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8

2003.11.06

“재일동포 차별 문제 남북 같이 풀자”

北, 일본인 납치 시인 후 위협 사례 급증 … “남북회담 공식 의제 상정해야” 목소리 높아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10-29 1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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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동포 차별 문제 남북 같이 풀자”

    10월24일 재일동포에 대한 가해 문제를 논의한 국내 최초의 국제회의에서 긴히테 무샤코지 반차별국제운동 부회장(원 안)이 기조발언을 통해 일본의 재일동포 차별에 항의했다.

    ‘까마귀가 울지 않는 날은 있어도 재일동포가 탄압받지 않는 날은 없다.’ 이는 재일동포 사회에서 널리 쓰이는 말로, 일본 사회에서 재일동포가 얼마나 지속적으로 차별받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다. 지난해 9월17일 열린 북·일정상회담 당시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한 사실을 인정한 뒤에는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있다. 가해 사례도 크게 늘어났고, 그 대상이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계를 가리지 않고 재일동포 전체로 확대된 데다 일본 사회가 급속히 우경화로 치닫고 있어 재일동포 사회는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런 상황은 10월24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하 경실련)과 반차별국제운동(IMADR) 일본위원회가 공동 주관하고 국내 시민단체와 총련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일본인의 재일동포 가해문제 대책 국제회의’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됐다.

    여중생 두 명 중 한 명꼴 “괴롭힘 당했다”

    이날 거론된 대표적인 차별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차별행위. 또래 학생들에서부터 50대 성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일본인들이 어린 재일동포 학생들을 괴롭혀왔다. 지난 1월 말 등교하던 재일동포 여학생이 정체불명의 남성에 의해 교복 치마저고리를 찢긴 상징적 사건을 포함해 올 6월까지 300건 이상 발생했다.

    지난 여름 긴키변호사연합회에서 오사카 조선학교에 다니는 1768명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차별실태를 조사한 결과, 일본인으로부터 차별대우를 받거나 놀림 등을 당했다고 밝힌 학생들이 전체의 23%인 416명이나 됐다. 특히 여중생의 경우 두 명 중 한 명꼴인 48.3%가 괴롭힘을 당했다고 답했다. 간토지방의 21개교 2710명을 대상으로 한 젊은 변호사들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9월17일 이후 약 6개월 동안 피해를 당한 재일동포 학생 수는 전체의 19.3%인 522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주로 “조선으로 돌아가” “죽어, 널 납치할 거야” “조센징은 냄새나, 멍청이” 같은 모욕적인 말들을 들었다. 송승재 재일코리안청년연합 공동대표는 “이는 피해학생들이 총련이나 북한과 관련이 있어서가 아니라 ‘코리안’이기 때문에 차별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그것은 이 학생들의 부모, 조부모 세대가 한국 국적이냐, 조선 국적이냐에 관계없이 노골적으로 차별받던 시대에 들었던 말과 똑같다”고 말했다. 일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일본인 사회에서 생활하는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역시 위협이 되고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손동주 지구촌동포청년연대 사무국장은 북한 만경봉호의 입항 금지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던 우익 시위대가 귀가 도중 민단 사무실을 향해 “너희도 똑같은 놈들이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고 돌을 던지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문치웅 한국-재일-일본 청년포럼 한국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조선학교 학생들에 대한 폭언, 폭행과 총련 관련 기관에 대한 총격, 방화, 일상적 협박, 재정적 압박 등은 정도가 더욱 심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량옥출(52) 총련 중앙본부 여성국 부국장은 “간토(關東)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희생당한 사건이 재현될 수 있다는 공포심이 동포들 사이에 퍼져 나가고 있다”고 재일동포 사회의 분위기를 전했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나돌아 결국 6000여명의 조선인이 자경단(일본인이 조직한 자체적 경비단체) 등에 의해 희생됐다.

    “재일동포 차별 문제 남북 같이 풀자”

    치마저고리를 입고 등교하는 조선학교 학생들은 쉽게 일본 우익의 가해 대상이 된다.

