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6

2004.12.30

국정원, 김동식 목사 피랍 알고도 침묵

2000년부터 ‘북한 보위부 소행’ 연이은 언론 보도 묵살 … 강력 항의와 송환 요구했었다면 돌아왔을 수도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4-12-23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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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정원, 김동식 목사 피랍 알고도 침묵

    북한 유도 영웅 계순희 선수(왼쪽)와 함께한 김동식 목사(1996년). 김 목사 납치 사건이 일어난 옌지시 모습.

    즐거운 낙종’. 12월14일자 조선일보의 특종 기사 ‘국정원 김동식 목사 납치범 검거’를 보면서 떠오른 단상이었다. 조선일보 기사는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한국의 국가정보원과 비슷, 이하 보위부) 지령을 받은 조선족 류영화씨(35)를 김동식 목사 납치범으로 검거했다는 내용이었다. 김 목사는 중국에서 탈북자 지원 및 선교 활동을 하다 2000년 1월16일 옌지(延吉)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치돼 강제 납북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매체보다 빨리 보도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한 기자사회에서 조선일보에 ‘물먹었음에도’ 즐거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납치범 조선족 류영화씨 검거

    이유는 ‘신동아’ 2003년 1월호와 3월호를 통해 북한 보위부가 행한 김 목사 납치사건 전모를 상세히 보도해놓았기 때문이다. 두 기사에서 기자는 김 목사 납치에는 북한에서 온 보위부 공작원인 김송산(함북 회령시 출신, 가명 김영미)과 박건춘(함남 청진 출신, 가명 박철송) 지광철(인민군 교도대지도국 출신으로 중국 국적 얻어 옌볜에서 청룡무술학교 운영, 가명 지송철) 등과 조선족 협조자인 류영화와 이용철, 윤철학, 전영삼, 이학주 강옥화 등 여섯 명이 ‘吉 H 423-23’ 번호판을 단 중국제 산타나 승용차를 동원해 옌볜시 예림불고기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 김 목사를 납치했다고 밝혔다. 그 기사에는 이중 류영화와 이용철이 2001년 8월 돈벌이를 위해 한국에 들어왔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국정원이 류영화씨를 검거할 수 있었던 데는 2003년 1월22일 한국에 들어온 북한 보위부 출신 공작원 이춘길씨(가명)의 증언과 협조가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기자는 2002년 12월 베이징에서 이씨를 만나 오랜 시간 이야기를 들은 뒤 2003년 1월호 신동아에 그의 이름으로 된 수기 ‘나는 공화국의 저승사자였다’를 게재했고, 이어 북한 보위부의 김 목사 납치 전말을 심층 분석한 ‘집단탈북 막기 위한 북 보위부의 유인공작’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2003년 3월호 신동아에 게재했다.

    당시 이씨는 한국에 가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기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약간의 도움을 주었고, 이씨는 이를 토대로 2003년 1월22일 한국에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그 후 이씨는 탈북자 전문 심문기관인 대성공사에서 1년 2개월 동안 합동심문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이중간첩이 아닐까 하는 의심 때문이었다.



    국정원, 김동식 목사 피랍 알고도 침묵
    이씨는 97년부터 99년 사이 주로 지린성과 랴오닝성을 무대로 안기부 대북공작팀은 물론이고, 북한을 탈출한 주요 탈북자를 잡아들이는 공작을 펼쳤다(신동아 2003년 1월호 수기 참조). 이때 이씨 활동은 너무 눈부셔서 안기부는 원거리에서 그를 촬영하는 등 몰래 그의 신원과 동태를 추적했다. 지금 한국에 들어와 있는 탈북자 중에서는 가족 중 일부가 그 때문에 희생을 본 사람이 있을 정도다.

    이씨는 합심에서 북한 보위부가 행한 김 목사 납치에 대해 진술했다. 이씨에 대한 합심이 끝나갈 무렵인 올 2월 국정원 수사팀은 이씨에게 주중 한국영사관 등에 한국행 비자를 신청하거나 비자 연장 신청을 할 때 제출한 류영화와 이영철로 추정되는 사람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이씨가 이중에서 류씨와 이씨의 사진을 골라줌으로써 김 목사 납치범 수사는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이영철씨는 이미 중국으로 돌아간 다음이었고, 국정원 수사팀은 중국에서 이씨를 촬영함으로써 이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국정원, 김동식 목사 피랍 알고도 침묵

    김동식 목사 송환을 요구하는 시민단체 시위.

    결국 국정원은 한국에 여전히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류씨 소재지를 추적, 검거에 성공했다. 국정원 측은 “김 목사가 누구인지 모르며 김 목사를 납치한 적도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는 류씨를 12월9일 이춘길씨와 대질시켰다. 이씨를 본 순간 류씨는 “어, 춘길이 아니야?” 하고는 고개를 숙이며 “그날(2000년 1월16일), 그곳(옌지시 예림불고기 앞)에서 납치한 사람이 김 목사라면, 나는 김 목사 납치에 가담한 것이 맞다”고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나는 그 사람이 김 목사인 줄은 몰랐다”고 주장했다.

    2년여 전 신동아에서 사건 전말 다뤄

    국정원은 이에 따라 바로 류씨를 검찰에 송치했고, 검찰은 즉시 구속영장을 청구해 12월11일 법원이 영장 실질심사에 착수했다. 조선일보는 이 사실을 포착해 12월14일자 신문에 국정원의 김 목사 납치범 검거 사실을 특종 보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자는 이씨를 통해 국정원 측에 류씨를 검거할 때까지는 일절 보도는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었고 때마침 이 시기 해외 취재에 나가 있어, 낙종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김 목사 납치범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즐거운’ 낙종이 된 셈이다.

