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9

2003.11.13

‘치마폭 권력’ 세계를 주무르다

존슨·슈뢰더·슈워제네거 등 성공엔 아내 힘 절대적 … 올브라이트는 자수성가해 권력 잡아

  • 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입력2003-11-06 14: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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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마폭 권력’ 세계를 주무르다

    10월4일 남편인 아놀드 슈워제네거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는 마리아 슈라이버.

    10월7일 아침, 미국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에 진도 3.6의 가벼운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진짜 ‘지진’은 저녁 무렵에 일어났다. 영화배우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이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에 따르면, ‘정치경력 62일의 새내기가 30년 경력의 정객 그레이 데이비스 주지사를 이긴 진짜 지진’이 일어난 셈이다. 더구나 캘리포니아 주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해왔다는 점이나 선거 막판에 터진 슈워제네거에 관한 성추문, 부친의 나치 경력 폭로 등을 감안해보면 슈워제네거의 승리는 ‘강진’에 가까웠다.

    승리를 확인한 슈워제네거는 지지자들의 열띤 연호 속에 당선 연설을 하기 위해 연단에 올랐다. 그리고 연설의 첫마디를 이렇게 꺼냈다. “여보,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표를 얻었는지 알고 있어.”

    슈워제네거의 부인 마리아 슈라이버. 영화배우 못지않은 미모의 소유자인 슈라이버는 슈워제네거의 말처럼 이번 선거를 승리로 이끈 일등공신이다. 잘 알려진 대로 슈라이버는 케네디가 출신이다. 그의 어머니인 유니스 슈라이버는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누이다. 아버지인 서전트 슈라이버는 1972년 대통령후보 조지 맥거번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출마했다 패배했다. 여기에 더해 슈라이버는 에미상을 수상한 NBC의 기자이자 연봉 수백만 달러의 스타급 앵커,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정치인의 아내로서는 실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셈이다.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저널리스트이자 정치 명가에서 자라 어릴 때부터 선거 과정을 보면서 커온 슈라이버는 별다른 조직이나 선거전략도 없던 슈워제네거의 캠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냈다”고 평했다. ‘LA 타임스’ 역시 “2000년 대선 당시 존 매케인을 도왔던 선거전략가 마이크 머피를 영입하는 등 슈라이버는 이번 선거에 깊숙이 관여했다”고 보도했다.

    이번 선거에서 슈워제네거 캠프에 가담했던 선거 미디어 전략가 돈 시플은 선거 당일 저녁, 슈라이버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마리아, 기쁜 소식을 전할게요. 우리가 이겼어요. 그런데 나쁜 소식도 있어요. 그건 ‘당신이’ 이겼다는 사실이에요.”



    재클린은 한때 미국의 문화 아이콘

    남편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 슈라이버는 앞으로 ‘캘리포니아의 퍼스트레이디’로 어떤 역할을 할까. 선거기간 동안 NBC를 무급 휴직한 슈라이버는 일단 직장으로 복귀했다. 슈워제네거 역시 “아내는 뛰어난 언론인이다. 일을 할 때 행복해하는 타입이기 때문에 직장으로 돌아가기를 권했다”고 말한 바 있다.

    권력의 핵심에 가장 가까이 있는 여성, ‘퍼스트레이디’에 대한 궁금증은 언제나 식을 줄을 모른다. 최근 영국 BBC 방송의 짤막한 보도도 그러한 궁금증을 더한다. BBC에 따르면,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과 재클린 케네디 사이에 ‘수상한’ 대화가 오갔다는 것. 존슨은 재클린에게 전화를 걸어 “대통령인 내가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요? 물론 당신이야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여러 대통령을 오간 여자가 몇 명이나 되겠소?” 하고 말했다. 그러나 재클린의 대답은 쌀쌀맞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대통령 두 명을 오간 여자’라고 입방아 찧으면 좋겠어요?” 이 대화는 백악관 오벌 오피스의 비밀 녹음장치에 녹음되었다.

    ‘레이디 버드’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존슨 대통령의 부인 클로디아는 ‘존슨 대통령의 업적은 논쟁거리지만 레이디 버드의 업적은 확실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좋은 평을 얻은 퍼스트레이디이자 환경운동가였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미국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까지 떠올랐던 재클린에 비해 평범한 여성이었다. 미 언론은 끊임없이 존슨 대통령과 클로디아를 ‘존과 재키 커플’(케네디와 재클린)에 비교했다. 두 사람에게 이 같은 비교는 어떤 여론보다도 견디기 어려운 부담이었을 것이다.

