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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순위 5분의 1 점령 연애, 학원 소설 강세 … 게임, 만화 등 영향 10, 20대 젊은이가 주 독자층

  •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일본 소설 코너에서 책을 고르고 있는 독자들.

12월1일 오후 1시, 서울 강북의 한 대형서점 문학 코너. 그중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이 바로 ‘일본 소설’ 매대다. 서점 직원은 “요즘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인기가 높다. 종류도 다양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아 몇 달 전부터 따로 자리를 마련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베스트셀러 모음 코너에도 일본 작가들의 작품이 유난히 많이 올라 있다.

각 대형 서점 및 인터넷 서점의 베스트셀러 순위 또한 이 같은 현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11월 셋째 주 교보문고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1~50위 중 일본 작가 작품이 12권이나 된다. 한국 소설은 8권. 가히 ‘일본 소설 붐’이라는 말이 무색치 않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 초, 우리 출판계는 이미 한 차례 일본 소설 붐을 경험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번역돼 나오면서부터였다. 그리고 10여년. 하루키의 몇몇 작품은 여전히 베스트셀러 순위 30위권 안에 드는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토대에서 제2의 일본 소설 전성기가 도래한 것이다.

따로 매대 운영하는 대형서점

저작권 에이전시 ‘임프리마 코리아’의 일본 담당 장지현 차장은 “2002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현상”이라고 말했다. 유명 작가들은 이미 몇몇 출판사가 독점 계약하다시피 해 책을 연속적으로 내고 있다. 신진 작가라도 일본에서 히트를 쳤다 하면 금방 국내 출판사끼리 경쟁이 붙을 정도다.



한국 내 일본 소설 붐의 선구자 격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이다. 이들의 몇몇 작품은 어느새 우리 젊은이들이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꼭 읽어야만 하는 ‘통과의례’ 성격까지 띠게 된 듯하다.

2001년 이후 여기에 에쿠니 가오리, 쓰지 히토나리, 야마다 에이미, 가네시로 가즈키 등의 이름이 보태졌다. 지금에 와서는 일본에서도 신예라 할 수 있는 아타야 리사, 가네하라 히토미, 이시다 이라 등의 작품들이 번역돼 나와 독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올 1월 아쿠타가와상을 공동 수상한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의 와타야 리사(왼쪽)와 ‘뱀에게 피어싱’의 가네하라 히토미.

제2 일본 소설 붐의 선구자 구실을 한 것은 에쿠니 가오리와 쓰지 히토나리가 각각 한 권씩을 맡아 쓴 ‘냉정과 열정사이’(‘BLUE’와 ‘ROSSO’ 두 권으로 구성)다. 이 책을 낸 소담출판사 구경진씨는 “두 권 합쳐 50만부 넘게 팔렸다”고 소개했다. 2001년부터 꾸준히 라디오 광고를 한 데다, 동명 영화가 개봉되면서 인기 몰이를 시작한 때문이다. 지금도 두 권 다 소설 베스트셀러 순위 20위권 안에 드는 선전을 하고 있다.

두 작가 중 특히 에쿠니 가오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다수의 열성 팬을 거느리고 있다. ‘끊임없는 사랑의 실험가’ ‘여자 무라카미 하루키’로 불리며 20, 30대 여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고 있는 것. 이에 힘입어 소담출판사는 가오리와 독점 계약을 맺고 그의 소설과 에세이들을 잇따라 펴내고 있다. 보통 3000부 정도 찍는 초판을 2만부씩 찍어낼 만큼 인기가 높다.

‘냉정과 열정사이’의 뒤를 이은 것이 재일 한국인 소설가 가네시로 가즈키의 ‘GO’다. 역시 동명 영화 개봉과 함께 만만치 않은 판매고를 올렸다. 기다렸다는 듯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의 새 작품들이 쏟아져나왔다.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바나나의 ‘NP’ 등이 대표적이다. 동방미디어는 아예 ‘무라카미 류 걸작선’이라는 이름으로 6개월 남짓 동안 무려 9권의 책을 쏟아내 놓았다. 이 시리즈를 포함, 몇몇 출판사에서 올해 번역돼 나온 무라카미 류 책만 15권에 이른다. 작품 수준이 웬만할 경우 1만부 정도는 쉽게 팔려나간다.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일본 연애소설의 여왕’으로 불리는 에쿠니 가오리와 그의 주요 저작들.

올 초부터는 이제껏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젊은 작가들이 대거 소개됐다. 이들의 작품을 포함, 국내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일본 소설들은 소재에 따라 크게 ‘연애소설’과 ‘학원소설’로 나뉜다. 양쪽 다 우리나라 소설들이 제대로 채워주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다.

