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5

2003.05.22

‘왈츠’에서 ‘살사’까지 파란의 100년

구한말 외국 공관원들 통해 서양춤 첫 도입… 퇴폐 ·탄압 등 숱한 곡절 겪으며 ‘음지서 양지로’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3-05-15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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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왈츠’에서 ‘살사’까지   파란의 100년

    1993년 서울 롯데호텔에서 댄스스포츠 세계챔피언이었던 도니번스(오른쪽) 커플이 정열적인 라틴춤을 선보이고 있다.

    아직도 춤이라고 하면 ‘춤바람’ ‘제비족’ ‘꽃뱀’ ‘퇴폐’ 같은 단어들을 연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말했다가는 구시대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그만큼 댄스(서양식 대중춤)가 대중화했기 때문이다. 댄스를 사랑하는 이들에 의해 부정적인 인식도 바뀌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들에게 춤은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일 뿐이다. 이런 인식의 전환을 계기로 댄스는 우리 사회에 가장 중요한 여가수단의 하나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댄스가 도입 초기부터 음습한 분위기를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댄스는 인간의 본능적인 몸짓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그 사회를 반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왜곡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증거다.

    광복 후 미군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댄스 소개

    우리나라에 서양식 춤이 처음 들어온 것은 구한 말이었다. 당시 주한 러시아 공사가 처음 볼룸댄스(ballroom dance, 현재의 댄스스포츠)라는 걸 들여왔다는 얘기도 있고, 1890년 이하영씨가 한국인 최초로 미국 공사 재임시 보스턴 왈츠를 추었다는 얘기도 있다. 기록상으로 춤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20년대 일본과 소련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이 종로의 황성기독청년회(현 YMCA)에서 시범을 보이면서부터였다. 일제 하에서는 일부 부유층 자제나 도쿄 유학생들이 비밀요정 등에서 춤을 춘 게 전부였으므로 대중화하지는 못했다. 1930년대에 포크댄스가 소개됐는데, 1937년에는 영화배우 오도실, 기생 박금도 등 조선 여성 8명이 대중잡지 삼천리에 ‘서울에 딴스홀을 허(許)하라’고 총독부에 탄원하는 글을 싣기도 했다.

    이후 광복과 더불어 남한에 주둔한 미군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댄스가 소개됐다. 미군들은 밤에 자주 댄스파티를 즐겼고 그곳에 언제부턴가 한국인들이 동석하면서 댄스가 국내에서 대중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시 유행했던 춤의 장르는 주로 ‘지루박’(스윙에서 발달한 자이브의 전신인 지터버그(Jitterbug)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그런데 1930~40년대 미국에서 유행했던 정열적이고 빠른 이 춤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이름만 바뀐 게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한국형 지터버그, 즉 6박자의 ‘지루박’이 탄생했다. 혹자는 한복과 고무신 차림이 주를 이루던 당시의 복식문화에서 정열적이고 빠른 지터버그는 무리였다고도 말한다. 이때 트로트 탱고 블루스 왈츠 등이 본격적으로 도입됐으며 한국전쟁 때 맘보 차차차 등도 알려졌다.

    당시는 댄스를 정식으로 가르치는 학원(교습소)이나 지도할 수 있는 교사가 없어 미군들이 추는 것을 보고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생명력은 대단했다. 전쟁중 대구, 부산 등지로 피난 간 사람들 중 일부가 밤에 비밀리에 댄스를 즐겨 비난을 받기도 했다. 전쟁도 춤을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서울 수복 후 명동 소공동 등에 댄스홀과 무허가 교습소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댄스는 본격적인 대중화의 길에 들어선다. 곧 이어 희대의 제비족 사건인 박인수 사건과 대학교수 부인의 춤바람과 탈선을 그린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 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다. 춤을 추는 것이 바로 탈선으로 인식되는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다.

    ‘왈츠’에서 ‘살사’까지   파란의 100년

    1980년대까지만 해도 춤은 음지의 문화였다. 교수 부인의 춤바람을 소재로 한 영화 ‘자유부인’과 80년대 인기를 끌었던 디스코클럽의 내부 모습(왼쪽부터).

    1959년 최초의 전국 무도선수권대회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며 댄스의 새로운 도약기를 예고했지만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다시 침체기에 들어섰다. 당시 국가경제의 재건을 부르짖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땀’을 요구했던 군사정권이 사회기강 확립을 이유로 댄스홀을 폐쇄하는 등 탄압 국면에 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당국의 단속이 시작되자 댄스교습소는 지하로 숨어들었고, 유흥업소의 조명도 어두워졌다. 춤을 배우는 것은 죄가 되고, 출줄 아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 모순이 혼재했다. 이런 상황에서 댄스홀 대신 카바레가 등장하면서 우리나라판 ‘지루박’과 ‘부루스’가 성행했다. 트위스트가 등장해 대중 속으로 파고든 것도 이때다.

