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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색도시 ⑪ |스리랑카 캔디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 글·사진/ 스리랑카 캔디=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부처의 치아사리를 모신, 전 세계 불교신자들의 성지인 불치사 전경.

”걱정되면 눈을 감으십시오.” 운전을 하던 현지인 기사 노엘이 처음으로 내게 던진 말이다. ‘불심(佛心)이 흐르는’ 스리랑카 캔디로 가는 길은 시작부터 짜릿(?)했다. 수도 콜롬보에서부터 중앙선도 없고 신호등도 없는 2차선 도로를 차들이 경주하듯 달린다.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삼륜 개인택시 ‘툭툭’을 타고 온갖 차들을 요리조리 추월해가며 고갯길을 2시간30여분 가면 해발 600m 분지인 캔디에 닿는다. 캔디는 북쪽의 폴론나루와, 동쪽의 아누라다푸라와 함께 스리랑카 불교문화 트라이앵글의 꼭지점이다. 이 세 곳을 이어놓은 선 안쪽은 수많은 불교유적이 살아 숨쉬는 그야말로 ‘야외 불교 박물관’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 캔디는 인구 60여만명이 거주하는, 이 나라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다. 마하멜리 강이 시를 감싸고 흐르는 이 도시에서는 비교적 시원하고 쾌적한 날씨 덕에 각종 채소와 과일이 많이 생산된다.

캔디는 1474년 싱할라(‘사자의 후예’라는 뜻) 왕조 때 수도가 되면서 발전하기 시작한 도시. 싱할라 왕조는 처음에 아누라다푸라를 수도로 정했으나 인도의 잦은 침략으로 폴론나루와, 감포라 등과 같은 여러 도시를 전전하다 마침내 외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이곳 캔디를 수도로 정했다. 350년 가까이 유지되던 싱할라 왕조는 1851년 권력 내부의 갈등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멸망하게 된다.

비록 패망한 싱할라 왕조 최후의 수도이긴 하지만 캔디는 스리랑카 사람들에겐 정신적인 고향이자 안식처다. 바로 부처의 치아사리를 모셔놓은 불치사(佛齒寺)가 있기 때문. 이곳에 모셔진 불치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를 화장할 때 입수한 것이라 한다. 그 후 4세기에 인도의 오릿사주 카링가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감추어 들여와 아누라다푸라에 봉납(捧納)했다. 역대 왕조가 수도를 옮길 때마다 불치를 함께 옮기다 1590년 캔디 왕 수리야 1세 때부터 이곳에 모셨다. 16세기 후반, 그리스도교도인 포르투갈인이 캔디를 점령했을 때 불치를 인도 고아 지방으로 가져가 부수려 했으나 싱할라인들이 가짜 불치를 진짜 불치로 속여 진짜 불치는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었다는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스리랑카 불교유적과 사원에 입장할 때는 반드시 신발과 모자(스리랑카인들은 모자를 사치품으로 여겨 쓰는 사람이 거의 없다)를 벗어야 한다. 자신을 낮추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다. 또 하나, 부처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는 일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다.

부처 치아사리 보관 … 페라헤라 축제 유명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불치사는 명성에 비해 웅장하지 않았지만, 편안한 느낌을 주는 은은한 흰색 벽과 갈색 지붕이 조화를 이룬 싱할라 건축 양식의 팔각형 불당은 아름다웠다. 사원 내부로 들어서자 크리스털 바위를 깎아 만든 석가의 좌상, 정교하게 조각된 돌문, 화려한 당초 모양의 옅은 감색 천장 등이 감탄을 자아냈다.

불치사는 간단한 몸 검사와 소지품 검사만 받으면 입장할 수 있는 데다 새벽부터 황혼 무렵까지 개방되기 때문에 참배하기가 자유롭다. 그러나 불치가 있는 방의 문이 열리는, 하루에 세 번 행해지는 푸쟈 때에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스리랑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모여든 참배객과 관광객들로 경내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인다. 심장을 울리는 북소리와 피리소리를 배경으로 스리랑카인들의 진지하고 간절한 기도가 이어진다. “이곳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이곳에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꽃과 약간의 돈을 시주하고 두세 평 남짓한 방문 앞에서 서너 시간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불심 깊은 구마리(‘공주’라는 뜻) 할머니의 기도가 이어진다.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부처의 치아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행렬의 모습. 보리수 아래 소원을 적어 걸어둔 형형색색의 헝겊들. 불교유적지에서 관광객들을 반기는 코끼리 부조상. 캔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야생 원숭이들(왼쪽부터).

불치사를 방문한다 해도 불치를 직접 볼 수는 없다. 경비원들의 삼엄한 경계 속에 작은 문이 열리면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금제 상자를 먼발치에서 잠시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불치는 일곱 겹으로 되어 있는 이 상자 안에 있다. 하지만 이를 보기 위해 푸쟈 시간에 맞춰 스리랑카 전역에서 전세버스를 타고 마을주민이나 수학여행단이 끊임없이 불치사를 찾아온다.

불치는 1년에 한 번 화려한 외출을 한다. 음력 7월1일부터 15일까지 벌어지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페라헤라(행진) 축제 때다. 이때가 되면 조용하던 도시가 한순간 축제의 열기 속으로 빠져든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불교신자와 여행객, 거기에 주민들까지 가세해 말 그대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화려한 치장을 한 코끼리들이 성스러운 불치를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행렬이 지나는 주요 도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때 추는 춤이 바로 ‘캔디안 댄스’다. 캔디안 댄스는 캔디 왕조의 궁전 연회 때 추던 춤으로, 여기에 각 지역의 민속무용이 합쳐져 쇼의 성격이 많이 가미되었다. 강렬한 북소리와 다양한 전통악기가 만들어내는 음률에 몸을 맡긴 남성 댄서들의 기민하고 박력 넘치는 움직임과 여성 댄서의 화려한 의상과 부드러운 율동이 조화를 이뤄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목공예품을 만들고(위) 차를 따고 있는 현지 여인들.