    이처럼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하지만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도 언론에 관련 사실이 보도될 때만 잠시 귀기울일 뿐 무관심으로 일관해왔다. 1년여가 지난 이제서야 시민단체들이 본격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기에 이르러 이번 ‘일본인의 재일동포 가해문제 대책 국제회의’가 열리게 된 것.

    서경석 경실련 상임집행위원장은 “한국 내에서 좌우 이념 대립이 심해지면서 한국 정부가 총련과 민단으로 나뉘어 있는 재일동포 문제에 대해 입장을 표명하기가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고 한일 양국이 협의해 해결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이번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참석자들의 공통된 의견은 일본인들이 재일동포를 가해하는 현상은 본질적으로 일본 사회가 우경화하면서 생겨났다는 데 모아졌다. 물론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결국 일본인들이 조선을 식민지배할 때 생긴 뿌리 깊은 우월의식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최근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는 게 바로 일본 사회의 우경화라는 것. 많은 사람들은 일본 사회의 우경화 경향이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고 표현했다.

    이런 우경화는 우익 정치가들과 매스컴이 주로 이끌고 있다. 올 들어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계속하겠다”는 발언, 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의 일본 핵무장 용인론, 아소 다로 자민당 정조회장(政調會長)의 “조선인의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바란 것이다”는 등의 우려되는 발언이 계속 이어지고 있고, 매스컴도 이런 내용을 편향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사가나가 히데노리 법무성 도쿄입국관리국 국장은 ‘주오공론’ 2003년 7월호에 ‘재일조선·한국인 자연소멸론’을 주장하는 논문을 싣기도 했다.

    일본 사회 우경화가 가해 현상의 본질

    그동안 일본은 신가이드라인관련법, 주변사태법 등 여러 가지 전쟁 관련법을 채택했고, 2년 뒤에는 집단적 자위권을 발동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일본 사회에서 국수주의의 영향력도 점차 커지고 있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우익인사인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인기가 높은 것도 그 한 단면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재일동포 학생들이 다니는 조선학교 등 민족학교에 대해 일본국립대 입학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있어 입학자격을 얻으려는 학생들은 주말에 다시 일본학교 졸업자격을 위한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조선학교에 기부금을 내면 면세 대상이 되지도 않으며, 조선학교는 일본학교가 받는 보조금의 10분의 1만 받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에서 조선요리, 조선음식점이라는 간판은 대부분 없어졌는데, 우익단체 관련 선전차량이 와서 ‘조선인의 점포’라고 떠들기 시작하면 아무도 그 가게에 들어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은 이처럼 정치, 경제, 문화는 물론, 일상생활에서까지 ‘대대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량옥출 부국장은 “재일동포에 대한 일본인의 차별은 제도적이고 집단적이며, 조직적이다”고 지적했다.

    김영호 경실련 국제연대 이사장은 “북·일정상회담 이후 재일동포를 보는 일본인들의 시각이 대(對)조선 내지 대북 가해의식에서 피해의식으로 급선회하고 있어 충격적이다”며 “이것은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과 군비확장 노선과 연계돼 있어 더욱 우려되며, 이는 6자회담의 장래마저 어둡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일동포 가운데서도 특히 조선인 문제는 남과 북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복잡한 문제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통일을 지향하는 정부라면 재일조선인 문제를 남북회담의 공식의제로 상정하고 남과 북이 한 목소리로 일본 정부와 사회에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오규상 재일 조선대 교수는 “재일동포 사회가 이념에 따라 분리돼 있지만 한 목소리로 이에 대응해야 한다”며 “유엔을 비롯한 국제무대에서 일본 당국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등 계속 국제여론을 환기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재일동포 차별 문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안이한 대응을 강도 높게 비판하는 일본인들도 적지 않다. 긴히테 무샤코지 반차별국제운동 부회장(유엔대 교수)은 “일본 정부는 더 이상 납북자 문제와 외국인 혐오증을 이용해 역사적 부채를 회피하지 말고 남한의 대북 포용정책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며 “대중매체도 균형 잡힌 시각으로 두 민족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재일한국인들의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재일한국인문제연구소 사토 노부유키씨는 “그동안 한국 정부와 한국 사회는 무엇을 했느냐”고 되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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