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74

2005.03.01

캐나다 ‘다문화 정책’ 인기 시들

국민 대상 설문조사 결과 지지율 급락 … 제1 야당도 “국가 분열시키는 역기능 커”

  • 벤쿠버-황용복 통신원 facebok@hotmail.com

    입력2005-02-24 11: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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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5월 AP통신이 캐나다 미국 멕시코 일본 유럽연합 등 5개 나라 사람들을 대상으로 자국의 이민정책과 그에 따른 문화적 복합성에 관한 의견을 물었다. 각 나라에서 약 1000명씩이 이에 응답했는데, 먼저 ‘귀하의 나라 사정에 이민자들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가?’라는 물음에 캐나다 응답자 중 ‘매우 좋다’와 ‘좋다’라고 답한 사람의 합계가 73%로 같은 질문에 대한 다른 국가의 응답자 비율 36~44%보다 월등히 높았다. 이 질문에 캐나다인의 20%만 ‘매우 나쁘다’ 또는 ‘나쁘다’라고 응답했고, 나머지 7%는 ‘모르겠다’였다(표 참조).

    같은 조사에서 캐나다인의 83%는 종교적 다양성이 국가를 위해 좋다고 응답했고, ‘한 국가 내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같은 전통을 공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58%가 동의하지 않았다.

    이처럼 캐나다는 열린 나라이고, 그 열림의 논리가 다문화다. 그러나 캐나다가 처음부터 열려 있었고, 다문화가 현재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가치로 뿌리내렸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어쩔 수 없어 이민의 문호를 개방했고, 그에 따른 다문화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도 상당수에 이른다.

    그동안 다문화 수용의 모범 국가로 ‘유명’

    캐나다는 19세기 말부터 본격적으로 이민자를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어를 쓰는 이민자만 받을 생각이었으나, 오려는 사람이 많지 않자서유럽과 북유럽·동유럽·남유럽 순으로 개방했다. 유색인종은 마지막으로 받아들였다.



    1960년대는 캐나다의 프랑스어권 지역인 퀘벡의 분리독립 문제가 건국 이래 처음으로 불거진 시기였다. 프랑스어권 주민들은 자신들이 영국계와 함께 나라를 세운 공동의 ‘개국공신’인데 날이 갈수록 영국계 다수에게 눌려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가 따돌림받고 있다고 느껴왔던 것. 자칫하면 나라가 분열될 위기에 맞닥뜨리자 연방정부는 프랑스어권을 다독거리기 위해 영어와 프랑스어를 모두 공용어로 하고 영어권과 프랑스어권 문화를 함께 북돋우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

    두 언어를 공용어로 삼는 데 대해서는 국가적 공감대가 쉽게 형성됐으나, 문제는 두 문화를 고양한다는 부분이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문화에 뿌리가 닿아 있지 않은 원주민과 영국 및 프랑스 이외의 유럽인 후예, 그리고 유색인 등으로부터 거센 항변이 제기된 것이다. ‘영어와 프랑스어권의 문화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우린 뭐란 말인가. 우리도 이 나라에 기여했지 않은가?’

    이 주장에 연방정부는 잘못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다. 71년 피엘 트뤼도 연방총리는 캐나다가 다문화주의 나라라고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잇따라 관련 법을 제정하고, 정책을 전담해 추진할 연방정부 부처도 신설했다.

    사전적 의미의 다문화주의는 한 나라의 틀 안에서 여러 인종이나 문화집단이 상대를 존중하며 공존하는 가치관을 말하지만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실행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소수인종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장치, 문화적 다양성을 권장하는 프로그램, 이민의 문호를 세계 각지에 고루 여는 배려 등이 이에 해당한다. 캐나다는 이런 체계적 장치를 사실상 세계에서 처음으로 갖추었고, 따라서 다문화의 원조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캐나다의 다문화주의는 몇 년 뒤 호주에도 ‘수출’됐다.

    미국이나 캐나다나 모두 이민을 통해 다양한 인종을 받아들이는 나라다. 그러나 이민자들의 문화를 수용하는 두 나라의 태도는 오래 전부터 차이가 있었다. 미국은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민자들을 모아 ‘미국 정신’이라는 한 용광로에서 녹여낸다는 뜻에서 ‘도가니(melting pot) 나라’로 불린다. 반면 캐나다는 다양한 문화를 굳이 녹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공존하도록 용인한다는 뜻에서 ‘모자이크 나라’로 불린다.

