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7

2003.06.05

서양神 줄줄 외워도 토종神은 몰라?

신이 된 무당 ‘바리데기’아십니까 … 무속 기피 의식 탓 우리 神 등한시하는 콤플렉스로 작용

  • 류이/ 문화평론가·연출가 nonil@korea.com

    입력2003-05-28 16: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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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神 줄줄 외워도 토종神은 몰라?

    바리가 생명수가 있는 선경의 푸른 소나무 밑을 걸어가고 있다.

    신화는 고대의 지혜다. 신화는 ‘나는 누구인가?’ 혹은 ‘나와 너, 그리고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이 찾는 옹달샘이다.

    필자는 세상을 ‘압축해서’ 산 세대에 속한다. 우리 부모세대와 전근대를 함께 호흡했고 전후세대와 근대를 살았고 우리 아들딸과 더불어 현대를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생활은 유교 전통에 뿌리내리고, 사유는 불교적 울타리를 맴돌고, 꿈은 신선경에 두고, 몸은 기독교적 서구문화와 놀고, 가끔씩 의식의 저류에 흐르는 샤머니즘과 그 의식의 지표를 강타한 마르크시즘이 충돌하는 기파를 느끼면서 자본주의적 적자생존의 생활전선 위에서 사회운동을 복합적으로 체험하며, 근대와 탈(脫)근대의 모든 사상과 노선이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지적 혼돈의 시대를 살아왔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온 세대! 그렇다. 그것은 우리 정체성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다. 우리 신화를 빌려 말하자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바리데기’의 물음이다.

    너는 누구냐?

    얼마 전 그리스.로마 신화 열풍을 빗댄 ‘제우스는 가깝고 친한 사촌이지만 단군은 멀고 서먹한 육촌쯤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웃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다른 우리 신들은 어떨까? 몇 년 가도 한 번 만날까 말까 한 팔촌쯤이나 될까? 바리데기는 먼 팔촌이다.

    서양神 줄줄 외워도 토종神은 몰라?

    밭 가는 노인. 바리가 서천 서역으로 가는 길을 물었으나 그는 묵묵부답이다. 바리가 끝없는 밭을 갈아주자 노인은 그제서야 저승 가는 길을 가르쳐준다.혼들이 이승과 절연하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입구(오른쪽).

    애니메이션 ‘바리공주’ 프로젝트로 그나마 바리공주를 아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그 바리공주의 원래 이름이 바리데기다.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천덕꾸러기라는 뜻이다. 그래서 부엌데기처럼 얕잡아 이르는 말인 ‘-데기’를 붙여 부르는 것이다. 어릴 적에 ‘다리 밑에서 주워온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부모님한테 야단맞아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정말로 나는 주워온 자식이 아닐까’ 고민했을 게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때때로 바리데기가 아니었을까? 그런 바리데기가 왜 공주냐고? 아버지가 오구대왕이기 때문이다.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ㆍ아키바 다카시(秋葉隆)가 채록한 ‘바리공주’에 나오는 노래 한 구절을 들어보자. 바리데기가 자신을 데려다 기른 비리공덕 부부에게 “날짐승 길벌레도 다 어미 아비가 있거늘 나의 어미 아비는 어디 있느냐”고 묻자 비리공덕 부부는 “전라도 왕대가 아비 같고 뒷동산 머귀나무가 어미 같다”고 얼버무린다.



    전라도 왕대밭은 멀고 멀어삼시 문안 못 드리겠다뒷동산 머귀나무에 삼시 문안 극진하시더라

    서양神 줄줄 외워도 토종神은 몰라?

    얼음산에서 만난 마고할미. 할미는 바리에게 저승길을 가르쳐주는 대신 추운 겨울날 ‘검은 빨래가 희게 될 때까지 빨라’고 한다.

    바리데기는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갈등한다. 뒷동산 머귀나무를 부모로 삼아 하루 세 번 문안을 드릴 정도로 간절하다. 아마도 머귀나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너는 누구냐? 도대체 누구기에 하루에 세 번씩이나 내게 절을 하고 난리냐?”

