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6

2003.08.07

여의도는 ‘정치브로커의 섬’

권력 빌려 민원 해결 이권청탁 ‘불나방’ 집결 … 일부 의원 보좌관들 은밀히 브로커 활동

  • 김기영 기자 hades@donga.com

    입력2003-07-30 14:3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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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의도는 ‘정치브로커의 섬’

    곳곳에서 로비와 이권청탁이 판치는 여의도는 정치브로커의 천국이다.

    며칠 전 여당 모 중진 의원실로 모 기업체 사장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보좌관이 대신 받은 전화에서 이 사장은 자신의 사업과 관련된 해당 정부 공무원에게 민원성 전화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자신의 사업이 국가를 위해 요긴한 일인데도 공무원들이 민첩하게 움직이지 않아 애를 먹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화를 받은 보좌관이 “국회의원이 개인의 이권을 위해 청탁할 수는 없다”고 거절하자 그는 불쾌한 듯 “두고 보자”며 전화를 끊었다.

    이 보좌관은 “이런 전화가 하루가 멀다 하고 걸려오고 있다. 의원이 당직을 맡은 뒤로는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도와달라’는 청탁전화가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청탁에는 은근히 선거자금 지원 등의 당근이 따라오는데, 당근에 눈이 멀어 덥석 받았다가는 쇠고랑 차기 딱 알맞은 위험한 제안도 있었다”고 말했다.

    야당의 한 재선의원 보좌관은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국회가 사실상 ‘정치브로커의 활극장’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정기국회 때 이 보좌관은 다른 의원의 보좌관으로부터 뜬금없는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전화를 걸어온 보좌관은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 보좌관이 준비하고 있는 모 정부부처 국정감사 아이템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그 보좌관은 국감 때 그 부처를 ‘좀 살살 다뤄달라’고 요청해왔다.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부처 실무자인데 각별히 부탁을 해왔다는 것이다. 솔직히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는 사이라 그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대신 ‘나중에 내가 부탁하면 들어줘야 한다’는 다짐을 받고 문제의 국감 아이템을 배제시켰다.”



    이처럼 노골적인 청탁 외에도 국정감사 때면 일부 보좌관들 중심으로 각종 식사모임이 많은데, 나가보면 모임을 주최한 의원 보좌관으로부터 은근히 특정 부처나 정부 산하기관을 살살 다뤄줄 것을 당부하는 부탁을 받게 된다고 한다. 아예 해당부처 공무원이나 기업인이 ‘스폰서’로 배석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국정감사 때면 노골적으로 “살살 다뤄달라” 요구

    이 보좌관은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당시 그 보좌관의 행동이야말로 정치브로커의 전형적인 행태였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행동을 하는 국회의원 보좌관이 부지기수”라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거래하는 국회의원 못지않게 보좌관 가운데도 상당수가 정치브로커로 전락한 지 오래라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여당의원 보좌관은 지난해 가을 자신이 겪은 황당한 경험을 얘기했다. 당시 그가 모시는 의원은 경제 관련 상임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대선을 앞두고 여야간 대립이 심각한 상황이어서 당시 야당 상임위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번 국감에서는 단단히 따지겠다”는 결의가 넘쳐흘렀다고 한다. 그런 결의를 반증하듯 야당 상임위원들은 무려 150여명의 기업체 대표이사 및 임직원을 증인으로 신청했다. 정부 정책과 관련 있는 기업들의 부실을 따지겠다는 것이 증인신청을 한 이유.

    여의도는 ‘정치브로커의 섬’
    그런데 추석연휴 뒤 야당이 신청한 증인 가운데 실제 채택된 증인의 수는 20여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나마 잔챙이급 몇몇만 증인 명단에 남았을 뿐 130여명의 대기업 대표급의 굵직한 증인은 모두 빠진 상태였다.