    미국은 영국과의 전쟁을 통해 독립을 이루었기 때문에 건국 직후부터 새 나라 혹은 미국 정신을 강조했다. 예컨대 미국은 20세기 초 중서부 공업지대에 유럽 각국의 이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이들을 ‘유럽인 아닌 미국인’으로 바꾸기 위해 영어 교육은 물론 갖가지 미국화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이때 하루 한 번 이닦기, 악수할 때 상대의 손 꼭 쥐기 등 ‘미국 예절’까지 가르쳤다.

    유색인종 이민 늘자 경계심 더 높아져

    그 무렵 캐나다도 여러 유럽 나라 사람들을 받아들였지만 이들을 특별히 캐나다화하거나 그때까지의 주류인 영국 문화에 동화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는 캐나다 사람들의 문화적 아량이 본래부터 미국인보다 넓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때까지 이 나라가 특별한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했던 것이 더 큰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어떻게 출발했든 이질문화를 끌어안는 캐나다인들의 수용성은 이 나라의 전통으로 쌓여 지금 캐나다는 세계에서 가장 열린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이 나라가 다문화 정책을 공식 채택할 당시 국민들과 야당은 대부분 이를 적극 지지했다. 다문화는 캐나다의 명예로운 가치관이자, 열린 나라를 지향하는 일종의 정치이념으로 깃발을 올렸다. 지금도 캐나다인들에게 자국에 대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점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의료보장제도와 더불어 다문화가 늘 선두로 꼽힌다.

    그러나 30여년이 지난 지금 다문화에 대한 캐나다인의 지지가 역전됐다고 볼 수는 없지만, 옛날 같지 않다. 레스 브리지 대학 레지널드 비비 교수는 캐나다 국민을 대상으로 정부가 각 인종집단이 각각의 문화를 지킬 수 있도록 정책을 펴야 하는가, 아니면 이들을 흡수·동화시켜야 하는가의 의견을 85년과 95년에 각각 물었다. 도가니가 옳으냐 모자이크가 옳으냐는 이 질문에 첫 조사 때는 56%가 모자이크를, 27%만이 도가니를 꼽았다. 10년 뒤 두 번째 조사에서는 모자이크 44%, 도가니 40%의 지지율을 보였다.

    90년대 이후 각 정당도 다문화를 정책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문화주의 채택 당시 여당이었고 지금도 집권하고 있는 자유당은 최근의 총선 때 다문화를 공약 목록의 뒤쪽에 ‘구겨’넣고 있고, 제1 야당인 보수당은 다문화가 순기능보다 국가를 분열시키는 역기능이 더 크다고 본다. 사회주의 정당이자 원내 세력이 가장 약한 신민당만이 일관되게 다문화를 지지하고 있다.

    다문화가 이처럼 시들해진 원인과 관련해 여론조사 수치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캐나다 주류 사회의 정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여론조사 기관들은 ‘다문화가 좋으냐 싫으냐’는 단순한 질문 이외에 교묘하게 설계된 다른 질문을 함께 던져 응답자들의 실질적인 성향을 알아내려 노력한다. 이런 방식을 통해 다문화를 지지하는 응답자 중 상당수가 확고한 소신보다는 시대의 흐름 또는 논리적 정당성에 떠밀려 본의와 다른 응답을 하는 것이 확인된다.

    이밖에 60년대의 이민법 개정을 통해 유색인종에게 차별 없이 이민의 문호가 개방된 것과 곧이어 채택된 다문화주의가 상승 작용을 하면서 최근 이민자들의 약 80%가 유색인종인 점도 다문화 지지율의 하락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된다. 다문화 채택 초기 캐나다에서 소수인종의 비율은 미미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지면서 백인들의 경계심이 높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다문화는 낭만적 인식만으로 접근할 수 없는, 인간의 정체성과 관련되는 어려운 문제다. 특히 긴 세월 단일민족으로 이질 문화를 접할 기회가 적었던 한국인들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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