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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 이색과학자 열전⑤

만화 보며 그린 과학자 꿈 ‘현실로’

서울대 약대 김규원 교수 … 시류 벗어나 택한 연구의 길 ‘뇌혈관 전문가로 세계에 우뚝’

  • 김홍재/ 사이언스타임스 기자 ecos@ksf.or.kr

만화 보며 그린 과학자 꿈 ‘현실로’

만화 보며 그린 과학자 꿈 ‘현실로’

뇌혈관을 연구해 뇌질환 치료의 새 길을 연 김규원 교수는 노인성 뇌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6월5일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타계했다. 10여년 투병생활 동안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든 질병은 알츠하이머병. 냉전시대를 끝내고 미국을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로 이끌어 미국인들의 찬사를 한 몸에 받은 대통령의 말로는 비극적이었다.

뇌에는 알츠하이머병처럼 일단 발병하면 현대 의학으로 손쓰기 어려운 질환이 곧잘 생긴다. 단일질병 사망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뇌졸중이나 드라마·영화에 곧잘 등장하는 불치병인 뇌종양 등이 그것이다. 이런 뇌질환들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연 한국인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뇌혈관 전문가로 꼽히는 서울대 약대 김규원 교수(52).

“지금까지 뇌에 관한 연구는 대부분 뇌신경에 몰려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뇌혈관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줘 주목받은 거예요. 뇌에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은 ‘뇌혈액 관문’이라는 혈관을 통해서 공급되는데, 이 부분이 잘못되면 뇌종양·뇌졸중·알츠하이머 같은 뇌 기능 이상이 발생합니다.”

암 굶겨 죽이는 새 치료법 제시

찌는 듯한 여름날 서울대 관악캠퍼스에서 만난 김교수는 인터뷰가 시작되자 날씨보다 더한 열정을 뿜어냈다. 최근 5년 동안 국제학술지 논문 발표 60여편, 국내학술지 논문 발표 40여편, 특허출원 28건 등 믿기 어려운 실적을 올린 김교수는 요즘 속도를 더 높이고 있다. 지난 6월 실험실이 창의적연구진흥사업의 ‘혈관 신경계 통합조절연구단’으로 선정되면서 연구비를 해마다 6억원씩, 최고 9년 동안 지원받게 됐기 때문이다.



“연구 여건이 모두 마련돼 정말 흥이 나는 상황이에요. 혈관 연구는 10년 전에 시작했습니다. 원래 암이 퍼지는 과정을 연구하려고 했는데, 연구환경이 선진국과 차이가 커 따라잡기가 쉽지 않겠더라고요. 그래서 혈관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습니다.”

우리 여건에 맞는 연구를 하자는 생각에서 한 김교수의 선택은 전화위복이 됐다.

“암세포는 증식할 때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받기 위해서 혈관을 많이 만들어요. 쉽지 않았지만 결국 2년 전 어떤 단백질이 어떻게 혈관을 만드는지 메커니즘을 밝힐 수 있었습니다.”

김교수가 거둔 성과는 대단한 것이다. 생명과학 분야에서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셀’에 논문을 발표하자 전 세계 과학자들은 암 연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50년 동안 암세포를 쫓았지만 획기적인 치료법을 개발하지 못한 상황이었는데, 김교수가 암을 굶겨 죽이는 새로운 길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이처럼 새로운 접근을 할 수 있었을까.

“고등학교 때 우연히 ‘팔만대장경’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읽은 뒤 불교의 ‘인과론’처럼 세상의 사물도 네트워크로 연결돼 상호작용을 한다는 시각을 갖게 됐습니다. 생명체를 들여다볼 때도 항상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지부터 생각해요.”

암이란 질병을 네트워크적 사고방식으로 바라봄으로써 학자들의 시각을 암세포에서 주변 혈관으로 넓히게 한 김교수는, 이 공로로 지난해 ‘제1회 대한민국 최고과학기술인상’ 수상자로 뽑혔다. 대통령이 직접 수여하는 이 상은 과학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를 자랑하며 상금도 3억원이나 된다. 과학자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안겨주는 것이다.

“혹시 ‘짱구 박사’라는 만화를 아세요? 어릴 적에 이 만화를 상당히 좋아했습니다.”

만화 보며 그린 과학자 꿈 ‘현실로’
과학자가 된 계기를 묻자 김교수는 만화 얘기를 꺼냈다. 만화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매체라는 칭찬과 함께 아이들이 만화책을 읽어도 부모들이 나무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는다.

만화책을 보고 결심한 꿈이지만 이루기는 쉽지 않았다. 신약 개발을 하고 싶어 진학한 약대를 졸업하자 형편이 어려워진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린 줄 알았던 동생이 집안일을 책임지겠다고 자청하면서 김교수는 공부를 계속할 기회를 얻게 된다.

“홀트 복지재단 도움으로 미국에 갔습니다. 입양할 아이를 데리고 가는 조건으로 비행기 값을 대신 내줬거든요. 갓난아이 2명을 안고, 좀더 큰 아이 2명은 걸리고, 아이들 가방까지 5개를 메고…. 정말 비행기 차창 밖 한 번 내다보지 못하고 갔죠.”

힘들게 시작한 유학이었지만 김교수는 집안일 같은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 연구에만 푹 빠질 수 있었다. 미네소타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학에서 박사 후 과정을 보내면서 새벽부터 자정까지 연구를 계속했는데 정말 행복한 나날이었다고. 태권도 대련을 하다가 손이 부러진 상황에서도 한 손으로 실험을 계속했을 정도였단다.

지나온 길을 들려주던 김교수는 요즘 학생들이 시류에 휩싸여서인지 과학자의 꿈을 쉽게 포기한다는 얘기를 할 때는 아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사실 전 능력이 뛰어나지 않습니다. 단지 과학을 좋아해서 남들보다 열심히 했고, 그래서 연구결과를 많이 낼 수 있었어요. 정말 뛰어난 학생들이 연구개발 현장에서 활약할 수 있게 국가에서 뒷받침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한창 뇌혈관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김교수는 자신의 목표에 대해 “노인성 뇌질환의 진행 속도를 최대한 늦추거나 막아 늙어서도 뇌가 잘 유지되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고 밝혔다. 인생의 말년기에 찾아오는 비극이 과학자의 손에 의해 끝나는 날을 위해 김교수는 오늘도 밤늦게까지 실험에 몰두하고 있다.





주간동아 448호 (p72~73)

김홍재/ 사이언스타임스 기자 ecos@ksf.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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