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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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의 성공’ 전국을 쏜다

김두관 행자부 장관 군수에서 파격 점프 … 관가 새바람 파격 행보 예의 주시

  • 강정훈/ 동아일보 사회1부 기자 manman@donga.com

    입력2003-03-05 17: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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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해의 성공’ 전국을 쏜다

    2월27일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는 김두관 행정자치부 장관(오른쪽).

    ‘남해군수 번지점프를 하다’.

    김두관 행정자치부(이하 행자부) 장관이 지난해 3월 도지사 출마를 위해 남해군수직을 물러나기 전 펴낸 자신의 저서 제목이다. 1996년 남해 벚꽃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야심을 펼칠 수 있기를 바라며 남해대교에서 번지점프를 한 데서 따온 제목이다.

    마을 이장에서 민선 군수로 변신했던 그가 시골 군수에서 노무현 정부의 첫 행자부 수장으로 또다시 ‘점프’해 주위를 놀라게 했다. 95년 최연소 민선단체장의 기록을 세웠던 김장관은 노무현 정부 최연소 각료다. ‘토종 지방 인사’의 중앙무대 발탁이라는 점도 이례적이다. 김장관 자신도 파격으로 비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지 않았다. 그는 “(나의 장관 발탁에 대해) 주위에서 과거 마을 이장이 군수가 될 때 받았던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받은 것 같다”며 “장관은 중량감이 있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인생역정과 철학이 노대통령과 흡사해 ‘작은 노무현’으로도 불리는 김장관의 개혁성향이 행정에 어떻게 반영될지 행자부는 물론 전국 지자체 공무원들이 예의 주시하고 있다. 김장관이 창간한 남해신문의 한관호 대표(44)는 “우직하고 뚝심 있는 것과 자수성가한 점 등은 영락없이 노대통령을 닮았다”며 “민선 단체장이면서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면 표를 잃는 시책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무서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또 “김장관이 사람을 널리 사귀는 성격 때문인지 측근이나 심복은 아예 없다”며 “이러한 점도 공정하고 투명한 행정을 펴는 데 강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장관의 이력을 들여다보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일부에서는 ‘관운(官運)이 따른다’고 얘기하지만 오늘 그의 영광은 정도를 벗어나지 않은 일관된 삶이 만들어냈다고 봐야 한다는 게 주변의 대체적 평가다.



    우직·뚝심으로 자수성가 ‘리틀 노무현’

    경남 남해군 고현면 이어리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난 김장관은 도마초등학교와 남해중, 남해제일고를 거쳐 동아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가정형편은 넉넉지 않았다. 그는 최근 “어려웠던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게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민주화운동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던 1986년 재야단체인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간사로 일하면서 직선제 개헌투쟁 청주집회를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3개월간 복역했다. 이후 그는 인생의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는 “사회변혁의 뿌리를 튼튼히 하고 머지않아 다가올 지방화시대에도 대비한다”며 고향인 남해로 내려와 남해군농민회를 결성하고 지역 도서관 겸 사랑방인 ‘책사랑 나눔터’를 운영했다. 모두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시작한 힘든 일이었다.

    이어 1988년 13대 총선에 나섰으나 고배를 마신 뒤 2년여 동안 140여 가구가 사는 이어리의 이장을 지냈다. 89년 주간 남해신문을 창간해 직접 배달하는 등 발로 뛰는 경영을 하면서 지역민들과 가까워진 그는 95년 지방선거에 출마,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주위의 비아냥을 무색하게 만들며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자당 후보를 눌렀다. 37세의 전국 최연소 단체장의 탄생이었다.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주위에서 5000원, 1만원씩 보태주는 정성들이 선거자금의 전부였다”며 “지난해 대선 때 노대통령에게 답지한 ‘희망돼지’와 비슷했다”고 말했다. 그가 취임한 직후부터 남해군에는 개혁과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계도용 신문의 구입 중지와 군청 기자실 폐쇄, 군수 관사 철거, 군수실 투명유리 설치, 인사청탁 공무원에 대한 불이익 처분 등이 쉴새없이 이어졌다. 지역언론과 토호들의 강력한 저항과 함께 “젊은 군수가 마음대로 군정(郡政)을 주무른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그는 청렴을 바탕으로 한 돌파력으로 난관을 헤쳐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가 보여준 행정 쇄신책이 눈길을 끌었다. 그는 “공개적이고 투명한 민원처리를 위해 주민과 전문가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관련자의 의견을 들은 뒤 해결책을 제시하는 ‘민원 공개법정’을 전국 처음으로 도입했다. 민원 공개법정에서는 마을버스의 운행을 어느 업체에 맡길 것인가, 누구에게 어장을 옮기는 우선권을 줄 것인가 등 첨예한 민원들이 척척 해결됐다. 또 공사현장에 지역주민을 파견하는 ‘주민감독관제’를 시행했고, 민심 파악을 위한 여론조사도 수시로 실시했다. 공무원 조직의 의식개혁을 위해 헌신성과 전문성, 청렴성, 창의성, 현장성을 ‘공무원 5대 덕목’으로 정하고 능력 위주의 발탁 인사로 조직 내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초기에 적잖이 반발했던 내부 구성원들도 차츰 그의 공정한 인사에 수긍했다. 남해지역의 한 언론인은 “일선 공무원들이 창의성을 갖고 일할 수 있는 역동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 무엇보다 큰 성과였다”고 회상했다.