연애소설이라면 일단 최근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가타야마 교이치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를 빼놓을 수 없다. 그 뒤를 잇는 것이 다나베 세이코의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다. 두 작품 모두 영화화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세상의~’는 일본 현지에서 올 6월 이미 300만부 넘게 팔려나가 일본 문학 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됐다. 우리나라에서 역시 10월 동명 영화 개봉 뒤 찾는 이가 부쩍 많아져 잠깐 사이 10만부 넘게 팔려나갔다. 이 작품의 히트로 그의 또 다른 장편소설인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세상은 움직인다’와 단편소설집 ‘만약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도 덩달아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10여년 전, 일본소설 붐을 몰고 왔던 주요 작가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왼쪽부터).

‘세상의~’는 ‘불치병이 갈라놓은 10대들의 사랑’을 그린 순수 연애소설이다. ‘겨울연가’ 히트와 함께 열도의 ‘순애보 중독증’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자주 언급되곤 한다. 완성도가 뛰어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독자들이 만든 베스트셀러’. 그런 만큼 이를 일본을 대표하는 연애소설이라 부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다원화한 문학생산 시스템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야말로 자웅을 겨루는 ‘일본 연애소설의 여왕’들이다. 야마다 에이미는 94년 번역돼 나온 ‘120% COOOL’로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골수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공주님’ ‘나는 공부를 못해’ 등이 최근 소개작이다. 관습과 온갖 억압에 대한 도발과 도전이 트레이드마크. 말초적이면서도 무심한 듯 순식간에 폐부를 찌르는 슬픔과 묘한 당당함이 조화를 이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다.

하루키, 무라카미 류, 바나나의 대표작들 또한 대부분 연애소설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상당수가 성장소설 혹은 학원소설의 모양새를 띠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올해 단연 돋보인 성장소설은 1월 국제적 화제를 모으며 당당히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이라는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두 작품, ‘발로 차 주고 싶은 등짝’과 ‘뱀에게 피어싱’이다.

‘발로~’를 쓴 와타야 리사는 와세다 대학 교육학부 2학년생인 19세 소녀, ‘뱀에게~’를 쓴 가네하라 히토미 역시 갓 스무 살 난 신성이다. 이들의 작품은 각각 일본에서 100만부가 넘어서는 히트를 쳤다. 우리나라에서도 만만치 않은 인기를 끌고 있다. ‘포틴’ ‘LAST’의 이시다 이라도 주목할 만한 작가. 날카로운 감수성이 돋보이는, 과장 없이 솔직하고 진지한 작품들을 생산해내고 있다.

일본 작가의 소설들이 이렇듯 우리 독자의 사랑과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70년대 후반 일본 문학은 커다란 지각 변동을 경험했다. 한양대 윤상인 교수(일문학)는 “이때를 기점으로 파격적 형식 실험과 탈이념·탈중심으로 대변되는 자유분방한 유목민적 사고가 일본 문학의 한 특징으로 떠올랐다. 가식적 교양주의를 거부하고 대중문화와의 편견 없는 교감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예술적 감수성으로 무장한 젊은 작가들이 대거 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무라카미 류와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표주자. 이들은 고급스런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는 것을 독자와의 이상적 관계로 설정했다. ‘구도자’연하는 자세를 던져버렸음은 물론이다.

이러한 기조는 오늘날에까지 이어져 일명 ‘J문학’으로 불리는 신세대 일본 문학의 특성이 됐다. 이들은 또한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균적 소비문화를 누린 ‘풍족 세대’ 혹은 ‘개성 세대’다. 빈곤의 결여, 어딘가에 속해 있기를 거부하는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적 속성, 스타와 대중문화에 탐닉하는 면모 또한 공통점. 요즘 일본 문학의 특징을 두고 무국적성, 디아스포라(離散), 유목, 혼종(=잡종), 월경(越境), 가치중립적 인공 언어 등이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본 소설 “서울에서 살렵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개봉돼 원작 소설 판매에 큰 영향을 끼친 일본 영화들.

이러한 특성은 독자들이 뷔페식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다원화한 문학생산 시스템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윤 교수는 “지금 우리의 젊은 세대들 또한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대단히 다원화한 생각과 감성을 갖게 됐다. 이들의 욕구를 일본 소설들이 훌륭하게 채워주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대표적 일문학 번역작가인 김난주씨도 “요즘 일본 소설의 주요 독자층인 10대 후반에서 20대 후반 젊은이들은 어려서부터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음악, 패션 등 거의 전방위적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세례를 받고 자란 세대다. 이들이 일본 소설에 열광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말했다.

이화여대 김미현 교수(국문학)는 “‘냉정과 열정사이’ 같은 일본 연애소설은 슬픔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통으로부터 강간당했다는 불쾌감이나 부담이 없다”고 분석했다. 대단히 순애보적인 작품인데 한편으로는 매우 ‘쿨’하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그러한 ‘쿨’함의 한 동력으로 문체를 꼽았다. “(‘냉정과 열정사이’는) 벚꽃 같은 문체를 사용한다”면서 소설 속 하나하나의 문장은 한 잎씩 떨어지는 벚꽃처럼 사소하고 잔잔하다. 그런데 그런 문장이 여럿 모인 한 편의 소설 전체는 한꺼번에 흩날리는 벚꽃나무처럼 강렬하고도 화려하다”는 것이다.

