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배고픔’은 식량 시장 불균형 탓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10-30 14: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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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고픔’은 식량 시장 불균형 탓

    원조단체가 제공한 죽을 타기 위해 줄 서 있는 앙골라 어린이들.

    ‘굶주림’ 하면 흔히 뼈밖에 없는 앙상한 몸으로 죽을 타려고 줄 서 있는 아프리카 아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지하철 역사로 몰려든 ‘굶주리는’ 노숙자들이 그렇고, 좀처럼 줄지 않는 결식아동도 남의 얘기가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휴전선 너머 북에서도 굶주림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인도는 전 세계 3대 농업수출국 가운데 하나지만 적어도 2억명의 인도인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적으로는 8억여명이 일상적으로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다. 또한 굶주림으로 생겨난 질병 탓에 매일 5세 이하 어린이 3만4000명이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다. 더 놀랄 일도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에서조차 8.5%의 어린이가 굶주리고 있으며, 20.1%는 굶주림의 위협에 직면해 있다고 한다. 이제 만성적인 굶주림은 저녁 뉴스거리도 되지 못하지만, 매일같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도대체 이런 모순이 왜 생기는 것일까. 프랜시스 라페 등 식량과 발전정책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들이 집필한 ‘굶주리는 세계: 식량에 관한 열두 가지 신화’는 굶주림을 생존과 직결된 인권문제로 인식해, 식량을 둘러싼 국제적 현실과 정치·경제적 맥락을 알기 쉽게 해설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

    우선 저자들은 이 같은 모순의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굶주림이 가져오는 감정들을 짚어본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고통과 슬픔, 굴욕감, 그리고 공포다. 이것은 무력한 상황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다. 이런 무력감은 식량과 토지의 부족에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부족에서 온다고 저자들은 지적한다. 우리가 먹을 것에 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 즉 소수 거대자본이 식량을 독점하고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현 상황에서는 아무리 식량 생산기술이 발전해도 가난한 민중들의 굶주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특히 우리가 상식으로 여기고 있는 많은 편견(저자들은 이를 신화라 부른다)들을 조목조목 짚어내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가장 먼저 식량이 충분치 않다는 신화. 이것은 미국 한 나라에서만 생산되는 밀과 쌀, 콩, 옥수수를 갖고서도 전 세계 사람들의 주식을 책임질 수 있다는 통계를 접하면 간단히 뒤집힌다. 2억1300만명이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는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이남 국가들이 계속 식량을 수출하고 있다는 점도 우리를 아연케 한다.



    가뭄과 홍수처럼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난 자연재해들이 기근을 가져온다는 신화는 어떤가. 통계에 따르면 이는 결과론적인 얘기다. 자연은 최후의 일격을 날리는 것이고, 실제로는 인간이 재해 앞에서 더욱 약해지고 있는 게 문제다. 기근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사회적 재해인 것이다.

    다음으로 자원은 한정돼 있는데 인구가 너무 많다는 신화. 인구문제는 실제로 심각한 사안이지만 과도한 인구밀도가 굶주림의 근본 원인은 아니다. 나이지리아, 브라질, 볼리비아 등은 인구밀도가 낮고 식량자원도 풍부하지만 굶주리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토지, 일자리, 교육, 보건의료 등의 불평등을 개선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열쇠다.

    이뿐 아니다. 생산증대를 위한 녹색혁명이나 자유무역, 자유시장, 미국의 원조 같은 것들이 굶주림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신화가 아직도 전 세계인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그러나 녹색혁명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경제권력 집중 구조 개선 방안, 토지와 기타 식량 생산자원 및 소득 등의 형평성 유지 방안 등이 새 영농법과 함께 고민돼야 한다. 자유무역은 공평한 것 같지만 제3세계에서는 외채를 갚기 위해 환금성 작물에 더 비중을 둬야 하기 때문에 수출이 늘어도 굶주림이 지속되고, 해외원조는 현상(現狀)을 고착화할 뿐이라는 지적은 뼈아픈 현실이다.

    그렇다면 대안은? 저자들은 시장을 늘리지 말고, 소비자를 늘려야 시장이 제대로 기능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자를 늘리는 방식은 나라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인구가 너무 많다고 생각되는 나라도 국민들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할 만한 충분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판단이다. 그래서 이들은 어느 나라에든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이 책은 주로 미국 중심의 시각으로 씌어졌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서 식량문제에 관해 가장 영향력 있는 대중서로 자리잡았다. 옮긴이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WTO(세계무역기구)와 한국농업, 한국의 녹색혁명 등에 대한 해설도 곁들였다.

    프랜씨스 라페 외 지음/ 허남혁 옮김/ 창작과 비평사 펴냄/ 384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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