불치사를 끼고 펼쳐져 있는 캔디 호수는 캔디에 사는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이며 시민들의 훌륭한 휴식공간이자 산책 장소로 사랑받고 있다. 호수에는 여러 종류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으나 낚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몸을 돌려 캔디 남동쪽으로 6km쯤 떨어져 있는 아시아 최대의 식물원 페라데니아에 가면 불교풍이 강한 시내 풍경과는 다른 캔디의 색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페라데니아에 가면 더없는 풍요로움과 평온함을 느낄 수 있다. 1872년에 만들어진 이 식물원에는 4000여종의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캔디를 찾는 관광객이나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반드시 찾는 필수 코스다.

캔디가 불심이 살아 있는 도시라면 캔디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곳에 있는 시기리야 왕궁은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곳이다. 자동차로 정글 속을 2시간 남짓 달리면 적갈색의 바위산이 갑자기 눈앞을 가로막는다. 멀리서 보면 마치 큰 사자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현지인들은 싱하기리라고 부른다. 이곳이 바로 세계 8대 불가사의 가운데 한 곳으로, 유네스코 주도로 복원이 한창인 시기리야 왕궁이다.

‘佛心’이 흘러 넘치는 피안의 땅

200여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남아 있는 시기리야 왕궁터와 시기리야 미인도(작은사진).

도대체 누가, 왜 이 200m가 넘는 바위 꼭대기에 왕궁을 지었을까. 5세기 당시 아누라다푸라를 지배하던 다투세나왕의 장남 카샤파는 아버지를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한다. 카샤파는 왕족 출신 어머니를 둔 이복동생 목갈라나와 달리 평민 출신 어머니를 둔 탓에 동생에게 왕위가 돌아갈 것을 몹시 우려했던 것. 복수를 다짐한 목갈라나가 인도로 건너가 군대를 키워 반격을 해오자 카샤파는 스스로를 유폐시켰던 이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한다.

이곳이 세계적인 명소가 된 것은 스리랑카의 대표적인 예술작품으로 평가받는 시기리야 벽화 덕분이다. 벽화를 보려면 바위산 입구에서 낭떠러지 바위틈에 쇠줄을 매달아 만든 원통형 철망이 둘러쳐진 철제 계단을 20분 정도 올라야 한다.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아가며 위험천만한 철제 계단을 오르면 가슴을 훤히 드러낸 그 유명한 시기리야 벽화 미인이 시간을 뛰어넘어 미소로 반긴다. 시기리야 벽화는 카샤파왕이 부왕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왕의 시녀들이 압 살라라는 요정들을 시중들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가슴을 드러낸 미인이 왕족이고 옷을 입은 미인은 시녀라 전해진다. 이 시기리야 미인들은 당초 500명이 넘었다는데 지금은 훼손돼 18명의 모습만이 남아 있다.

시기리야 벽화 아래쪽으로 약 3m 높이의 ‘거울 벽’이라 불리는 회랑 벽이 이어진다. 달걀 흰자와 꿀, 석회 등을 이겨 칠했다는 ‘거울 벽’은 평소에도 은은하게 반짝거리지만 햇볕을 받으면 환상적인 모습으로 빛난다. 벽에는 역대 왕조의 흥망을 노래한 서사시와 시기리야 벽화의 여인을 칭송하는 시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

왼쪽으로 계단을 계속 오르다 보면 평평한 바위 광장이 나온다. 그 입구는 사자의 발톱 모양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사자의 다리와 머리 모양까지 완벽해 왕궁에 오를 때면 마치 사자에게 삼켜지는 듯한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고 한다. 철제 계단을 통해 거의 60도는 될 듯한 아슬아슬한 경사면을 10여분 정도 더 오르면 왕궁이 있는 정상이 펼쳐진다. 1.6ha 면적의 궁전과 연회장, 수영장, 각종 주거지 등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200여m 높이의 바위 꼭대기에 수영장이라니? 적지 않은 물이 수영장에 고여 있다. 이 물은 지상에서 공급된다고 하는데 그 방법이나 수로를 찾지 못한 채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이곳에 서면 산 아래 밀림이 한눈에 들어온다. 화창한 날에는 아누라다푸라의 루완웰리세야 대탑까지 보인다고 한다. 권력을 얻기 위해 천륜을 어긴 카샤파는 암벽 꼭대기에서 항상 불안과 초조에 떨며 지내야 했을 것이다. 절벽 위에 왕궁을 짓고 고민 많은 왕을 모셔야 했던 수많은 스리랑카인들의 한숨과 탄식을 전해주듯 사람을 날려버릴 듯한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오랫동안 계속된 내전으로 불안에 떨어야 했던 스리랑카는 지난해 2월 북부 타밀 반군과의 휴전을 이끌어내 평온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스리랑카는 ‘인도의 눈물’이 아니다. 찬란한 고대 불교문화의 정신이 흐르는 불교 성지와 천혜의 자연관광지로 각광받는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주간동아 398호 (p76~79)

글·사진/ 스리랑카 캔디=윤융근 기자 yuny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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