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8

2003.08.21

그 순간 ‘현실 고통’ 0%

잔혹하고 엽기적인 공포영화가 뜨는 이유 … 두려움 이기면서 자신감과 의욕 회복

  • 송화선 기자 spring@donga.com

    입력2003-08-13 14: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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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순간 ‘현실 고통’ 0%
    ‘공포를 원하는가.’

    올여름 개봉될 공포영화 ‘데스티네이션 2’의 포스터는 관객을 향해 도발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느낄 수 있는 최대치의 공포를 주겠다’는 이 포스터의 메인 카피 아래 놓인 것은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영화 주인공들의 모습이다.

    또 다른 영화 ‘데드 캠프’의 포스터에는 한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피 묻은 칼을 입에 문 채 울먹이고 있는 이 아이의 눈망울 위에는 핏빛 글씨로 ‘이 순간 살아 있는 게 끔찍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무방비 상태의 공간에서 섬뜩한 살인마와 생존게임을 벌이는… 심장을 멎게 하는 잔혹성, 예상을 뒤엎는 스릴, 전율로 충만한 공포 쾌감’이라는 이 영화의 홍보문구가 담담하게 느껴질 만큼, 이 한 장의 포스터는 ‘최악의 공포를 가감 없이 전해주겠다’는 영화사의 영화 제작 의도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 두 편의 영화만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갑자기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게 되어 있는 휴대전화 벨 소리, 피눈물을 흘리는 검은 드레스의 인형, 한밤중에 흉가를 돌아보는 관광상품 등 올여름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트렌드의 특징은 단연 ‘공포’다.

    공포의 사전적 의미는 ‘괴로운 사태가 다가올 것임을 예측할 때 또는 현실적으로 다가왔을 때 느끼는 불쾌한 감정’. 괴롭고 불쾌한 감정인 ‘공포’가 왜 이처럼 집단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것일까.



    가해자와 동일시 분노 폭발 대리만족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최근의 공포 열풍은 불안한 현실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상명대 영화학과 조희문 교수는 “최근 2~3년 사이에 우리나라에서 공포영화 개봉 편수가 크게 늘고 그 내용도 잔혹해진 데는 사회적 영향이 적지 않다”며 “관객들은 청년실업과 경기불안, 인간소외 등의 사회적 공포를 체감하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공포영화를 찾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교수에 따르면 관객들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가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사회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공격성을 쏟아낸다는 것이다. 조교수는 공포영화에 등장하는 가해자의 공격성 정도가 날로 잔인해지고, 공포 심리를 자극하는 극단적인 비주얼 장치가 동원되는 것은 이 같은 카타르시스를 원하는 관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공포영화 관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공포영화를 볼 때 가장 두려움을 느끼는 장면’ 베스트 3를 살펴보면 3위는 톱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장면, 2위는 손으로 뒤통수에 못을 박는 장면이 차지했고 1위는 송곳으로 눈을 찌르는 장면이다.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에게 ‘가장 무서운 장면’은 곧 영화 전체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은 장면이라는 뜻. 칼로 손목을 자르는 것보다 톱으로 손가락을 자르는 것에 더 강한 자극을 받고, 망치로 뒤통수에 못을 박는 것보다는 손으로 못을 쑤셔넣는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피해자에게 극한의 아픔을 주는 폭력을 디테일하게 묘사할 때 관객들이 두려움과 함께 희열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조교수는 “본인이 느끼든 못 느끼든 그런 장면을 보며 즐기는 순간 자신은 그 영화의 가해자가 되어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실이 부조리하고, 이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때 공포영화가 인기를 끈다는 분석도 있다.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보다 훨씬 극단적인 상황 속의 공포를 보며 ‘그래도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자기 위안을 얻는다는 설명이다.

    그 순간 ‘현실 고통’ 0%

    피눈물을 흘리는 검은 드레스의 인형 ‘리빙데드돌’ 등 괴기하고 공포를 자아내는 소품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프랑스의 월간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장 이냐시오 라모네는 그의 책 ‘소리 없는 프로파간다-우리 정신의 미국화’(상형문자 펴냄)에서 사람들이 위기와 혼란, 절망 앞에 있을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공포영화’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는 이 책에서 “공포에 비하면 가난은 차라리 사랑스럽고 참을 만한 것, 견딜 만한 것이 된다. 공포영화는 거칠지만 시적인 수단들을 통해 관객의 공포와 방황이 흐를 물길을 만들어준다. 현실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이 영화화된 악몽들의 상상계보다 결코 더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라크 전쟁이나 9·11 테러와 같은 끔찍한 재난 관련 보도를 보며 ‘내게 저런 일이 생기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느끼는 안도감을 공포영화가 주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의견도 비슷하다. 정씨는 “공포영화는 관객들이 현실 외부로부터, 공포로부터, 영화로부터 현실의 질서로 돌아오고 싶다는 소망을 갖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라며 “관객들은 공포영화를 보며 사디즘과 마조히즘, 심리적 안정감을 복합적으로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영화적 상황으로부터 도피하고 싶다는 욕구가 현실의 삶을 받아들이게 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공포영화에 관한 이 같은 분석은 다른 공포 트렌드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회학자들은 공포는 일순간 사람의 사고를 마비시킴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고 말한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구성 … 몰입의 즐거움

    정신과 전문의인 열린신경정신과 김용언 원장은 “적당한 공포는 사람에게 그것을 극복하고 싶다는 삶의 의욕을 주고 이겨냈을 때는 자신감과 성취감을 느끼게 해준다”며 “사람들이 번지점프 등의 레포츠에 열광하거나 공포 전화벨 소리, 액세서리 등을 즐기는 것은 자신이 그 정도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자신감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이처럼 공포 트렌드와 사회 현실을 연결짓는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 의견도 있다. 공포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쾌감과 공포를 만들어내기 위해 짜여지는 정교한 구조에 매력을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공포 마니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공포 자체를 즐긴다”거나 “심장이 멎을 듯한 그 순간이 좋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공포영화를 즐겨 보는 서울 모 대학교 3학년 김은진씨도 “공포영화만큼 몰입의 기쁨을 주는 것이 없다. 또 다른 이들은 무섭다며 잘 보지 못하는 공포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데서 오는 만족감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도 “최근의 공포 트렌드는 새로운 흐름을 찾아보려는 제작자의 의도가 소비자의 기호와 잘 맞아떨어진 결과일 뿐”이라며 “조폭영화가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조폭문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처럼, 공포 트렌드가 바로 현실 사회의 부조리와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실세계에 대한 불만과 두려움이 바로 공포에의 동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끝 간 데 없이 이어지는 무한경쟁과 생존의 조건까지 위협하는 극단적 가난, 자살이 끊이지 않는 ‘공포스러운’ 현실이, 최소한 그 순간만 견디면 사라져버리는 가상공간의 공포를 부르는 것일 수 있다는 분석은 한 번쯤 곱씹어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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