    바리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 오구대왕을 위해서 서천 서역국을 지나 저승으로 생명수를 구하러 간다. 부모로부터 보살핌을 받은 언니들은 모두 외면하는데 ‘버림받은’ 바리공주가 왜 아버지를 구하러 가는 것일까? 단순히 ‘효’라는 말로써 바리의 행동을 설명할 수는 없다.

    부모에게서 선택받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콤플렉스를 생각해보라. 이 콤플렉스가 더 큰 반작용을 불러왔을 것이다. 바리의 도전이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강렬한 욕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으로서는 갈 수 없는 ‘길 아닌 길’을 가고자 한 것이다. 그것은 또 다른 죽음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예상했던 대로 바리가 생명수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하다. 저승 가는 길을 알기 위해 ‘마고할미’를 만나 추운 겨울날 검은 빨래를 눈처럼 희어질 때까지 빨고, ‘밭 가는 노인’을 만나서 끝없이 이어진 밭을 한없이 갈기도 한다. 무쇠다리 아흔아홉 칸을 놓아주기도 한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파하기 전에, 예수가 광야에 나가 40주야의 단식기도를 하면서 악마로부터 세 가지의 시험을 받았던 것처럼 바리도 앞으로 닥칠 험난한 고난에 정면으로 맞설 수 있는 내적인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리는 끝없는 사막과 넓은 벌판을 지나 열 개의 지옥과 깃털조차 뜨지 않는 검은 강 유사하를 건너 또 다른 자신의 정체성에 한발 한발 다가선다.

    신이 된 최초의 무당

    바리데기는 무장승을 만나 3년 동안 물을 길어주고, 다시 3년 동안 불을 때주고, 다시 3년 동안 나무를 베어주고서야 생명수를 얻는다.

    마침내 바리데기는 생명수와 생명꽃으로 아버지를 구한다. 그 과정에서 바리데기는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살아난 오구대왕이 “내 죄로다” 하고 탄식하면서, 바리공주에게 “너에게 나라의 반을 주랴? 사대문에 들어오는 재물의 반을 주랴?”고 묻는다. 그러나 바리는 “소녀가 부모 곁에서 잘 입고 잘 먹지 못하였으니 만신의 인위왕(人爲王)이 되겠나이다”라고 답한다.

    매월 여섯 날은 산 사람 천도하고 매월 여섯 날은 죽은 이 천도하고 일곱 폭 치마, 수놓은 저고리에 몽두리를 입고수놓은 가죽신, 넓으나 홍띠, 쇠방울 부채를 들고 만신의 몸주 되다.

    바리는 떠도는 혼백들을 만나 천도하면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는다. 바리는 만신이 되고자 했다. 만신이란 무당을 존중하여 부르는 말이다.

    만신의 인위왕이란 무당들의 시조신, 즉 무조신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가멤논의 딸로서 아르테미스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이피게네이아처럼 신전을 지키는 무당이 아니다. 무당의 몸주, 즉 무당이 모시는 시조신이 되었다. 말하자면 바리는 신이 된 최초의 무당이다.

    바리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회복하고 딸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 여행은 고통받는 자를 위해 봉사하는 무당으로서 새로운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음으로써 끝난다.

    서양神 줄줄 외워도 토종神은 몰라?

    바리의 아버지 오구대왕은 왕비가 여섯 공주에 이어 일곱 번째도 또 딸을 낳자 분노하며 아기를 바다에 버린다. 지옥의 끝을 지나자 펼쳐진 선경. 바리는 이곳에서 생명수를 지키는 무장승을 만나 생명수를 얻고 그와 사랑을 나눈다.(왼쪽)

    그러나 이것은 혼돈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바리데기가 힘들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음에도 이제는 텍스트 바깥으로부터 정체성에 대한 도전을 받는다.