    ‘남해의 성공’ 전국을 쏜다

    남해군수 시절의 김두관 장관(가운데).

    그는 이와 함께 남해라는 제한된 환경에서 공장 유치를 통한 지역개발은 불가능하다고 판단, 스포츠마케팅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환경보전과 지역발전이 공존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10만여평에 달하는 버려진 땅 서면 서상매립지에 축구장과 야구장, 콘도 등이 갖춰진 대규모 스포츠 파크를 조성해 전국유소년축구대회를 유치하는 등 성공적으로 운영했다.

    ‘관광 남해’가 ‘묘지 천국’이 되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 추진한 ‘금수강산 물려주기 운동’은 표(票)와 민심을 먹고 사는 민선단체장으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시책이었다. “군수가 군민들을 핍박하여 불효자를 만들고 있다”거나 “화장은 고인을 두 번 죽이는 처사”라는 비난이 난무했지만 설득하고 또 이해시켰다. 결국 그는 남해를 전국에서 유일하게 불법묘지가 거의 없는 자치단체로 만들어놨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남해군수에 재선된 그는 지난해 지방선거 한 달 전 민주당에 입당, “대한민국은 노무현에게, 경남도는 김두관에게 맡겨달라”고 호소하며 경남도지사 선거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이른바 ‘노풍(盧風)’이 사그라진 데다 정당의 지역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해 16.88%의 득표율을 올리는 데 만족해야 했다. 그는 이어 대선 때 민주당 경남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악조건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다산 정약용과 백범 김구를 가장 존경하고 “백성은 가난한 것에 화내기보다는 불공정한 것에 분노한다”는 중국 송나라 때의 한 성리학자의 말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다는 그의 가장 큰 강점은 ‘겸손’과 ‘청렴’이라는 게 주위사람들의 얘기다. 지난해 그를 만났던 재야 선배 격인 장기표씨는 “예의바르고 행동 하나하나에 겸손이 배어 있는 된사람이었다”고 평가했다. 김장관은 제대로 된 재산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의 한 지인은 “한마디로 ‘쓸 만큼의 돈’도 없는 사람”이라며 “그만한 경력의 사람 가운데서는 가장 가난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물욕이 없는 데다 호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있으면 먼저 꺼내 쓰는 성격 때문이다. 그런 탓에 부인 채정자씨(42)도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는 평소 “작은 것에서 시작하고,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정신이 필요하다. 세계화도 지방에서 시작돼야 한다. 참여와 분권 없이는 국가의 미래도 없다”고 강조해왔다. 그래서 이런 구호를 자주 입에 올린다. ‘생각은 지구적으로, 실천은 지역적으로(Think globalize, Action localize)’.

    농촌 출신으로 실업고교를 나와 자수성가했고, 토론을 좋아하고 언론과의 정면승부를 겁내지 않으며 일찍이 지방분권에 눈을 뜬 점 등이 그와 노대통령의 닮은 점이라는 게 주변의 평이다. 노대통령 역시 그를 발탁하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공개적으로 힘을 실어줬다.

    내년 총선 때 남해에서 출마,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싶다던 그의 포부는 이번 입각으로 수정이 불가피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그의 정치적인 ‘점프’가 이번이 마지막이 되리라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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