    앞서의 보좌관은 “당시 해당 기업들이 대표나 오너를 국감 증인 명단에서 빼기 위해 필사적으로 로비를 펼쳤다는 소문이 나돌았다”며 “추석 연휴가 지난 뒤 증인신청이 취소된 것으로 봐 이 기간 해당 상임위 의원을 대상으로 기업들의 치열한 로비전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결국 대선을 앞둔 시기에 대기업을 국감의 대상으로 선정한 것부터가 석연치 않았다”며 “만약 당시 정치자금이 오갔다면 결국 야당의 대선자금으로 전용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이 보좌관의 주장대로라면, 지난해 가을 국정감사 증인 신청 해프닝은 국회의원이 사실상 정치자금 수수를 위한 브로커 역할을 자임한 경우가 된다. 국회의원의 고유 권한을 활용해 기업을 압박하고 정치자금을 받아내는 관행이 계속되는 한 ‘정치인=브로커’라는 오명을 벗을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야당의원 보좌관은 “나만은 정치브로커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나도 모르는 사이 브로커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얼마 전 그는 모 부처의 심각한 내부부정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해당 부처에 관련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그는 의원과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고 의원도 문제의 심각성에 공감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의원회관·주변 커피숍 등 로비스트 밀집지역

    그러나 관례대로라면 진작 왔어야 할 자료가 오지 않았다. 이 보좌관은 그 부처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빨리 자료를 보내달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상대방의 태도가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쩔쩔매던 태도는 간데없고 “왜 자꾸 재촉하느냐”며 오히려 역정을 내는 것이었다. 이 보좌관은 상급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거듭 자료 제출을 요구했으나 상급자도 말투만 공손했을 뿐 은근히 자료를 줄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 보좌관은 자신이 모시는 의원과 이 부처 간에 모종의 ‘딜’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본의 아니게 의원의 ‘또 다른’ 목적 달성을 위해 동원됐다는 사실을 알고는 한동안 허탈한 심경이었다”고 말했다.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국회의원 가운데는 대(對)정부, 대기업 로비능력을 보좌관 선발의 기준으로 삼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4급 보좌관이 2명으로 늘어난 뒤로는 아예 한 명은 정책보좌관으로, 나머지 한 명은 각종 민원업무나 로비를 전담하는 보좌관으로 역할 분담을 하는 의원실도 있다고 한다. 이런 현실 탓에 국회의원회관은 각종 로비를 위한 브로커들의 집결지가 된 지 오래다.

    여의도에서 로비스트들이 집결하는 곳은 의원회관뿐이 아니다. 국회 정문 앞 ㄱ빌딩 지하커피숍과 인근 ㅅ커피숍은 국회를 근거지로 각종 로비를 펼치는 인사들의 밀집지로 하루 종일 양복 차림에 머릿기름을 바른 중년 신사들의 은밀한 회합으로 분주하다.

    ㄱ빌딩이 여야 불문한 각종 민원인들의 집결처라면 한나라당사와 가까운 ㅅ빌딩은 야당 인사들의 회합 장소로 유명하다. 이밖에 민주당사와 가까운 ㅍ호텔 커피숍도 각종 민원을 놓고 밀담을 나누는 장소로 소문이 났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유력 정치인들이 아니다. 중앙당 당직자이거나 의원 보좌진, 그리고 지방의회 의원이나 자영업자들이 이곳의 주된 고객들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 인사는 자신을 호남지역 지방의회 의원이라고 소개했는데 “지역구 민원 해결을 위해 국회의원을 만나려고 상경했는데 이곳에서 의원 비서관을 만나 구체적인 의견 조율을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정치브로커의 타깃으로 기자들도 빠지지 않는다. 한 기자는 사석에서 몇 해 전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친하게 지내던 여권 인사로부터 식사 초대를 받고 나갔더니 지역개발사업을 놓고 소송을 벌이고 있는 기업인을 소개하는 것이었다. 한때 내가 법조를 출입한 것을 알고 있는 이 기업인은 노골적으로 담당 판사를 움직여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어주면 크게 사례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부담스러운 제안이라 적당히 둘러대고 자리를 피했는데 며칠 뒤 나를 소개해준 여권 인사가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의도에는 각종 정치브로커가 넘쳐난다. 국회 근처를 배회하는 사람 가운데 상당수가 각종 이해관계 해결을 위해 움직이는 브로커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권력이 있는 곳에 이권이 있고 돈이 뒤따르는 현실 앞에 ‘브로커의 천국’ 여의도의 풍경은 좀처럼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회와 여의도의 살풍경은 정치개혁이 필요한 이유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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