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8

2005.01.11

인터넷 사기꾼들아 꼼짝 마!

네티즌 동일 피해자 결집 적극 대응 … 범죄 정보 공유, 수사요청 등 눈부신 활약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5-01-05 1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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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넷 사기꾼들아 꼼짝 마!
    심○○란 이름은 도용된 명의더군요. 싸이월드 미니홈피 뒤져서 집 전화번호를 알아내 연락했더니, 몇 달 전 신분증과 통장이 든 가방을 통째로 잃어버린 적이 있답니다.”

    “휴대전화는 이쫛쫛란 이름으로 충남 지역에서 개통한 겁니다. 주소지는 충남 보령시입니다.”

    2004년 12월16일 개설된 온라인 커뮤니티 ‘사기당한 분들 모이세요’(cafe.daum.net/ ps2sagi)에는 2주일도 채 되지 않아 ‘010-××××-5087’이라는 번호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사기꾼’에게 당한 피해자 50여명이 모였다. 이들은 디지털카메라나 전자오락기 등을 시중가보다 싸게 팔겠다는 이 사기꾼에게 적게는 10만원에서 많게는 60만원을 송금했다가 돈을 떼어먹힌 사람들. 불과 2주일 만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피해자들은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5087’ 사기꾼이 이용하는 여러 개의 통장 계좌번호와 명의를 도용당한 사람, 용의자로 보이는 사람의 주소 등을 찾아내는 등 사기꾼의 ‘정체’에 한 발씩 다가서고 있다.

    인터넷 사기 범죄 피해자들이 결집하고 있다. 각종 온라인 게시판이나 커뮤니티 등을 통해 모인 이들은 인터넷 사기 범죄 전반에 대한 정보 공유에서부터 동일한 사기꾼에게 당한 피해자 모집, 사기꾼 관련 정보 모집, 경찰 등 수사기관 대처 요령 등 인터넷 사기에 대한 공동 대응에 나서고 있다. 2003년 5월 개설된 ‘사기꾼을 때려잡자’(cafe.daum.net/catchall)에 가입한 회원이 2004년 12월 말 현재 1만1200여명에 달할 정도로 인터넷 사기에 대응하고자 하는 누리꾼(네티즌)의 열의가 뜨겁다.

    범죄, 대응 카페 회원 1만여명



    온라인을 통한 개별 거래가 활성화할수록 극성을 부리는 인터넷 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에게 접근, 대출에 앞서 특정 물품을 사거나 대출금 일부를 송금하게 한 다음 잠적하는 유형과 휴대전화나 디지털카메라 등 물품 구입 금액을 미리 송금하게 한 다음 연락을 끊는 유형이 그것이다. ‘사기꾼을 때려잡자’를 개설한 이모씨(30)는 인터넷을 통해 안 사기꾼이 거액의 사업자금 대출을 성사시켜주겠다며 로비자금 명목으로 요구한 1억원을 사기당한 경험이 있다.

    누리꾼들의 적극적인 ‘사기꾼 검거’ 의지는 실제 범인 검거로도 이어지고 있다. 경남 김해에 사는 박모씨(30)는 인터넷 경매사이트에서 안 조모씨에게 송금한 중고 외제 승용차 선불금 1200만원을 그대로 떼어먹혔다. 박씨는 이후 인터넷 게시판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렸고, e메일 연락 등을 통해 자신과 유사한 피해를 본 4∼5명의 피해자를 찾아냈다.

    박씨는 “다른 피해자들과 함께 인터넷에서 조씨의 사기수법에 대해 적극 알렸고, 2004년 10월 조씨와 접촉한 여대생이 그를 수상쩍게 여겨 경찰에 신고해 검거됐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씨는 10여건의 사건에 연루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외제 승용차 판매 사기 혐의였다”고 말했다.

    인터넷 사기꾼들아 꼼짝 마!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왼쪽)와 인터넷 사기 피해 사실을 공개하는 누리꾼들.

    디카족들이 애용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디씨인사이드(www.dcinside.com)의 ‘유명 사기꾼’ 홍모씨는 그에게 당한 누리꾼들의 적극적인 ‘수사’로 결국 전남 목포에서 검거됐다. 홍씨는 중고 디지털카메라 판매업체 사장 행세를 하며 수십명의 누리꾼이 송금해온 선불금을 가로채왔다. 이에 피해자들은 대책위원회 커뮤니티까지 꾸리고 홍씨의 IP 추적 등에 나섰다. ‘홍씨 잡기’에 참여했던 김모씨(24)는 “서울에 있는 피해자들이 IP를 추적해 홍씨가 전남 목포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고, 이를 목포에 사는 피해자에게 알려주었다”고 말했다.

