리성의 부속 섬인 오키(隱岐)섬이었다(지금 오키섬은 시마네현 소속이다). 안용복은 숙종 19년(1693년) 3월18일, 오키섬을 구성하고 있는 두 개의 큰 섬 도젠(島前)과 도고(島後) 중에서 도고에 상륙했다. 필자는 직접 도고섬을 찾아가 안용복의 흔적을 찾아보기로 했다.

    일본 관원들에게 ‘도해허가권’ 발급 따져



    시마네현 항구에서 페리를 타고 2시간여 만에 도착한 오키섬 부두에는 ‘다케시마! 돌아오라 섬과 바다여’라고 적힌 대형 입간판이 있었다. 오키섬에서 안용복은 제법 알려져 있는 인물이었다.

    한 주민을 붙잡고 안용복에 대해 묻자, 그는 필자가 한국인임을 직감한 듯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향토관으로 가보라”고 했다. 향토관 한쪽에는 다케시마와 관련한 별도의 전시 코너가 있었고 그곳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독도 영웅’ 안용복, 일본에  살아 있다

    일본 시마네현이 자국 민영방송을 통해 방영하기 시작한 독도 영유권 주장 광고

    ‘…소화 27년(1952년) 1월, 한국이 이승만 라인을 선언하여 일방적으로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한 이래 그 영유권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케시마 근해는 일본해(동해) 굴지의 좋은 어장으로 풍부한 수산자원이 있는데, 200해리 배타적 경제수역 시대인 지금 다케시마는 더욱 중요한 섬이 되고 있다.’

    향토관에도 안용복에 관한 자료가 보관돼 있었다. 오키섬 도고에 끌려온 안용복은 이 섬의 책임자인 다이칸(代官·도주)에게 인도됐다. 일본 기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일본어에 능했다. 안용복이 살았던 동래 좌천동이 왜관(倭館)이 있었던 곳이라 이들과 접촉하며 일본어를 익힌 것으로 추정된다. 안용복은 나포돼온 처지임에도 굴하지 않고 다이칸에게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독도 영웅’ 안용복, 일본에  살아 있다

    안용복이 2차 도항 때 숙소로 사용했던 돗토리성 인근의 동선사.

    오키섬에서 구전되는 바에 따르면 안용복은 그를 조사한 일본 관원에게 “왜 왜인들은 울릉도와 독도를 오는 데 일본 당국으로부터 ‘도해(渡海)허가원’을 발급받고 있느냐”라고 따졌다고 한다.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토라면, 일본 당국은 두 섬으로 가는 왜인들에게 ‘도해허가원’을 발부할 리 없다고 보고 이를 따진 것.

    이에 대해 도고의 다이칸은 대답이 궁했는지 안용복을 돗토리 성주가 있는 본토의 요나코(米子)로 보냈다. 요나코는 17세기 일본 막부로부터 울릉도 사업권을 받아내 동해를 건너다닌 오타니(大谷甚吉)와 무라카와(村川市兵衛) 선단이 있던 곳이다. 이들은 울릉도에서 전복을 비롯한 어패류와 향나무 등을 대량 채취해 막부에 진상하고, 일부는 일본 전국으로 유통시킨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나코 앞바다를 흐르는 수로를 1km쯤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었다는 오타니 선단의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4대에 걸쳐 울릉도 사업을 한 오타니가는 막대한 돈을 벌어 50여 칸짜리 대저택을 꾸렸다고 하니, 울릉도에 대한 이들의 약탈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요나코에서 안용복이 성주를 만난 과정은 명확치 않다. 일본 측 기록은 안용복이 오타니 저택에서 두 달간 체류하며 관원을 통해 성주에게 자신의 주장을 전했고, 조선으로 돌아가기 직전 성주로부터 초대받은 것으로 돼 있다. 그 사이에 에도(江戶)에 있는 막부는 ‘울릉도·독도 도해금지 결정문’을 보내왔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안용복이 어떤 논리를 펼쳤기에 성주가 막부에 도해 금지 결정문을 보내주도록 상신했을까 하는 점이다. 일본 측 기록물은 성주가 막부에 상신한 것과 막부의 국서(國書)가 내려온 것에 대해서는 세부적인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3개월을 머물고 그해 6월 초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 안용복은 일본의 표류민 송환원칙에 따라 나가사키와 대마도를 거쳐 돌아오게 되었다. 울릉도와 독도를 되찾아왔다는 안용복의 포부는 대마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농토가 부족한 대마도는 돗토리성과 별도로 울릉도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 대마도의 도주(島主)는 안용복이 갖고 온 막부의 국서를 빼앗고, 그를 일본으로 무단 월경한 죄인으로 몰아 동래부 관아에 고발해버린 것이다. 동래부로 인도된 안용복은 조선 조정의 당파 싸움과 조선 조정에 대한 대마도주의 간계로 인해 2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독도 영웅’ 안용복, 일본에  살아 있다