    예컨대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바리가 무당이 아니라 인로왕 보살이 되었다는 다른 이야기본이 나온다. 바리가 절에 가면 인도국 보살이 되고 들로 내려오면 무당이 된다는 이야기본도 있고, 바리가 부처의 제자이자 오구신이라는 이야기본도 있다. 원 바리데기 신화에서는 동물이나 산신이 바리를 구해주는 것으로 나오는데, 불교 영향을 받은 이야기본에서는 석가세존이 등장하여 구해주는 것으로 나온다. 저승이 불교적인 지옥으로 바뀌기도 한다. 인물만이 아니라 이야기의 줄거리까지 변화하며 신화 자체의 정체성까지 흔들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보자. 유교의 무(巫) 탄압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니 건너뛰자. 근대 이후의 이른바 보편종교 혹은 고등종교라 이름하는 것들과의 관계에서, 또 근대 이성과 과학적 사고체계와의 관계에서 대부분의 ‘먹물’들은 무속과 무당을 ‘금기’의 울타리에 가두어왔다. 그리하여 텍스트 안팎에서 바리데기가 신이 된 최초의 무당이라는 사실을 숨기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바리데기가 힘들게 찾았던 자신의 정체성을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신화의 구술자와 그 이야기를 전한 ‘먹물’들 때문에 다시 잃고 마는 것이다. 먹물들은 원래 이런 짓을 잘하는 족속인가?

    그리하여 바리는 원래부터 효를 숭상하는 착한 공주였다는 식으로, 의심할 나위 없는 효녀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고난을 통한 깨달음을 통해서 세상에 봉사하고 인간에 헌신하는 사제의 길을 선택한 무당 바리가 의지가 강하고 효심이 깊은 효녀 바리공주로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나는 바리데기가 겪는 이중의 정체성 혼돈이라고 부르고 싶다. 일컬어 ‘바리데기 콤플렉스’라고나 할까? 바리데기의 이중의 정체성 혼돈은 바로 무속을 기피하는 금기와 무당을 두려워하는 마음과 연관돼 있다. 무당 바리의 정체성 혼돈 위에 덧입혀진 무당 콤플렉스가 착종된 상태가 바로 ‘바리데기 콤플렉스’인 것이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라는 광고 카피는 거꾸로 ‘우리 것 콤플렉스’를 잘 드러내주는 예에 지나지 않는다. 이 금기와 두려움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과 자신의 뿌리를 찾아 그 금기와 두려움을 대면하고자 하는 강한 욕구 사이에 우리 문화의 지형도가 그려진다고 하면 지나친 이야기가 될까? 어쨌거나 나는 말하고 싶다. 이 ‘바리데기 콤플렉스’는 사실상 우리가 갖고 있는 ‘레드 콤플렉스’보다 더 뿌리깊고 더 커다란 영향력이 있다고! 바리를 쫓아 여기까지 와보니, 우리 스스로가 우리 문화의 본체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강이 눈앞에 흐른다. 그것을 ‘바리데기 콤플렉스’라 이름 붙여보았다. 한번 죽어야 갈 수 있는 저승의 강 유사하를 건넌 바리데기처럼 우리도 한번 우리 정신의 근본을 뒤집어보자. 그래야 우리 문화의 세계, 그 광대무변한 새로운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 첫번째 만남이 신화다. 뿌리깊은 ‘무당 콤플렉스’가 우리 신화의 원형, 우리 문화의 원형을 사정없이 비틀고 소멸시켜버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때 우리를 설레게 하는 현대에 살아 있는 고대신화의 마지막 임종, 그 짧은 한순간이나마 지켜볼 영광을 누려보자.

    그 속에서 필자는 ‘신명’의 빛 한 줄기를 찾아보고 싶다. 지금 이 혼돈과 질서의 보이지 않는 작은 틈새에서 문득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신화여행을 꿈꾸며. 지나온 여러 시대의 잔해를 밟고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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