    ‘사기꾼 파일’ 작성 범죄 예방 효과로

    이처럼 인터넷 사기 피해를 당한 누리꾼들이 직접 사기꾼 검거에 나서는 이유는 경찰의 적극적 수사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경찰청 집계에 따르면 2003년 일반 사이버 범죄가 5만4000여건을 훌쩍 뛰어넘는 등 인터넷 사기가 급증하고 있는 데다 대부분 타인 명의를 도용해 만든 대포폰과 대포통장이 범행에 사용되고 피해액이 수만원에서 수십만원의 소액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경찰이 개별 사건마다 적극 수사에 나서기는 어려운 형편.

    많은 누리꾼들이 인터넷 사기 피해를 당한 즉시 사이버수사대나 인근 경찰서에 고소·고발장을 접수하지만, 몇 달이 지난 뒤에야 겨우 ‘대포폰과 대포통장이기 때문에 증거가 부족하다’거나 ‘용의자 소재 파악이 안 된다’는 답변을 듣기 일쑤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관계자는 “이런 사기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관이 처리해야 하는 사건이 하루 평균 50건에 달한다”며 “소환에 응하지 않을 경우 기소중지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인터넷 사기 피해자들이 한데 모이면 소액의 단순 사기 사건은 대형 사기 사건으로 변모할 수 있다. 실제로 디지털카메라 판매 사기를 벌여오다 2004년 3월 검거된 임모씨의 경우 누리꾼들이 임씨로 인한 사기 피해 사실을 활발하게 알린 덕분에 경찰이 적극 수사에 나서게 됐다. 수사기관에 여러 차례 고소·고발장이 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누리꾼들이 자발적으로 계좌번호, 피해액수 등을 기록한 ‘피해자 명단’을 만들고 청와대 민원실에 탄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한 ‘5087’ 피해자들도 개별적인 사건 접수에만 멈추지 않고 단체로 경찰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이 목표다. 피해자들 중 한 명인 김모씨(25)는 “피해자 수십명에 피해액이 수천만원에 달한다면 경찰도 그냥 덮어둘 수 없는 사건이 된다”면서 “그렇게 되면 통장 거래내역이나 통화내역 은행 CCTV 추적 등을 통해 수사에 적극 나서지 않겠느냐”고 기대했다. 경찰서 조사계 수사관 정모 경사는 “10만원, 20만원짜리 사기 사건이라면 수사에 적극 착수할 맛이 나지 않는 게 사실”이라면서 “누리꾼들이 모여서 피해 규모가 큰 단일 사건으로 만들어올 경우 영장 발부도 쉽고 구속까지 시킬 수 있는 사건이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2003년 12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타인의 명의를 도용해 만든 가짜 서류로 보증보험에서 보증을 받고 이를 담보로 새마을금고에서 100억원대 대출을 받아 가로챈 사기단을 적발했는데, 이 사건의 숨은 ‘공신’은 사기꾼 잡기에 나선 누리꾼들이었다.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신용카드 복제 단말기를 구입할 경우 대출해주겠다고 해서 200만원을 내고 단말기를 구입했는데, 대출이 성사되지 않았다’는 내용의 글이 수차례 올라오자 사이버수사대와 커뮤니티 회원들이 함께 동일한 피해자 찾기에 나섰고, 2개월 만에 500여명에 달하는 동일 사기 사건 피해자가 모아졌다. 커뮤니티 운영자가 경찰이 제공한 진술서 양식을 피해자들에게 e메일로 발송하고 회수하는 형식을 통해 짧은 시간 내에 피해 내용이 확보됐다. 당시 수사에 참여한 임성권 경사는 “단순 인터넷 사기인 줄 알고 시작했던 수사가 결국은 대규모 대출 사기 사건으로 밝혀졌다”며 “누리꾼들의 적극적 참여가 없었다면 짧은 시간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수백명의 피해자를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누리꾼들의 자발적인 사기꾼 검거 노력은 인터넷 사기 방지 효과도 가져오고 있다. 인터넷 사기에 활용된 통장 계좌번호, 휴대전화 번호, 사기꾼들이 도용해서 사용하고 있는 이름 등이 아예 명단으로까지 작성되어 나돌고 있고, 주요 유명 사기꾼이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다는 소식까지 누리꾼들 사이에서 발빠르게 공유되고 있는 덕분이다. 지난해에만 세 번 인터넷 사기를 당했다는 박모씨(32)는 “지방 소도시에 살기 때문에 빠르고 편리하게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 있는 온라인 거래는 끊을 수 없는 쇼핑 방식”이라며 “요즘에는 검색을 통해 거래하려는 계좌번호와 휴대전화 번호, 이름 등이 사기에 활용됐는지를 확인해보고 나서야 물건값을 송금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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