‘쿨하다’는 것은 우리 독자들이 일본 소설에 대해 느끼는 대체적 정서. 그런데 그것은 완벽하게 차갑고 심지어 경멸까지 담은 냉혹이라기보다는, 실상 속으로는 그 무엇보다 뜨거운 열정을 감춘 ‘쿨’이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오히려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일본 연애소설 속 주인공들의 ‘역설적 초연함’은 오히려 깊은 슬픔과 애조 띤 정조를 자극한다. ‘열정을 포기하지 못하는 냉정, 어떤 무관심을 표현하는 데 그 무관심이 오히려 관심을 유도하는’ 형국이다.

일본 소설에 대해 몰역사성이 주는 편안함, 혹은 ‘희생자 의식’이나 ‘피해자 문화’가 없다는 점이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치열함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김난주씨는 “예를 들어 장기 불황이 계속되면 일본에서는 거리의 부랑자를 소재로 한 소설이 나온다. 그만큼 사회적 현상을 포착하는 데 빠르다”고 지적했다. 역시 비중 있는 일문학 번역작가인 김씨의 남편 양억관씨도 “무라카미 류 같은 작가는 나이 오십이 넘어서도 젊은이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체크할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화폐론부터 정치학까지 지금도 끊임없이 재충전을 한다”고 했다.

일본 소설 속 주인공 중에는 육체적 상처와 정서적 결핍을 지닌 마이너리티, 멋있기는커녕 확실히 불행한 삶의 조건을 타고났거나 고통 속에 던져져 있는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들은 삶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쿨’하게 바라볼 줄 안다. 비명을 지르고 공격성을 드러내기보다는 ‘나’와 ‘우리’와 ‘사회’를 무심한 듯 날카로운 눈초리로 직관하며 삶의 아이러니가 내포한 역설적 희망을 찾는 것이다. 이는 몇몇 일본 소설들이 스스로를 사회의 마이너리티라 인식하는 젊은이들에게서 ‘마치 내 이야기를 하는 듯한’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들 솔직한 말과 글 열광

민음사 박상순 주간은 “그리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에쿠니 가오리, 야마다 에이미 등 일본의 대표적 여성 작가들에게서 발견되는 것이 바로 글로벌한 당대성이다. 성 가족제도 등 일상 문화는 폭발적으로 변해가는 데 반해, 여전히 윤리적 잣대로 모든 것을 재려는 우리의 이중적 현실 속에서 일본 작가들의 감각적 작품은 달콤한 배출구이자 위안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 소설의 히트 이면에는 작가들에 대한 동경과 공감, 친근감도 한몫한다. 이는 일본 작가들의 대단히 솔직한 말과 글, 행동, 독특한 이력에 기인한 바 크다.

하루키의 몇몇 소설 혹은 에세이를 읽은 독자라면 ‘더플 코트, 맥주, 비틀스, 소식과 미식, 아메리카에 대한 동경’ 등 이른바 ‘하루키 취향’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45세인 ‘냉정과 열정사이-BLUE’의 작가 쓰지 히토나리는 얼마 전 영화 ‘러브레터’의 여주인공 나카야마 미호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대학 졸업 후 81년 록밴드를 결성해 10년간 이끌었고, 99년에는 영화 ‘천년여행인’으로 감독 데뷔도 했다. 에쿠니 가오리는 골초이며 컴퓨터를 못 믿어 샤프펜슬로 원고지에 글을 쓴다. 에세이집에는 ‘사랑스러운 험담’이라 부를 만한 남편에 대한 이야기가 시시콜콜 담겨 있다. ‘뱀에게 피어싱’의 가네하라 히토미는 14세 때 첫 자살을 시도했고 공부 따위 필요 없다며 학교를 그만둬버린 ‘문제소녀’였다.

이렇게 일본의 많은 유명 소설가들은 작가이자 가수이며 영화감독이고 요리사, 마약중독자, 만화가다. 여성지 등 대중잡지에 사적인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쓰며, 그런 그들의 솔직함과 정석을 벗어난 삶의 방식에 독자들은 열광한다. 작품뿐 아니라 삶 자체도 ‘소설적’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한 유명 소설가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작가들에게 도덕적 삶을 요구한다. 흠잡을 데 없는 사생활이 자랑이 될 정도다. 근엄한 척, 구도자인 척, 고통받는 희생자인 척하는 작가들에게 소설보다 훨씬 치열한 삶을 사는 독자들이 공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노벨문학상 심사위원회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력한 수상 후보로 거론됐다고 한다. 윤상인 교수는 “내년쯤에는 하루키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일본 문학은 그렇게 그들의 땅과 우리 땅, 미국과 유럽과 중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고 있다. 일본 소설로 허기를 달래고 있는 우리 독자들에게 한국의 작가들은 어떤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주간동아 2004.12.16 464호 (p64~66)

이나리 기자 byem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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