    ‘치마폭 권력’ 세계를 주무르다

    2000년 10월 미 국무장관으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왼쪽 사진 맨 오른쪽). 연설하는 남편을 지켜보고 있는 재클린 케네디.

    그러나 미국 역사상 가장 권력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던 여성은 재클린 케네디나 힐러리 클린턴이 아니라 미국 최초의 여성 국무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일 것이다. 1996년 12월 클린턴 정부 2기 국무장관이 되어 2001년 1월 콜린 파월에게 자리를 물려줄 때까지 올브라이트는 4년간 국무장관으로 재직하며 코소보 사태, 팔레스타인 문제, 북한 핵 개발 등 갖가지 현안들을 다루었다. 그는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후 출간한 자서전 ‘마담 세크레터리’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게는 결혼이 무척 소중했다. (만약 남편의 외도로) 이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결코 국무장관과 같은 고위직에 진출하지 못했을 것이다.”

    셰리 블레어 남편 뺨치는 정치감각

    그러나 이 체코 출신 이민자의 딸인 이혼녀는 명민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클린턴의 정치생명을 위협한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졌을 때, 기자들의 질문에 대한 올브라이트의 대답은 이랬다. “원래 남자들은 여자관계에 대해서는 거짓말을 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내각 각료들이 ‘목사님 역할’까지 할 필요는 없다.”

    올브라이트는 국무장관이 된 후 가장 어려웠던 점 중 하나로 보수적이며 여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랍인들과 맞닥뜨려야 할 때를 꼽았다.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 안에서조차 비아냥거리는 시선이 따라다녔다. 앤서니 레이크 국가안보보좌관과 올브라이트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각료 회의에서 올브라이트가 발언할 때마다 레이크는 ‘손가락으로 드럼 치듯’ 책상을 두드려댔다. 결국 고성을 지르며 레이크와 맞부딪친 날 저녁, 올브라이트는 퇴근하자마자 자리에 앉아 쉬지 않고 손자들의 털모자 두 개를 떴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네 번째 부인인 도리스 슈뢰더 쾨프도 마리아 슈라이버처럼 기자 출신. 독일의 유명 시사주간지 ‘포커스’의 기자였던 도리스는 97년 취재 중 만난 총리후보 슈뢰더와 사랑에 빠져 동거하다 슈뢰더가 세 번째로 이혼한 후 결혼했다. 둘의 나이 차이는 무려 20세나 된다. 당시 독일 국민들의 반발이 거셌지만 도리스는 결혼 후 남편의 공식일정, 기자회견 내용 등은 물론이고 옷차림까지 챙겨 촌뜨기 정치인 슈뢰더를 오늘의 총리로 만들었다. 도리스는 검소한 생활을 하며 ‘슈뢰더의 가장 현명한 참모’ ‘힐러리 클린턴의 능력에 더해 힐러리에게는 없는 겸손함까지 갖춘 퍼스트레이디’라는 평가를 듣고 있다.

    올해 초 영국의 퍼스트레이디 셰리 블레어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이른바 ‘셰리 게이트’ 때문이다. 셰리 블레어가 사기 전과자의 도움을 받아 아파트 2채를 구입했으며 아파트 구입을 위한 대출을 주선해 준 회계사마저 사기 혐의로 기소된 사실이 밝혀진 것이 ‘셰리 게이트’의 전모다. 정치인의 돈 문제에 유난히 민감한 영국 국민들은 셰리를 거세게 비난했다. 영국 라디오 ‘채널 4’가 올해 초 청취자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영국에서 가장 추방하고 싶은 인물’ 1위로 셰리가 뽑혔을 정도였다.

    그러나 셰리는 절묘한 방법으로 이 위기를 벗어나고 있는 듯하다. 7월 중국을 방문한 토니 블레어 총리와 동행한 셰리는 칭화대 학생들 앞에서 남편 대신 ‘비틀스’의 노래를 불러 ‘히트’를 쳤다. 셰리가 부른 노래는 댄스곡으로 리믹스되어 유럽에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퍼스트레이디에게는 남편 못지않은 정치적 감각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듯하다.

    ‘뉴욕타임스’의 인기 칼럼니스트인 케이티 마튼은 국내에도 번역된 저서 ‘숨은 권력자, 퍼스트레이디’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역사를 바꾸어놓는 결혼이 가끔 있다. 바로 대통령의 결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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