    그러나 이런 탄압에도 몇몇 뜻 있는 전문 댄스인들이 댄스 경기대회를 열고, 외국의 유명 전문가들을 초청해 정통댄스를 배우며 사회의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1969년 문화공보부 사회단체로 대한무도예술협회라는 단체가 설립됐다.

    이후 매년 수많은 경기대회가 열리고 적극적인 홍보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일부 계층에서는 댄스를 유흥, 오락의 도구로만 인식하고, 어두운 곳에서 술에 취해 추는 것으로 여겼다. 매스컴에서도 댄스홀 단속을 크게 보도하였고, 그러한 분위기 탓에 댄스는 곧 탈선이라는 도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반영하듯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다시 한번 사회를 놀라게 한 ‘7공자 사건’이 발생했다. 한 정보기관 간부의 부인이 어느 제비족과 바람이 나자 정보기관에서 대대적으로 제비족 단속에 나섰다. 당시 정보기관은 춤을 잘 출수록 여자를 많이 유혹한다고 판단해 춤을 잘 추는 순으로 7명을 사법처리했고, 사교춤계에서는 이들을 7공자라 불렀다.

    이런 한편에서는 젊은이들이 나름대로 새로운 문화를 일궈가고 있었다. 1960년대 중반에 인기를 끌기 시작한 고고(GOGO)춤이 70년대 청소년 문화를 선도했다. 청바지와 통기타로 상징되는 70년대의 젊은이들은 유신탄압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고고춤으로 청춘의 열기를 발산했다. 이어 1977년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이후 전 세계로 퍼진 디스코는 몇 년 뒤 국내에 상륙, 한동안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사교춤은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여전히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남편을 중동건설 현장에 보낸 일부 부인들이 카바레에 드나들다 탈선, 사회문제로 비화하기도 했다.

    90년대 들어 사교춤은 부활의 날개를 폈다. 1991년 풍속영업법에 의해 무도교사자격시험제도가 실시됐고, 일부 대학에서 댄스스포츠 강좌를 개설하는 등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 것. 98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때는 사교춤이 댄스스포츠(왈츠 탱고 폭스트롯 비엔나왈츠 퀵스텝 등 모던 5종목과 룸바 차차차 삼바 파소도블레 자이브 등 라틴 5종목)라는 이름으로 시범종목으로 채택돼 그 발전 가능성을 알렸다.

    댄스학원이 신고필증을 교부받아 정식 영업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댄스 인구도 조금씩 늘어났다. 댄스 종주국인 영국에서 유학한 전문인들이 정통댄스를 국내에 보급했으며 국제대회에서 상위에 입상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왈츠’에서 ‘살사’까지   파란의 100년

    요즘 국내 댄스산업을 평정하고 있는 것은 다양한 변형이 가능한 재즈댄스다. 이화여대 재즈댄스 동아리의 연습 장면.

    현재 댄스스포츠는 문화센터, 사회체육센터, 구민회관, 대학교 등에서 정규프로그램이나 정규과목으로 채택돼 단순한 오락의 범위를 벗어나 생활체육과 교양의 수단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전 국민이 댄스를 스포츠로 즐겼는데 유독 지구상에서 이를 탄압한 나라라는 오명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한편 젊은이들 사이에 80년대는 별반 뚜렷한 춤 문화 없이 흘러갔다. 90년대 들어서서 록카페 등을 중심으로 힙합, 테크노 등이 새로운 청년문화의 개막을 알린 뒤 현란하고 역동적인 동작의 브레이크댄스가 등장했다. 현재 국내에서 가장 대중적인 춤은 재즈댄스. 1920년대 재즈의 발상지인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태동한 이 춤은 당시 뒷골목 유흥가 클럽에서 재즈음악에 맞춰 쇼걸들이 추는 싸구려 춤이었지만 브로드웨이 뮤지컬, 고전 발레 등과 접목해 새로운 장르로 태어났다.

    재즈가 모든 음악과 잘 섞이는 것처럼 재즈댄스 역시 어떤 음악과도 친화력이 있어 사물놀이나 ‘쿵따리 샤바라’ 같은 댄스음악과도 잘 어울린다. 최근 대형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국내 공연이 잦아지면서 재즈댄스 중에서도 뮤지컬 재즈댄스의 대중화 붐이 일기도 했다. 재즈댄스는 탭, 펑키, 힙합, 브레이크, 하우스, 스윙, 비밥 등 여러 요소를 갖고 있어 다양하게 분화 발전하고 있는 중이다. 재즈댄스의 기본정신은 춤 동작만큼이나 다양한 ‘자유’다.

    젊은이들은 요즘, 어른들이 나이트클럽 등의 놀이공간을 차지하면서 인터넷 동호회 등을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공간을 찾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댄스바다. 이들은 특정한 공간을 선정해 정기모임이나 파티를 열면서 새로운 커뮤니티 문화를 일궈가고 있다. 이들이 즐기는 춤은 어느 하나에 한정돼 있지 않고 람바다, 힙합, 살사, 테크노 등 현대적인 장르에서 스윙 트로트 등 고전적인 장르까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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