    안용복의 1·2차 행로도.

    조선 조정은 옥살이 시키고 유배 보내

    1695년 가을쯤 안용복은 감옥을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직후 그는 또다시 일본행을 구상한다. 이듬해 5월 안용복은 상선을 소유한 승려 뇌헌을 비롯한 동래 사람 등 십수명을 규합해 선단을 이끌고 울릉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조업 중인 왜인들을 만나 이들을 나포한 뒤 이들을 앞세워 오키섬으로 갔다.

    오키섬에 도착하기 전 그는 일행 모두에게 관복을 입게 했다. 1차 도항 때 신분이 적절치 않아 곤란했던 것을 감안해 위장한 것이다. 안용복은 해양을 관장하는 정3품 당상관을 칭했고, 다른 일행은 조선의 관리로 행동하도록 했다. 오키섬에 도착한 안용복은 다이칸과 인사를 나누고 바로 돗토리성으로 배를 몰았다.

    그런데 본토 해안 근처인 나가오바나(長尾鼻)라는 곳에서 배가 좌초하면서 육지에 올라, 돗토리성 관원의 안내를 받아 지금은 동선사(東善寺)로 불리는 칸논도(觀音堂)란 사찰에 머물게 되었다. 이 동선사에서 만난 한 승려는 이렇게 전했다.

    “이 절이 500여년 됐는데 그분(안용복) 얘기는 대대로 듣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주와의 면담을 기다리며 근처에 있는 아오지마의 온천을 즐겨 찾았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 귀한 손님을 맞았던 거지요.”

    안용복은 한 달여 만에 성주와 재회했다. 이때 그는 대마도주의 무역 비리를 폭로하며 이를 막부에 전해달라고 요청했다. 궁지에 몰린 돗토리 성주는 대마도주의 비리는 대마도 스스로 해결토록 현지에 통보하고, 막부에 대해서는 국서를 재발부해달라고 품신했다.

    이에 막부는 3년 전 약속을 재확인하고 조선 조정에 국서가 안전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대마도까지 직접 관리를 파견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 약속은 안용복이 귀국한 1697년 2월 일본 국서가 조선 조정에 도착함으로써 이행됐는데, 이때 안용복은 대마도를 피해 동해를 가로질러 돌아오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그를 또다시 무단월경죄로 체포해 옥살이 시키다 유배를 보냈다. 그 후 조선 기록에 더는 안용복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다. 안용복의 쾌거에도, 조선은 오히려 그를 ‘잊어야 할 영웅’으로 방기해버린 것이다.

    안용복이 없었다면 한국은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기 힘들어졌을 것이다. 지금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이 고시를 통해 독도를 편입한 것을 독도 영유권의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1936년 일본 육군이 만든 ‘지역구도일람표’와 1933년 해군이 제작한 ‘조선연안수로지’는 독도를 조선 영역으로 표기해놓고 있다. 안용복의 노고가 없었다면, 조선을 침탈한 일본군은 이러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안용복은 일본에서 엄연히 역사로 살아 있건만, 우리는 안용복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시마네현에 펄럭이는 ‘돌아오라 다케시마여’라는 현수막은 우리로 하여금 역사에서 안용복을 복권시키는 절실한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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