    류씨 검거 사실이 보도된 뒤 언론은 “신동아가 거의 2년여 전에 김 목사 납치 사건 전말을 상세히 보도했는데 왜 관계당국은 바로 조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비판했다. 물론 국정원이 신동아 보도 직후 류씨 추적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춘길씨가 들어와 합심을 받을 무렵부터는 류씨를 검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김 목사 사건과 관련해서는 결코 칭찬을 들을 수 없다. 김 목사 사건을 오래 전에 파악하고도 묵살해온 것 아닌가 하는 의혹 때문이다. 이춘길씨는 기자에게 최초로 김 목사 납치 전말을 밝힌 게 아니다. 김정일한테서 ‘잘한다’는 친필 칭찬을 받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해왔던 이씨는 자신이 저승사자와 같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99년 여름부터 공작 활동을 중단했다. 그리고 몰래 선양(99년 11월18일)과 칭다오(2000년 1월10일)에 있는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한국에 가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두 영사관은 “능력껏 가보라”며 그를 밀어냈다.

    그 직후인 2000년 1월16일 옌지에서 김 목사 납치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씨는 옌지에서 만난 또 다른 보위부 공작원한테서 “60대 한국인을 납치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때까지 그에게 공작 지시를 내려준 함경북도 보위부 반탐처장(反探處長) 윤창주 대좌한테서 “1월16일 한국인을 납치해왔는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라”는 지시를 받았다(보위부는 이씨가 한국영사관을 찾아간 사실을 몰랐다).

    이로써 김 목사 납치 전모를 알게 된 이씨는 그해 1월26일 당시 동아일보 이종환 특파원에게 전화를 걸어 만난 다음, 익명을 전제로 ‘김 목사를 납치한 것은 북한 보위부다’라고 밝혔다. 이 특파원은 이 진술을 근거로 2월3일자 동아일보에 ‘북한 보위부가 김 목사를 납치해간 것 같다’는 내용의 기사를 보도했다. 그 후 이씨는 한국인 사업가를 만나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이 사업가들이 이씨 진술을 녹음해 동아일보 윤상호 기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동아일보는 그해 2월23일자에 유사한 내용을 또 한번 보도했다.

    국정원, 김동식 목사 피랍 알고도 침묵

    일찌감치 김 목사 사건의 진실을 보도한 동아일보와 신동아의 기사들.

    그러나 이 시기 국정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 일각에서는 “당시 국정원은 6월13일 남북정상회담 성사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므로 동아일보 보도를 보고도 이를 묵살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직후인 7월10일 이씨는 상하이의 한국영사관을 찾아가 한국행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어 일본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팩스를 보냈다가 외교기관을 전문으로 도청하는 중국 국가안전부(국정원과 비슷한 기관)에 검거돼, 그해 9월6일 북한으로 송환되었다.

    북한에서 이씨는 혹독한 조사를 받았으나 한국으로 가려고 했다는 것은 끝까지 숨겨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해 11월 보위부의 조사를 받던 이씨는 국가보위부 2국 8처 부처장이 2국 부국장인 문종환에게, “김 목사가 2국에서 관리하는 305호 관리소 산하 만경대 초대소에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이에 대해 이씨는 “보위부가 납치해온 사람을 감옥이나 아지트로 보내지 않고 초대소로 보낸 것은 그를 상대로 자진월북을 했다는 것을 주입케 하려는 공작을 펼친 것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국정원, 24일간 이씨 조사해

    김 목사는 86년 교통사고로 다리를 크게 다쳐 장애인이 된 데다 99년 9월29일 한림대 성심병원에서 암세포가 발견된 직장을 떼어내고 인공항문을 넣은 대수술을 받았다. 김 목사는 인공항문의 필터를 정기적으로 갈아주고 항암치료도 정기적으로 해줘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이씨 진술이 사실이라면 북한 보위부는 김 목사에게서 자진 월북했다는 진술을 받아내기 위해 그해 11월까지는 필터를 교체해주고 항암치료를 해주면서 김 목사를 설득해온 것이 된다. 따라서 이 시기 우리 정부가 김 목사 납치에 더욱 강력히 항의하고 송환을 요구했다면, 김 목사는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씨는 유능함 덕분에 김정일 친필 지시를 받아 석방됐다가 그해 12월15일 명동진을 통해 중국으로 탈출했다. 그로부터 2년여가 지난 2002년 7월9일 이씨는 16명의 다른 탈북자와 함께 베이징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진입했는데, 이 사건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조사를 받게 된 이씨는 과거 자신이 해온 공작을 소상히 털어놓았다. 그러자 조사를 하던 영사가 “네가 바로 그 이춘길이냐”라고 한 뒤 독방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며칠 후 서울에서 국정원 직원 세 명이 날아왔다.

    이들은 과거 이씨를 찍은 사진을 갖고 와 “맞군” 한 뒤, 이씨가 하는 말을 캠코더와 녹음기로 세밀히 촬영하고 녹음했다. 이때 이씨는 “김 목사 납치는 보위부가 한 것이다”라고 분명히 밝혔다. 이렇게 이씨가 조사를 받는 사이 16명의 탈북자는 차례로 서울로 날아왔다. 그러나 이씨는 8월3일까지 무려 24일간 조사를 받았으나 한국행이 불허되었다. 그 후 그는 한 시민단체를 통해 기자에게 도움을 청해, 한국에 들어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국정원은 적어도 2002년 7, 8월 에는 김 목사 납치 사건의 전모를 이미 파악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국정원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왜 김대중 정부 시절의 국정원은 김 목사 사건의 진실을 알고도 은폐했을까. 이에 대해 국정원 측은 “수사 중인 사건이라 아무 대답을 해줄 수 없다”는 답변을 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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